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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퀘로 받았던 짤로 이야기를 만들어 봤습니다
게시물ID : animation_2661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추천 : 2
조회수 : 22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9/07 00:22:39
선이 사진.jpg
Pitapat님이 그려주신 짤, 주제는 연지곤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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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사는 이 근방에서 사납게 생기기로 유명한 인물이이었다. 오랜 세월이 빚어낸 수염은 운장과 같았고 떡 벌어진 어깨는 익덕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생김새와 달리 성품은 그야말로 현덕이었다. 아랫사람들과 허물 없이 지내는 건 예사였고 물욕을 품지 않아 흉년이 들 때 마다 집 안의 곡간을 열어 인근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곤 했다. 백성들은 최진사의 존귀한 성품과 당당한 풍채에 존경심을 담아 그를 소열공으로 불렀는데 최진사는
자신이 그런 오만하고 불충한 호칭으로 불릴 수 없다며 사용하지 않기를 부탁했다. 하지만 그가 없는 장소마다 백성들은 최진사를 소열공이라 부르며 그의 덕망을 칭송했다.
 
그런 최진사가 환갑을 넘어 얻은 딸이 금지옥엽 귀하게 길러지는 건 당연한 얘기였다. 그는 이미 문과에서 장원급제를 거둘 정도의 대견한 아들을
두고 있었지만 저잣거리를 떠도는 말마따나 키우는 재미는 딸을 이길 수 없었다. 더군다나 황혼을 바라봐야 할 나이에 얻은 자식이었으므로 그
애정은 배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그 딸이 백치라 하더라도 말이다.
 
 
"아버지 아버지, 저건 뭐야?"
 
최진사의 어깨에 목말을 탄 딸, 선이는 앞뜰에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꽃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개나리라고 한단다. 선아"
 
"와~ 정말 이쁘다~ 그렇지 않아 아버지?"
 
"그렇구나"
 
작년 봄에도 선이는 최진사에게 지금과 비슷한 상황에서 개나리꽃들을 보며 저게 무엇이냐고 물어봤던 적이 있었다. 단순히 까먹었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선이의 나이도 이제 열살을 넘긴지 두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저렇게 강렬한 노란색을 지닌 생명체를 쉽게 잊어버린다는 건 적어도 또래
아이들 만큼은 정신이 성장하지 못 했다는 증거였다.
 
그래도 그 나이대에 지녀야 할 순수함은 여느 아이들 보다도 앞서 있었다. 쉽게 잊어 버리기에 예전에 봤던 사물들을 보며 다시 한번 경탄할 수
있었고 세상의 모든 면을 볼 수 없기에 좋은 면만을 골라서 볼 수 있었다. 언제까지고 아이의 모습을 간직한 채 살아야 한다는 건 슬플 따름이었지만.
 
"선아, 이제 내려오지 않으련?"
 
아무리 풍채 좋은 최진사라지만 이제는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다. 짓궃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선이와 어울려 주는 시간도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싫어~!! 좀 더 놀거야!!"
 
선이는 최진사의 머리를 잡아 이리저리 흔들었다. 최진사는 선이의 갑작스런 반항에 균형을 잃고 쓰러질 뻔 하였다. 가뜩이나 힘에 부치던 걸
선이의 장난까지 더해지자 최진사는 선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선이를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선이는 자신이 아버지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지를 않자 바닥에 주저 앉아 팔을 휘휘 저으며 때를 쓰기 시작했다. 최진사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 오라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릴 것만 같던 선이는 곧장 자리를 털고 일어 나더니 대문 쪽으로 달려갔다. 최진사도 연이가 향한 곳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왔느냐 윤아"
 
"예 아버지"
 
대문 쪽에서 얼굴을 내민 사람은 최진사의 장남이자 선이의 오라비인 윤이었다.
 
"관아는 맘에 들더냐?"
 
