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수다>를 확 바꿀 생각이란다. 어제(5월 24일 화요일) 김영희 PD의 후임 신정수 PD는 본지 총수가 진행하는 MBC 라디오 프로 <색다른 상담소>에 출연해 이렇게 밝혔다.
뭐 이렇게 폼을 잡고 사진을 찍고그랴...
- (옥주현 출연에 대해)아이돌 중에서도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다. 즉 출연가수들의 성향이 편향될 필요는 없다.
- "매니아성 프로그램"이 되어갈 수 있다. "자기 모순에 빠져서 점점 좁혀지는" 프로가 되어선 안 된다. 대중문화프로그램은 광범위한 대중성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 포맷을 바꿀 수 있다. 현 시점을 시즌 1으로 잡고 시즌제로 바꿀 수 있고 만약 그렇게 되면 현 시즌이 끝나는 시점에 기존의 멤버들을 모두 하차시킨다. "한꺼번에 엎고" 다시 가는 거다. 이 경우 "내밀 수 있는 카드 중에 하나가 젊은 가수들 중에 잘하는 친구들을 모아서 할 수 있는 무대"가 있다 - 아이유, 효린, 태연 등. "판단은 시청자가 할 것이다."
방송이 끝나자 난리가 났다. 총수와 신정수PD의 인터뷰는 포털사이트 뉴스검색란을 도배한 상태고, 언론도 네티즌도 인터뷰 내용을 해석하느라 분주하다. 이 와중에 네티즌들은 신정수PD와 옥주현을 까는데 여념이 없다.
뭐, 옥주현이 노래 잘 부르는 건 사실이고, 사실 옥주현이 잘못한 것도 없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비방은 자제하자거나, 섣불리 판단하지 말고 기다려보자고 말하고 퉁치기도 싫다. 왜냐하면 신PD와 옥주현에 대한 네티즌의 안티질은, 다음의 문장으로 간단히 번역되기 때문이다.
"모처럼 좋아하게 된 프로그램을 제발 망치지 말아줘!"
다급한 마음에 '안돼~!'하고 절규하는 거다. 임재범의 빈자리에 옥주현이 들어온다고? 옥주현 노래 잘 하는 건 알겠는데(분명 아이돌 출신 중에서는 매우 뛰어난 가수다.), 그래도 씨바 이건 아니다 싶은 거다. 나도 마음이 다급해졌다. 내가 이 프로를 더이상 안 좋아하게 될까봐. 어 씨바, 태어나서 처음 열광적으로 좋아하게 된 주말 예능 프로그램인데...
하여 필자는 한 주말 예능 프로그램의 컨셉이 바뀔 수도 있다는 소식에 공포를 느낀 나머지 왜 똥꼬가 움찔거렸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중권과 신해철은 처음부터 이 프로그램에 반대했었다. 분명 우리 사회의 '등수매기는 습관'은 병적인 요소가 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야 새 인재를 발굴한다는 핑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나가수에 출연하는 가수들은 프로 중의 프로다. 한 명이 죽어나가는 프로들의 싸움. 이거 고대 로마의 검투시합과 다를 바가 없다.
나가수에는 피와 신음소리는 없지만, 검투시합보다 더 잔혹한 요소가 있다. 칼싸움의 승패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검투시합에는 판전승이 없다.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먼저 쓰러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음악이라는 예술적 행위에, 가수와 연주자 본인의 감성과 철학이 개입하는 퍼포먼스에 순위를 매길 수 있을까? 가수의 실력을 어느정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순 있어도, 절대적으로 판단할 순 없다.
그러니까 래퍼가 디스(dis)를 쏟아내며 지눈에 꼴같잖은 다른 래퍼와 배틀랩을 벌일 순 있어도, 오페라무대의 프리마돈나와 싸울 순 없는 얘기. 음악은 객관식 시험도 산수도 아니고, 결투는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김영희의 나가수는 가수들의 무대를 검투 아레나로 바꿔버렸다. 한 명이 죽어나간다. 누가 죽을지는 청중평가단의 취향이 결정한다. 자신의 음악세계를 완성한 사람들이다. 그런 전문가들이 대중의 시선 앞에 일렬종대 차렷자세로 서 처분을 기다리는 무대에, 스스로를 폭력적인 순위매기기 놀이에 내세웠다. 그래서 진중권은 나가수 출연자들에 대해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을 했다. 나는 진중권과 신해철의 의견에 동의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반대할 근거를 찾지 못하겠다. 진중권의 의견엔 오류가 없으며, 미학적인 관점으로 보면 백번 옳다. 진중권은 이런 말도 했다.
"... 한 명이 죽어나간단 말이죠. 검투사 같은 거에요. (김건모 하차 번복 건에 대해)관중이 엄지손가락을 내렸는데, PD 혼자 올렸어요. 그러니까 민란이 일어나는 겁니다."
