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결혼 해줄래?"
오늘 오빠가 나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급한일이니 당장 자기집으로 오라고 오빠에게 전화를 받은 나는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미묘한 기분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가니 이게 왠걸..수많은 촛불과 풍선들 꽃장식이 되있는 오빠의 방은 드라마에서나 보던 풍경이었다.
행복했다.
흔히들 첫사랑은 안이루어진다고 말하지만 아무래도 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 였던 것 같다.
오빠의 프로포즈에 눈물을 흘리며 수락한후 와인과 고급스러운 음식을 먹으며 한참동안 옛추억을 되새겼다.
고등학교 2학년 이던 당시 아빠의 외도로 집안은 풍비박산 났고 엄마는 몸져 누우셨다.
그렇게 이혼을 한후 아빠에게 받은 위자료로 엄마는 조그만 가게를 차렸지만 얼마안가 그것마저 잃고 하루하루를 술로 보내셨다.
가정환경이 변하자 내 성격도 변해갔다. 반에서 모든 애들에게 인기 많았던 나는 없었고 어두운 느낌이 물씬 나는 사람으로 점점 변해갔다.
우리집은 말그대로 끼니를 걱정해야 할 형편이었고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라고 생각한 나는 아파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막상 옥상에 올라가 밑을 내려다 보고 있자니 도저히 뛰어내릴 엄두가 나질 않았다.
"뛰어 내리시게요?"
한참을 밑을 내려다 보고있던 나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나보다 겨우 2~3살정도 많아 보이는 남자가 무표정으로 서있었다.
"제가 뛰어 내리든 말든 그쪽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 때의 내 첫인상은 아마 꽤나 추했을 것이다. 눈물 콧물에 버럭 소리까지 질렀으니..
"혹시라도 뛰어 내리실거면 다시 한번만 생각해 보시면 안되나 싶어서요"
내 기억으로는 짜증이 난다기보단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체 니가 뭘안다고..
"도대체 그 쪽은 제가 무슨 상황 인지는 알고나 그런 소리 하시는거에요? 아무것도 모르면 그냥 갈 길 가시라구요!"
내가 소리를 지르자 남자는 말도 없이 멍하니 서있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뗐다.
"사실 일년전에 제 여동생이 여기서 뛰어 내렸 거든요. 고등학생 이신거 같은데 제 여동생도 그 당시 고1이었거든요.
잠깐 담배피러 올라 왔는데 그쪽이 한참동안 거기서 땅만 보고 있는거 보고 여동생 생각이 나서 그런거니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또 한참동안 말이없다. 나도 그냥 '아.. 예' 라고 대답하고는 할말이 없어 멍하니 바닥만 쳐다 보고 있었다.
"살다보면 행복한 날도 있을거란 얘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네요. 전 21년 살면서 별로 행복한 적이 없거든요.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곤 살짝 웃음을 짓던 남자는 말을 계속 이어가기 시작했다.
"근데요. 뛰어내리시기 전에 남는 가족들 생각 한번만 해주세요.
전 부모님도 교통사고로 3년전에 돌아가시고 여동생도 그렇게 된후로는 사는게 사는게 아니에요.
나도 같이 따라가볼까 생각도 해봤는데 겁쟁이라서 그것도 안되고 그냥 이렇게 사는듯 죽은듯 살고있어요"
남자는 그렇게 일장연설을 하고 난후 '가볼게요. 나중에 다시 뵐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라며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그 날 난 뛰어 내리지 못했다. 대신 한참을 옥상에서 울고난후 집으로 들어갔다.
왜 뛰어 내리지 못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남자가 한말에 뭔갈 딱히 깨우친것도 아니고 감동받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난후에 그냥 뛰어내리기 싫어졌다. 나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후에 엄마를 설득해 자퇴를 했다. 감당할수 없는 빚때문에 집도 팔았고 엄마의 고향인 부산으로 집도 이사했다.
학교는 그만뒀지만 대학은 가야했기에 검정고시를 치뤘고 나름 열심히 공부해 서울에서 알아주는 대학에 합격했다
대학에 간 나는 예전의 나로 돌아갔다. 애들에게 인기많던 고1때의 나로..
그 남자를 다시 만나게 된건 대학교 2학년 시절 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밀린 드라마를 볼까 잠을 한숨 더잘까하고 고민하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중이었던걸로 기억된다.