"예, 전임 현감께서 관리를 잘 하신 듯 합니다"
 
"암, 어진 자 였고 말고. 너도 그 자의 뒤를 이어 어진 목민관이 되어야 한다"
 
"그 말씀 유념하겠습니다"
 
선이는 오라범과 아버지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 했고 신경쓰지도 않았다. 편지로만 소식을 주고 받던 오라범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쁠 뿐이었다. 윤은 선이가 태어났을 당시 한양에서 글공부에 한창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 윤이 먼 고향에서 자신이 오라비가 되었다는 걸
편지로 알게 되자 누이에게 있어 당당한 오라비가 되기 위해 더더욱 글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몇년 뒤 윤은 장원급제를 했다. 그렇게 윤은 자랑스런 오라비가 되어 금의환향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라범 오라범!!"
 
선이는 윤의 도포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하인들의 말을 줏어 듣기라도 했는지 선이는 윤을 자꾸 오라범이라 불렀는데 최진사는 이를 정정하려고 
해봤지만 선이는 이 호칭이 맘에 들었는지 굳이 바꾸려 들지를 않았다. 그리고 윤 또한 자신이 이런 호칭으로 불리는데 불만은 전혀 없었다.
그 동안 곁에 있지 못 했던 오라비가 어찌 좋은 호칭으로 불리기를 기대하겠냐는 것이었다.
 
"왜 그러느냐 선아"
 
"어디 갔다 온 거야!! 아버지랑 노는 거 보다 오라범과 노는 게 훨씬 재밌단 말이야!!"
 
최진사는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쓸쓸한 기분을 느꼈다.
 
"그럼 이 오래비와 같이 산책이라도 해볼 테냐?"
 
윤은 선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만졌다. 선이는 윤이 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마냥 좋은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버지, 선이와 잠시 바람 좀 쐬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무나"
 
선이는 윤의 손을 붙잡은 채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윤은 선이의 바람과 같은 발걸음에 맞춰 걷느라 자연스레 걷는 박자가 빨라졌다.
 
"선아!! 오라버니 손을 꼭 붙잡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 선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진사는 혹여나 하는 마음에 외쳤다. 빈 마당에 남은 건 최진사 밖에 없었다.
 
최진사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본래 대로라면 윤은 잠시 동안 고향에 머문 뒤 도로 한양으로 올라가 종묘사직에
이바지해야 할 인재였다. 하지만 윤은 선이를 두고 상경을 할 수 없었기에 이 고을의 현감으로 부임하기를 선택했다. 부모된 도리로써 자식의
입신양명을 막았다는 죄책감이 들었으나 윤은 오히려 오라비 된 도리로써 늦게나마 누이를 행복하게 해주려 한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 자식이었다. 어찌 미안해 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
 
 
 
"오라범!! 업어줘!!"
 
"다리가 아프기라도 한 게냐"
 
"업어줘 업어줘!!"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윤은 몸을 숙여 선이를 업었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최진사댁 남매에게로 쏠렸다.
사람들은 선이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지만 선이를 업고 있는 윤은 알고 있지 못 했다. 윤은 워낙 어렸을 때 고을을 떠났던 지라 사람들이 못 알아 보더라도 이상한 점은 없었다.
 
"선이 아씨. 무슨 일로 예까지 나오신 겝니까?"
 
"이것 좀 드셔보세요 선이 아씨"
 
"언제나 아리따우십니다. 선이 아씨"
 
마을 사람들은 최진사가 베푼 덕망을 선이에게 톡톡히 보답 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소열공 댁 선이 아씨는 곱다느니 당차다느니 하는
찬사 뿐이었다. 행여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가 최진사 댁 선이 아씨가 바보라느니 하는 소리를 입에 담으면 그 아이는 그날 밤 부모에게 회초리를
맞을 정도의 각오는 해야 했다.
 
"헌데 나리는 뉘십니까요?"
 
