80년대 중반, 잉위맘스틴이란 기타리스트가 등장했다. 짧은 시간에 수없이 많은 음을 속사포로 부어버리는 속주. ‘어떻게 기타로 이런 연주가 가능하단 말인가’하며 열광하던 우리는 그의 현란한 연주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마치 영화 크로우에서처럼, 수많은 음을 순식간에 쏟아내기 위해 온몸을 쥐어짜고, 손가락은 정신없이 허공을 가르리라.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청소년에겐 금지된 혜화동 어느 골목의 카페에 출입했고, 그곳에선 락음악 공연 영상을 스크린에 띄워주었다. 한참을 기다려 드디어 잉위맘스틴의 연주를 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실망 아닌 실망을 하게 되었다. 기타를 움켜쥔 왼 손가락은 꼬물꼬물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포지션 이동도 힘없이 미끄러질 뿐이었다. 그 상황에서 내 뱉은 말. “소리가 어떻게 다 나네...”
기술-테크닉이란 그런 것이다. 힘을 빼고 편안하게, 그래야 비로소 빠른 연주가 가능해진다. 클래식기타 마이스터쿠어스(국제콩쿨)에 참가했던 첫날, 각국에서 모인 선수들이 기량을 한껏 뽐내고 있었다. 손가락이 복잡하게 엉키는 곡들을 어찌나 빠르게 연주하는지, 하지만 그에 대한 놀라움은 며칠 가지 못했다. 마지막 날 쯤 되자 한 친구의 농담으로 모두가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빠르게, 빠르게, 더욱 빠르게, 이곳은 클래식 기타로 달리는 올림픽 현장입니다.” 예술표현이 부재한 기교의 번뜩임엔 쉽게 지치는 법.
그에 반해 대가로 불리는 연주자의 음악을 들어보면 번뜩이는 기교는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는다. 관조자는 그저 예술에 취할 뿐. 기교는 산소와 같다. 결핍은 생존의 불가능을 야기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유려하게 흘러가는 예술 표현 속에 숨어서, 산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기교다.
2014년 올림픽, 김연아씨는 은퇴를 선언하며 마지막 무대를 보였다. 많은 이들이, 심지어 전문가들마저 “예전에 비해 스피드와 파워가 죽었다”라는 평을 했다. 과연 그럴까? 그럴 수도 있겠다. 초당 스케이팅 스피드를 측정해서 그 결과를 통해 결론을 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얼마나 중요한 것일까?
이번 올림픽 경기를 보면서 확연히 드러난 차이가 있다면, 러시아 선수들은 헐리웃영화작법에 비할 정도로 빠르고 화려한 전개를 보였다면, 김연아 선수는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를 연상케 할 정도의 차분한 전개를 펼쳤다. (헐리웃 영화는 시작한지 수분 내에 화려한 특수효과를 동반하여 관객을 몰입시키는 작법을 구사한다. 하트를 그리며 시작하여 총성과 함께 허공을 바라보는 율리아의 쇼트 프로그램을 기억해보면 그 유사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김연아씨는 메달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올림픽에 임했다 하였다. 그 때문일까? 스케이팅의 속도도 점프도 스핀도, 어느 무엇도 고개를 들어 과시하지 않았다. 신체의 일부분처럼 자연스레 움직일 뿐, 흐르는 음악과 함께 모든 것은 완벽한 예술 퍼포먼스 안에 스며들어있었다. 그 유려한 스케이팅을 ‘예술’이라고 칭하는 것은 더 이상 수사적 표현이 아닌 예술에 대한 개념정의이리라. 마지막 무대는 경쟁을 위한 기교의 드러냄이 아니라 세상 모든 팬들에게 바치는 마지막 작품이었을 게다. 화면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마도 빙판 위에서의 모든 스피드 강약은 음악과 함께 일치되어 흘렀을 거라 예측한다.
이 글을 읽는 혹자는 금메달을 도난당한 홧김에 쓰는 찬양글이라 여길 수도 있겠다. 그에 대한 변명은 내가 할 수 없는 영역. 굳이 덧붙이자면, 나는 이 모든 결과에 속이 후련하다. 취향의 기반위에 쌓여진 예술 가치는 점수라는 세속적 단위환산으로 평가받는 게 아니기에. 올림픽은 자조로 막을 내렸고, 전설은 감동의 서사로 구전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