그러다 우연히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고 있던 군인을 보게 되었는데 내가 잘 아는 얼굴이었다.
한번밖에 본적 없지만 잊혀지지 않는 얼굴의 그는 그 때 그 옥상의 남자 였다.
"아직 담배 안끊으셨나봐요?"
그 남자는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어오자 흠칫 놀란듯 싶었지만 내 얼굴을 보자 기억난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화답했다
"예, 또 뵙네요.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덕분에요"
그날 우리는 벤치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오늘 말년휴가를 나왔고 나온김에 학교에 복학 신청을 하러 왔다고 했다.
같은 학교 였던 것에 놀랬지만 신기하게도 그는 나랑 같은 국문과에 재학중 이었고 그 사실에 또 다시 놀라게 되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온 이후 예전의 나로 돌아온것 같다고 말했고 '전부 선배님 덕분이에요' 라고 말하자 그는 쑥스러운지 얼굴을 밝히며 '아뇨,뭘..'
이러며 씨익 웃었다.
"이제 가봐야 겠네요. 이따가 이 근처에서 선임 만나기로 했거든요"
"그래요? 그럼 다음에 뵈요. 아 참, 우리 아직 통성명도 안했죠? 전 미경이에요 임미경"
" 이름 참 예쁘네요.제 이름은 김상우에요. 나중에 복학하면 밥이나 한번 먹어요."
그 이후 그는 다음학기에 복학을 했고 다른 남녀가 그러하듯이 자연스럽게
그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사귄지 5년째 되던날, 오빠는 나에게 프로포즈를 했고 이렇게 서로 마주보고 있다.
"오빠, 그 때 기억나? 그 때 오빠 되게 웃겼었는데..키키"
"아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해. 기억하고 싶지 않아"
정말 행복했다.
누군가 '살면서 가장 행복한 때가 언제인가요?' 라고 묻는 다면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지금이요' 라고 말할수 있을정도로 나는 행복했다.
근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잠이 억수로 쏟아졌다.
"오빠 나 졸려어.."
"그래? 얼릉자. 내일도 출근 해야 되잖아"
"이상하네 10시밖에 안됐는데.. 오빠랑 얘기도 하고 오늘은 안전한 날이니까 그것도.. 아 참 안전하든 말든 상관없구나 히히.. 우리 애기 이름은 뭘로짓지?"
오빠는 킥킥 거리며 웃고는 조금 생각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딸이면 은경이 어때? 김은경"
"김은경? 너무 흔한 이름아냐? 어디서 많이 들어 본것 같기도 하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잠에 빠졌다. 내가 잠들기전 본 오빠의 표정은 내가 귀여워서 미치겠다는 얼굴로 미소짓고 있었다.
얼마나 잤을까.. 서늘한 느낌에 눈을 떴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온몸이 결박된 상태였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있었다.
주위는 아파트 옥상인것 같았다. '내가 여기 왜 있는거지?'
그때 멀리서 빨간 불빛이 보이고 하얀 연기가 솟구쳐 올랐다.
"읍읍"
담배를 피고 있던 그 사람은 소리를 들었는지 나에게 뚜벅뚜벅 걸어왔다.
오빠였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오빠는 재갈을 풀어주고는 평소 나에게 보여주는 미소로 웃으며 말을 건네 왔다.
"오..오빠 갑자기 나..나한테 왜 이래?"
내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 었다. 도대체 이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아 그렇구나.. 넌 아무것도 모르지? 아님 기억도 안나는 건가?"
그렇게 말한 오빠는 노트를 하나 꺼내더니 밝고 낭랑하게 읽기 시작했다.
"200x년 3월 2일 날씨 맑음 쨍쨍
오늘은 입학식 이다. 올해에도 현지랑은 같은 반이 되었다.
신기하다. 중1때부터 고1때까지 같은반이라니 ㅋㅋ
고등학교때는 공부 열심히해서 오빠처럼 좋은대학 가야지!
장학금도 받아서 오빠 부담도 줄어주고ㅋ"
아무래도 이건 오빠 여동생의 일기장인것 같다.
근데 왜 갑자기 이걸 읽어주는 거지?
"내 동생 일기장인데 군대가기전에 집정리 하다가 발견했어.