선이를 업고 있다는 것에 하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윤은 고급스런 도포에 갓을 제대로 갖춰 쓴 양반의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아.. 선이의 오래비 되는 사람입니다"
 
굳이 존댓말을 할 필요가 없는 평민이었지만 손윗나이인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이 윤의 버릇이었다.
 
"그럼.. 윤 도련님이신가요?!!"
 
이 말에 사람들은 소스라 치게 놀라기 시작했다.
 
"기억해 주시고 계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윤은 선이를 업은 채 감사의 말을 표했다. 순식간에 사람들은 선이와 윤 곁으로 몰려 들었다. 그런 오라범을 보는 선이의 한마디는 간단했다.
 
"오라범!! 대단해!!"

선이를 데리고 밖에 나온지 서너 시간이 흘렀지만 많은 거리를 움직이진 못 했다. 인파에 둘러 싸여 움직였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선이도 성질을
낼 법 했으나 오라범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인지 오히려 싱글벙글 웃기에 바빴다.
 
"오라범 오라범, 오라범은 그 동안 어떻게 지냈길래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된 거야?"
 
선이는 사람이 전부 물러가고 나서야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윤에게 했다.
 
"열심히 공부했단다"
 
"얼마나?"
 
"백밤을 여러번 더해보려무나"
 
"하나..둘...몇손가락을 더해야 하는 거야?"
 
선이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일백밤 이백밤을 세었다.
 
"백손가락 정도는 더해봐야 할 것 같구나"
 
선이의 볼이 잘 익은 복숭아 같이 분홍색으로 달아 올랐다. 오라범이 이다지도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것에 선이는 한없이 기뻤다.
 
"선이는 오라범이 제일 좋아!!"
 
선이는 윤의 등을 양 손으로 마구 두들겼다. 윤은 선이의 갑작스런 행동에 넘어질 뻔 한 걸 겨우겨우 버텨냈다.
 
"선아,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느냐?"
 
"벌써? 그래도 오라범이 그렇게 하자면 그렇게 할게!"
 
"우리 선이. 기특하구나"
 
살짝 아쉬워하는 선이였지만 윤의 말은 순순히 따라주었다. 최진사가 본다면 경천동지할 정도의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선이는 여러가지
황당한 질문을 해댔지만 윤은 모든 질문에 적절한 답을 해주었다. 선이는 더욱 신이 나서 다른 질문들을 하려 했지만 쏟아지는 졸음을 못 이겨
결국은 윤의 등에서 잠을 청하고 말았다. 윤 또한 선이가 잠든 것을 알고 다시 한번 고쳐 업고서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 돌아왔습니다"
 
"그래. 왔느냐"
 
집으로 돌아온 윤은 선이를 조심스레 마루에 눕힌 뒤 하인을 시켜 선이에게 덮을 얇은 모포를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간만에 마을 사람들을 본 기분은 어떻느냐"
 
"이렇게 환대해주실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게 다 아버지의 덕업이 이루신 결과겠지요"
 
"내 덕이라니, 당치도 않다. 그들의 성품이 선하기 때문이다. 오늘 네가 받았었던 환대를 잊지 마라. 그 마음가짐으로 이 고을의 백성들을 이끌어
가야만 한다"
 
"깊이 새겨두겠습니다"
 
윤은 하인이 가져다 준 모포를 새근새근 자고 있는 선이의 위에 덮었다. 선이는 잠시 뒤치적 거리더니 이내 더욱 곤히 잠들었다.
 
"...윤아"
 
"예"
 
최진사는 잠깐 뜸을 들인 뒤 윤을 불렀다.
 
"이번 혼사는 무르는 게 좋을 듯 싶구나"
 
"아닙니다. 제 뜻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근래 들어 조정에서 요직을 맡았었다 고향으로 내려온 황대감은 최진사에게 혼례를 올리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서신을 보내왔다. 윤도 이젠 한명의
어엿한 지아비가 될 정도로 성장했고 그 혼례의 대상이 자신과 비슷한 성품을 지닌 황대감의 여식이라면 최진사에게도 경사와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최진사는 이 혼사를 망설였다. 윤에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짐을 지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윤도 최진사에게 있어
하나 뿐인 장자였다. 선이 못지 않게 윤도 소중했다.
 
