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시시콜콜한 정부 방침까지 구조본 팀장회의에 올라오곤 했다. 대표적인게 '참여정부'라는 명칭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 전 열린 팀장회의에서 노무현 정부의 명칭에 관한 안건이 올라왔다. 당시 회의에서 '참여정부'가 좋겠다고 의논이 모아졌는데, 실제로 노무현 정부의 공식명칭이 됐다. 노무현 정부와 삼성 사이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노 전 대통령은 삼성에 진 빚이 너무 컸다. 정권 초기 안희정 등 측근들이 구속되는 것을 보며 노 전 대통령과 삼성의 연결고리가 끊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순진한 오해였다. 노 전 대통령은 임기를 마칠 때까지 삼성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건희는 대통령을 우습게 여기곤 했다. 정부의 경제특구계획에 대해 이건희가 사장단 회의에서 "대통령쯤 되는 사람이 쩨쩨하게 넘 통이 작다"며 멸시하는 말을 한 게 기억난다.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이건희의 북경 발언이 문제가 된 적이 있는데, 나는 그게 실언이 아니라 소신이라고 본다.
2002년 대선 당시, 구조본 팀장회의 참석자들은 대부분 이회창을 지지하는 분위기였다.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올라가면 반가워했고 그렇지 않으면 노골적으로 낙담했다.
그런데 예외가 있었다. 나와 이학수 실장이다. 하지만 나는 속내를 드래내지 않았고, 이학수는 솔직하게 이유를 말했다. 이학수는 부산상고 후배인 노무현과 인간적으로도 아주 친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이학수를 '학수 선배'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학수는 노무현 후보의 당선이 삼성에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노무현 정부 정책 가운데 삼성에 불리한 것은 거의 없었다. 대신,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제안한 정책을 노무현 정부가 채택한 사례는 아주 흔했다. 심지어 삼성경제연구소는 아예 정부부처별 목표와 과제를 정해 주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인 정책 가운데 대표적인 게 한-미 FTA이다. 먼저 미국과 FTA를 맺은 멕시코 등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 한미FTA체결 이후 한국 정부의 주권과 사회 공공성이 얼마나 큰 위협을 받게 될지 등에 대해 다양한 지적이 나왔지만 노무현 정부는 이를 가볍게 무시했다. 당시 한미FTA 추진 계획을 사실상 입안하고 추진했던 김현종은 이명박 정부 출범 뒤인 2009년 3월 삼성전자 법무팀 사장으로 전격 영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