대중과 각을 세우기 위해 한 말은 아니다. 민란이라는 표현은 기회만 있으면 대중에 썩소를 날리는 그의 취미(나쁜 취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가 반영된 첨언일뿐, 사실 진중권은 예술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참 역설적이게도, 나가수의 힘도 검투장의 잔혹함에서 기인한다.
로마 시민들은 정기적으로 피를 원했다. 타인의 처절함은 좋은 구경거리다. 권력자들은 검투시합으로 시민들에게, 피와 죽음을 안전한 방식으로 제공했다. 한편 당연한 말이지만 검투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챔피언이 되는 건 그 다음 문제다. 살아남기 위해(그리고 상대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야 했다. 이 모습에 처음엔 단순히 타인의 불행에 굶주렸던 시민들은 심경변화를 겪게 된다. 나중에는 검투사들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이 선수 저 선수 할 것 없이 열광적으로 응원했던 것이다.
콜로세움 하면, 관중들이 쓰러진 검투사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내리고 어서 저 루저를 죽이라고 짐승처럼 소리치는 광경을 상상하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 시합에 져도 죽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검투사의 진지함(진지하지 않을 수가 있나!)에 마음이 움직인 관중들은 대체로 엄지손가락을 올리는 편이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 아레나의 기괴한 아름다움과 감동은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 한 성립될 수 없다. 그렇잫은가? 관중들이 검투사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죽음으로 검투시합이 잔혹한 서바이벌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아레나의 최고결정자-시합을 주최한 귀족이나 황제-는 관중들에게 욕먹을 걸 감수하고, 반드시 한 번 이상은 엄지손가락을 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욕을 수백배는 더 먹었을 터. 김건모를 부활시킨 김영희 PD처럼 되었을 것이다. 또한 대중은 탈락한 정엽과 김연우를 후하게 대접하지 않았던가. 김건모와는 반대로.
나가수는 출연 가수들에게 절박함을 강요한다. 노래 한 곡이 시작되고 끝나는 시간 동안 목숨을 걸게 만든다. 우리는 느긋하게 앉아서 감상만 하면 장땡이다. 이 비열한 룰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비열해질 수 없다. 시합이 끝나면 검투사들을 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로마시민들처럼, 우리는 120% 아니 200%의 기량을 보여준 가수들을 사랑하고 우러러보게 된다.
진중권의 우려처럼 이 감동의 실체가 아름답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 그치만 결과적으로 감동적인 건 사실이다. 울나라 대중이 노래를 들으며 순전히 노래 자체에, 가수라는 사람 자체에 감동한 적이 언제였던가.
감동 속에서 대중은 두 가지 경험을 한다. <나가수>라는 프로그램이 초반에 밝혔던 것처럼, 우리는 '가수의 재발견', '명곡의 재발견'을 하게 된다. 여기에 <나가수>의 진정성이 있다.
... 라고 말하면 본지가 아니다. 본지가 꼰대가 되고 싶어도 못 되는 이유는 똑똑해서다.
함 생각해보자. 대중이, 시정차가, 진정성에 공감하고 이나라 문화발전에 조금의 보탬이라도 되고자 <나가수>를 봐야 하는가? 뭐 그런 아름다운 분덜도 있을 수 있겠다. 근데 난 그 축에 안 낀다.
시청자들이 <나가수>에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는 명곡을 재발견하고 가수를 재발견하는 과정이 즐거워서다. 우리는 가치판단을 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미학적인 용어를 끌어오자면 쾌(快)와 불쾌(不快)의 판단을 하고 있다. 이 맥락에서는 감동이라는 거창한 말도 쾌와 불쾌의 영역으로 소급된다. 임재범이 마이크를 잡자 윤복희의 <여러분>이 타임머신을 타고 세월을 뛰어넘었다. 이 노래가 이렇게 열광적으로 소비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가수>는 윤리적으로 옳은 프로가 아니라 놀랍도록 즐거운 방송이다. <나가수>는 잊히고 폐기된 즐거움이 치열한 검투를 통해 극적으로 부활하는 쾌감이다. 결론적으로 <나가수>는 즐거움의 재발견이다.
연예는 자본의 기획이 만들어내는 산업이 되어버렸다. 이제 가수와 노래도 유행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 생산과 소비는 맥을 같이한다. 유행이란 본래 대중보다는 자본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산업은 끝없는 생산을 전제로 한다. 계속 생산하려면 계속 소비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전의 것들은 쉼없이 버려져야 한다. 신곡은 금방 잊혀지고 아이돌그룹의 수명은 짧다.