"지금은 네가 맡은 소임을 다 하거라"
 
"아버지, 이 일은 선이를 위한 일입니다"
 
윤은 사뭇 진지했다.
 
"듣기로선 황대감 댁의 규수는 그 성품이 비단결 같다고 합니다. 소자는 선이를 진정으로 대하는, 그런 아내를 맞이하고 싶습니다"
 
윤은 스스로를 못난 오라비라 여겼지만 이렇게 헌신적인 오라비가 조선 팔도에 얼마나 있을까.
 
"그렇게까지 선이에게 해주지 못 했던 일들을 마음에 둘 필요 없다"
 
"아버지, 소자의 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
 
실로 안타까운 최진사였지만 윤의 뜻을 아주 내칠 수도 없었다.
 
"일단은 서신을 보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선이는 어느새 모포를 발로 차 버린 채 윤을 향해 손을 뻗는 잠꼬대를 하고 있었다.
 

간만에 온 고을이 떠들썩 해졌다. 이웃마을 황대감 댁의 규수가 최진사 댁으로 시집을 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최진사 댁 근처의 인가에서는
노랫소리가 흘러나왔고 돼지 기름 냄새를 비롯한 구수한 냄새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이 경사의 당사자인 최진사의 집에선 썩 유쾌한
기운이 흐르진 않았다. 가장 밝아야 할 사람이 그 빛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선아. 들어가도 괜찮겠느냐"
 
이 혼사의 주인공이자 곧 어엿한 지아비가 될 윤은 문지방 앞에 서 있었다.
 
"..들어가도록 하겠다"
 
윤은 문을 스르륵 밀어 선이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선이는 몸을 완전히 돌려 뒤구석에 쳐진 병풍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아. 무엇이 너를 그렇게 화나게 만들었느냐"
 
"..."
 
선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 그렇게나 따르던 윤에게도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건 그만큼 토라져 있다는 증거였다.
 
"...오라범, 오라범은 선이가 싫어진 거야?"
 
"무슨 연유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게냐"
 
"그럼 왜 혼인을 맺는 거야? 오라범은 선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어?"
 
선이가 토라진 이유는 어쩌면 그 나이대에 당연한 이유가 될 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게도 따르던 오라버니가 다른 사람과의 백년해로를
기약하는 것이라면 어느 손아랫누이들이 질투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그것도 다른 아이들에 비해 감정표현이 솔직하고 과격한 선이였기에 일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이 오래비는 선이를 사랑한다. 어찌 그런 소리를 하느냐"
 
"거짓말!!"
 
선이는 장난이 아닌 진심으로 역정을 냈다.
 
"서,선아.."
 
"나가!! 나가!! 오라범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다 보기 싫어!!"
 
선이는 갑작스럽게 몸을 돌리더니 윤을 온 힘을 다해 떠밀어 냈다. 어린 아이의 힘인지라 윤에겐 택도 없는 행동이었지만 윤은 선이의 뜻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이 방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제와서 혼사를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쩔 생각이냐"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최진사는 근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소자, 생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벌써 부터 아내될 자에게 그런 부탁을 할 생각을 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 따름입니다"
 
"규수의 총명함을 빌리겠단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황대감 댁 규수는 성품의 정갈함도 유명했으나 그 슬기로움을 모두가 알아보았다. 만약 윤이 선이에 관한 일 때문에 황규수의 총명함을 쓴다면
미안한 마음도 들 뿐더러 신랑된 집안으로서 자존심이 살짝 구겨지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최진사는 선이를 위해서라면 자신이 지닌 모든 명예를
내놓을 수도 있었다.
 
