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지>
검은 잉크에 물든 종이를
녹여 만든 재생지처럼
세계도 검은 잉크를 품고 산다, 재생지처럼
날카로운 펜 촉에 휘갈겨지던 때를
세계는 기억하지 않는다
얼룩덜룩한 옅은 회색의 재생지로
역사라는 제목의 책을 발행해
깊숙한 곳에 꽂아 두고 아무도 꺼내 보지 않는다
<내가 시를 쓰는 이유>
그 사람이 혹시라도 내 시를 보게 되는 날이 올까봐
연하디 연한 나의 존재,
조금이라도 더 진해지고파
진한 시를 쓰기 위해 연필심을 날카롭게 깎는다
<바람, 꽃>
꽃을 떨어트리는 바람도
날리는 꽃들이다
땅을 뒹굴어 갈색으로 변한 바람을 보며
하얗게 질린 꽃은
흙으로 돌아가면 잎으로 다시날 것을 모른다
그런 것 쯤 몰라도 된다는 것은 안다
떨어지는 것은 바람에만 맡겨야 한다
팔이 없어서
그만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차라리 누군가의 손에 꺾여 가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은 바람이 된다.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