내 동생은 정말 착했어.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서는 우리 둘뿐이라 항상 둘이서 의지하면서 살아왔고"
"근데 이걸 왜 나한테 읽어주는거야? 빨리 이 줄이나 풀어줘"
"아직 눈치 못챈거야? 너도 참 눈치없는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 계속 들어봐
200x년 3월 23일 날씨 흐림ㅠㅠ
오늘 한 아이랑 시비가 붙었다. 체육시간에 피구를 하다 실수로 그 아이 얼굴을 맞힌게 화근이었다.
그 아이에게 사과를 했지만 울면서 너 두고보자고 말할 뿐이었다.
그 아이는 집도 부자고 얼굴까지 예뻐 반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라 내편은 하나도 없었고 애들은 뒤에서 나를 씹어대기 바빴다.
그래도 현지가 내 편을 들어줘서 조금은 안심이 된다."
그 때 내 기억을 스치고 가는게 있었다. 설마 아닐거야..
"계속 읽어줄게"
"200x년 4월 13일 날씨 맑음
미경이랑 친한 양아치들이 그 사건 이후로 자꾸 나를 건드린다.
오늘은 내 가방에 죽은 쥐를 넣어놨다. 유치한것들..
내일까지 10만원만 땡겨오라는데.. 우리집에 돈이 어딨다고
안가지고 오면 저번처럼 또 때리려나?
그래도 현지가 떡볶이 사주면서 위로해줬다."
기억났다. 김은경. 내 기억으로는 내가 그날 한번 손봐주라고 한 기억이 난다.
"오..오빠 정말 미.."
"닥쳐"
"200x년 5월 3일 날씨 비
미칠것 같다. 내일 또 10만원을 준비해 오라고 한다.
저번에는 오빠한테 거짓말해서 어떻게 넘겼는데 이번에는 내가 결판을 내야 될것같다."
"걔가 생일선물로 살거 있으니까 10만원만 달라고 할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평소에 그런 애가 아니었는데.."
"200x년 5월 4일 날씨
개같은년들. 다 죽여 버리고 싶어 정말
200x년 5월 19일 날씨 흐리다가 비
오늘도 맞았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걸까
200x년 5월 25일 날씨 맑음
현지가 이제 아는척도 안한다.
그래 나랑 같이 어울리면 왕따 당하니까..
200x년 6월 1일 날씨
오빠 미안"
일기를 다 읽은 오빠는 지금까지 사귀면서 본적이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흑..오빠 정말 미안해. 내가 진짜 미안해..흑"
"아냐..괜찮아 니가 나한테 뭐가 미안해. 은경이한테 미안해야지 안그래?"
"오빠 진짜 흑.. 나는 걔들한테 부탁해서 한번 손봐주라고 한거 뿐이야.
그 이후로 난 은경이 괴롭힌 적도 없고 정말 아무짓도 안했어"
그 말을 듣던 오빠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분노인지 기쁨인지 알수 없는 표정으로
"걱정마. 니 친구들은 이미 다 정리했어. 물론 현지도 정리했고..
근데 웃긴게 뭔지알아? 너처럼 일기장을 읽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더라?
내가 힌트를 진짜 많이 줬는데도 말이야.
너 찾느라 진짜 힘들었어. 히야 근데 어떻게 이런 인연이 다있냐?
내 동생을 죽음으로 몰았던 사람을 내가 살려주다니?
게다가 니가 날 먼저 알아봐주고 이름까지 먼저 알려준거봐.
우린 참 인연은 인연인가봐? 그치?
바로 복수할수도 있었는데 난 니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때 고통받길 원했어.
그래야 받을 고통도 더 클거 아니야?"
나는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그냥 말없이 울었다.
"걱정마. 너한테 뭐 하나만 돌려 받으면 끝나니까"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빠가 날 죽일 생각은 없었구나.
"정말이야 오빠? 내가 뭐든지 다할게! 돈이라도 주라면 전재산이라도 줄게!"
그러자 오빠는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우리 처음 만난날 기억해?"
아파트 옥상 이었을 것이다. 아마..
"기억하지. 근데 왜?"
"내 동생이 여기서 뛰어 내렸어. 너도 잘알거야 우리가 처음 만난곳이니까"
"뭐?"
"그때 내가 준거 돌려주기만 하면되는거야. 어때 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