"서신을 보내거라"
 
"허나 아버지"
 
"너 또한 내심 그러기를 바라지 않느냐. 아비의 기분을 고려할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온 마을의 경사라 봐도 될 법한 잔칫날이 되었다. 신부 댁으로 향하는 신랑의 행렬을 보기 위해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번 혼사는
전통 대로 진행 되지 않았다. 참으로 과감했다. 모든 절차가 신랑의 집에서 행해졌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사람들은 최진사 댁으로 향했고 이내
최진사 댁은 저잣거리 마냥 사람들로 꽉꽉 들어 차 있었다. 일단은 잔칫집의 음식을 즐기면서도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마련이었다. 지체 높으신
분들이 어째서 이런 중요한 행사에서의 절차를 생략할 수 있냐면서 말이다. 그래도 대개 부정적인 얘기 보다는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터무니 없는 청에 응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단 한번 뿐인 딸아이의 혼례가 이런 식으로 장식 되는 게 기쁠 따름입니다"
 
최진사 댁의 사랑채 안, 그 안에는 이 집의 안주인인 최진사와 그와 사돈 관계에 있는 황대감이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사실 혼사는 제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윤이 황대감 댁에 들른 시각은 인시 정도였다. 그렇기에 지금 신부가 신랑 댁에 오는 건 당연한 얘기였다.
나름의 꼼수였던 셈이다.
 
"사돈께서 귀히 여기시는 따님의 용태는 어떠십니까"
 
"그대로 입니다. 이젠 마음을 풀 때가 될 법도 한데.."
 
황대감은 여유로이 웃으며 술병을 들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일단은 한잔 올릴 테니 받으시지요"
 
황대감은 전적으로 자신의 딸아이를 신뢰하고 있었다. 최진사는 황대감이 주는 술을 받으며 그런 황대감이 조금은 부럽단 생각을 했다.
선이는 아직까지도 방 안에 꿍한 상태로 있었다. 차려진 밥상은 선이가 좋아하는 반찬만 쏙 빠진 채로 방 한구석에 쳐박혀 있었다.
선이의 방 문지방 앞에 두명의 인형이 나타났다.
 
"애기씨.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 선이는 화들짝 놀랄 뻔한 것을 가까스로 추스렸다. 이 청아한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인지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이 마구 샘솟았으나 내키는 대로 움직이진 않았다. 선이는 자신이 화가 난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애기씨,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목소리의 주인은 선이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리자 결국 선이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 하고 앞을 돌아 보았다. 선이의 앞엔
곱게 차려입은 신부가 조신히 무릎을 꿇은 채 아 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집안 어른들께 미리 인사를 올립니다. 오늘 부로 이 집의 식솔이 될 황진영이라 하옵니다"
 
진영은 아까 시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던 것처럼 정성을 다해 선이에게 인사를 올렸다.
 
"으..어...그러니까.."
 
생각치도 못한 상황에 선이는 말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이런 단아한 사람에게 어른 소리를 듣는 것에 기뻐했다.
 
"에헤헤.."
 
"서방님이 제게 말씀하시기를, 애기씨께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화를 거두시지 못 하시고 계신다는데 혹 제게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그래!! 너..? 당신!! 당신은 어째서 선이한테서 오라범을 뺏어가려는 거야?!! 당신이 오라범을 홀렸을 게 분명해!!"
 
당신은 선이가 아는 최고의 높임말이었다. 애초에 쓸 일이 그다지 없는 단어였기도 했다. 그만큼 진영의 자세는 선이가 높임말을 쓰게 할 정도로
공손하고 우아했다. 진영은 입가에 자그마한 웃음을 담은 뒤 조근조근 그 이유를 설명했다.
 
"외람된 오해입니다. 서방님께선 애기씨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럼 어째서 당신이랑 혼인을 맺는 거야? 선이를 바보로 아는 거야?"
 