음악산업의 대량생산과 대량폐기는 음악이 대중들에게 주는 즐거움의 성격을 단일화시켜버렸다. 어느 딴지스가 말했듯, 걸그룹에 아무리 쉴드를 쳐줘도 그들의 동작과 웃음이 "훈련된 교태"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구리다고 흉볼 순 있지만 도덕을 들이댈 순 없다. 하지만 잊었던 즐거움을 재발견한 대중은 이제 이 오락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다.
신정수PD는 <나가수>에 대한 시청자들의 태도를 "매니아"적이라고 표현했다. 지금의 포맷과 컨셉이 "자기 모순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대중문화프로그램은 광범위한 대중성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대중적"인 아이돌 가수들의 무대를 위해 판을 엎을 수도 있다는 거다.
대중과 발을 맞추려는 건 당장은 편리하지만 위험할 수 있다. 대중과 각을 세우는 일은 본인의 신념과는 별개로 고생을 사서 할 수 있다. 여기까진 현실의 판단이다. 하지만 대중의 욕구를 개인이 나서서 판단하는 건 영 뜬금없다. 대체 어느 "매니아성 프로그램"이 연일 뉴스 항목 상위를 차지하고, 포털사이트에 고정 카테고리가 생긴단 말인가?
월급날이 되면 강원도 어딘가에 있는 자유를 찾아 홀연이 사라지곤 하는 우리 총수님은 신정수PD가 말하는 '대중성'에 이렇게 반문했다.
"그걸(다른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아이돌을 생산, 소비하는 일을) 왜 나가수가 해야 하죠?"
그러게. 왜 앙드레 김이 스키니진과 하의실종 치마를 찍어내야 하나.
아이돌이 하면 안 되는 걸까? 아이돌은 검을 들고 나와서 시청자들에게 아레나의 쾌감을 선물하면 안 되는 걸까?
임재범의 <여러분>은 가창력이라는 기준을 초월해버렸다. 임재범이 준 감동은 테크닉의 영역 밖에 있었다. 술에 취해 벽에 잠깐 기대려고 조그만 골목길에 들어섰는데 웬 무섭게 생긴 아저씨가 있는 거다. 이 아저씨가 날 와락 안더니 "괜찮아, 울어."한다. "외롭지? 나도 외로워." 팔힘이 세서 빠져나갈 수도 없다. 저기 아저씨, 나 울고 싶지 않은데 왜이러세요... 울 때까지 놔주지 않는 이 인간. 강제로 울었는데 울고 나니 속이 시원해지는 그런 거.
임재범의 인생이 눈물을 만들어냈다고 해서, 모든 출연자가 임재범과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소한, <나가수>는 현재의 획일화된 음악산업에서 어느정도 이탈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아티스트로 채워져야 한다. 번듯한 상품으로 훈련된 가수들이 아닌, 독립적인 개인이어야 한다.
검투시합은 검투사들이 시민 이하의 천한 계급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헌데 검투가 감동적인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검투시합은 테크닉의 경연으로 시작해 인간의 드라마로 끝난다. 아이돌이 천하다는 얘기는 아니고, 인간이 아니라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가수다>의 가수는 사람이다. 사람이 보여야 한다는 얘기다. 그것이 음색이던 전체적인 스타일이던, 아이돌 가수들이 보여줄 수 있는 '자기 자신'이 어디까지일까를 생각하면 암담해지는 게 사실이다.
다른 문제도 있다. 앞서 말했듯, 검투장은 비열하다. 그렇기 때문에 비열한 공정함마저 없으면 안 된다. 판을 갈아엎고 시즌제로 가는 이유가(만약 갈아엎는다면) "이대로라면 기존 가수들이 떨어질 수 없을 것 같아서"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도'로 떨어뜨릴 수 있다는 얘긴데, 여기에 어느 관중이 동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뭐, 기존의 컨셉과 포멧을 지지하는 시청자들이 벌써부터 슬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신정수PD는 바꿀 수도 있다고 했지 바꾸겠다고 공언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 가능성을 위해서 아이돌 출신인 옥주현을 섭외했다는 게 어쩐지 불안하긴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자. 필자는 이미 대중적으로 성공한 <나가수>가 신정수PD의 계획대로(정말 그럴 계획이라면)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옥주현과 아이유, 태연이 노래실력을 뽐내는 <나가수>는 법적, 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몹시 구려질 뿐이다.
나는 그저 모처럼 얻은 즐거움을 오래도록 누리고 싶은 마음이다. 총수는 신정수 PD에게 이렇게 한마디 했다.
"나가수가 잘 되려면 신정수PD 본인만 잘하면 됩니다."
아레나의 로마 시민들은 단순했다. 내 일요일 저녁의 즐거움이 사라지면 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를 지도 모르겠다. 대중이란 원래 그런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