"절 애기씨의 손윗누이로 들이기 위해서 서방님은 저와 혼인을 맺으시는 겁니다"
 
"어?? 그게 무슨 말이야?"
 
선이는 자리를 박차고 진영의 치마폭에 매달렸다. 진영은 여전히 엷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선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이란 어휘를 사용한 건 잘못된 것 같군요. 서방님께서는 애기씨와 같은 성별을 가졌으면서도 비슷한 터울을 가진 그런 사람을 집 안에 들이기를
소망하셨습니다. 그렇게 제가 이 집의 며느리로써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애기씨는 혹여나 서방님의 사랑이 식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부디 그 오해를 거두어 주십사 합니다"
 
선이는 진영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진영의 말이 너무 길어 선이는 진영의 말을 이해하는데 있어 약간의 시간을 소요했다. 생각을 마친 선이는
평소의 함박웃음을 지으며 진영의 품에 풍덩 뛰어 들었다. 신부의 차림을 하고 있던 진영은 옷매무새가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스런 몸짓으로
선이를 받았다.
 
"그럼 오라범은 선이를 위해서 당신이랑 혼인을 맺는다는 거지? 그리고 선이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구?"
 
"그렇습니다"
 
선이는 진영의 목을 껴안은 다음 볼을 비비적거렸다. 진영의 족두리가 살짝 머리 중심에서 벗어났다. 아직 연지곤지를 찍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연지곤지를 찍었더라면 이 날 가장 중요한 사람들 중 하나인 신부가 좋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야만 했었다.
 
"그러면 당신은 선이의 친구란 얘기네?"
 
"애기씨의 생각이 그러하시다면 그렇겠지요"
 
선이는 진영의 치마폭에서 일어난 다음 진영이 소매 사이에 숨기고 있던 양손을 꺼내 꼭 붙잡았다.
 
"선이는 친구에게 당신이라 부를 수 없어. 어떤 좋은 호칭 없을까?"
 
"새언니가 가장 적당할 듯 싶습니다"
 
올케란 호칭도 있었지만 선이의 천진난만함을 생각한다면 이 호칭이 보다 선이에게 어울리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잘 부탁해 새언니!! 조금 있다가 오라범에게 미안하단 말도 하러 가야겠어"
 
문지방 너머로 선이와 진영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윤은 사과를 꺼내겠다는 선이의 말에 약간은 놀랐다. 아마 최진사가 이 말을 들었더라면 선이가
사과도 할 줄 아는 상냥한 아이라는 사실에 아주 아주 기뻐할 게 분명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식에도 부디 참석하셔서 서방님과 아버님의 근심을 덜어드렸으면 합니다"
 
"알겠어. 새언니, 조금 있다가 봐!"
 
선이는 드디어 제 기운을 되찾았다. 진영은 그런 선이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선 방 밖을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방 밖에서 진영을 기다리고 있던
신랑, 윤은 진영이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 크게 안도하며 진영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
 
"첫날 부터 이런 일을 맡기게 되다니 미안할 따름이오 부인"
 
"아닙니다. 서방님을 이런 식으로나마 도와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지요"
 
"그리고 부인, 내가 선이를 위해서 이 혼인을 마다하지 않은 건 사실이오. 하지만 앞으로는 부인 또한 분명 사랑할 것이오. 잊지 말아주시오"
 
"서방님 같은 지아비를 섬기게 해준 하늘에 감사할 뿐입니다"
 
진영은 윤을 올려다 보았다. 둘의 키 차이가 제법 나는 편이었지만, 서로를 보는 눈높이는 달랐지만 그 마음까지 다르지는 아니했다.
최진사의 얼굴은 방안을 온통 울려대는 발소리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고 그 발소리가 이 방을 향한다는 사실에 입가에 띄는 웃음을 숨기지도 못 했다.
곧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하늘하늘 가벼운 치맛바람을 일며 선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선아. 이제 화가 풀렸느냐"
 
"응! 오라범도 여전히 선이를 사랑하고 있는 데다가 새언니도 너무 좋아!"
 
"다행이구나.사돈 어른들이다 선아, 인사 올리거라"
 
선이가 맞은 편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그 자리엔 황대감과 그의 부인이 선이를 웃으며 맞이하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당황해 할 필요 없다 선아. 배웠던 대로만 하려무나"
 
처음으로 해보는 인사에 선이는 온 몸을 더듬기도 하고 아장아장 주변을 걷기도 했다. 최진사는 그런 선이를 응원했다. 황대감 내외 또한
선이가 과연 이 일을 해낼 것인가에 대해 은근한 기대를 품었다.
 
"잘 했다 선아"
 
"허허.. 섬섬옥수, 이 고운 낭자는 누구의 여식이란 말인가"
 
끝끝내 선이는 어색하게나마 황대감 내외 앞에서 예를 갖추는데 성공했다. 선이는 혹여 자신이 잘 못 한것은 아닐까 아버지와 사돈 어른들의
시선을 살폈다.
 
"고개를 들거라 선이야"
 
선이는 아버지의 말을 따르며 고개를 들었다. 이내 사랑채는 곤혹스런 웃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선아, 그건 어디서 한 것이냐"
 
"선이가 직접 했어. 아버지, 어때? 이뻐?"
 
"선아 그것은 예의에 어긋난 행동이다. 어쩐 연유에서 그런 것이냐"
 
"새언니가 말했어. 이 혼례는 선이를 위한 것이라며? 선이도 연지곤지를 찍을 자격이 있는 걸!!"

선이의 양볼과 이마엔 신부들에게만 찍는 것이 허락된 연지곤지가 찍혀져 있었다. 최진사는 매우 당혹스러웠다. 선이 때문에 혼례를 상당히
꼬아 버리게 되었는데 선이가 이런 행동까지 한다면 황대감의 마음이 언짢아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작은 신부가 여기 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혼례를 올릴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사돈 어른?"
 
황대감의 말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신부 측에서의 사람이라면 화를 내도 할 말이 없을 테지만 황대감은 되려 선이의 행동을 웃으며 치하했다.
비웃음의 뜻도 없었다. 순수한 의미에서의 기쁨이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여봐라! 이제 마당에 있는 사람들을  옆으로 물리도록 하거라!"
 
최진사는 황급히 하인을 불렀다. 황대감의 선처에는 언젠가 보답을 하리란 생각을 하면서. 선이는 아버지의 말에 쪼르르 마당으로 달려나가 작은 신부의 역할을 수행하려 했다.

식이 거행되었다. 신랑인 윤은 늠름한 자태와 명석해 보이는 이목구비로 과연 소열공의 자제분이란 소리가 나오게 했고 신부인 진영의 우아한
행동거지와 용모는 문자 그대로 월태화용, 명모호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서 유일하게 앞뜰을 돌아다니고 있는
작은 신부 선이는 지나가는 곳 마다 사람들의 입가에 웃음을 짓게 해주었다. 분명 여지껏 없었던 기상천외한 행동이었으나 이 곳에 있는 모두가
아무 말 없이 작은 신부 선이의 행동에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뼈대 있는 사대부의 집안의 혼례가 이다지도 변질된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무도 없었다. 그저 이 밝고 화목한 분위기를 즐길 뿐이었다. 작은 신부 선이는 그야말로 이 식의 또다른 주인공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작은 신부가 두 부부의 동침을 훼방 놓은 것은 당분간 마을의 이야기가 되어 종종 안주거리가 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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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부족한 글솜씨긴 하지만 옛날을 배경으로 쓴 것도 처음이고 제 고질병인 뒷심 부족으로 완성도가 떨어지긴 합니다. 제 자신도
자격지심이 드는 글이긴 하지만 시간이 부족하단 것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단 재밌게만 보셨다면 전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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