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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해전에서 승리하고도 퇴역당한 前 해군 2함대 사령관
게시물ID : sisa_874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모라
추천 : 10/4
조회수 : 842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0/06/25 15:22:16
연평해전에서 승리하고도 퇴역당한 前 해군 2함대 사령관(박정성 제독)

연평해전 이긴 뒤 대기발령 끝에 옷 벗어 

서해교전과 연평해전 

박정성 전 제독 “북한이 책임자 처벌하라고 요구했다더군요”

“지난 6월 15일 평택 해군 2함대에서 열린 연평해전 기념식에 다녀왔습니다. 퇴역한 당시 지휘관들이 모인 자리였는데 북한을 의식해서인지 이런 조촐한 승전 기념식도 7년 만에야 처음 열렸습니다.” 
6월 20일 시내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난 박정성(朴正聖ㆍ57) 전 제독(예비역 소장)은 연평해전 얘기를 꺼내자마자 목소리를 높였다. 1999년 6월 6일 북한 해군의 서해상 북방한계선(NLL:North Limit Line) 침범으로 촉발된 연평해전.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의 군사력이 최대 규모로 맞붙은 이 전투에서 우리 해군은 한 명의 전사자도 없는 완승을 거뒀고 북한군은 4~5척의 함정이 침몰 혹은 대파되는 패배를 당했다. 해군 2함대 사령관으로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끈 박 전 제독에게 당시 전과(戰果)는 자랑스럽고 명예로운 일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겪은 현실은 달랐다. 

그는 연평해전 넉 달 후인 1999년 11월 느닷없이 해군본부 대기로 인사발령됐다. 통상 1년에서 1년 반 정도인 함대 사령관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난 것. 더욱이 해군참모총장 특별보좌관이라는 직책이 주어졌지만 아무 할 일도 없는 한직(閑職)이었다. 부관과 비서 한 명만 둔 방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없이 썰렁하게 지냈다. 그는 당시의 좌천성 인사 배경에 대해 “인사권자의 고유권한에 대해 가타부타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적절치 않다”면서도 “연평해전 이후 남북 군사회담에서 북한 측이 ‘연평해전의 남조선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을 회담에 참석한 후배들로부터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북한의 책임자 처벌 요구가 당시 김대중 정권에 먹혀 들어갔다는 의미였다. 

그에 대한 좌천성 인사는 당시 국회에서도 논란거리가 됐다. 군 출신인 한나라당 박세환 의원이 2000년 국회에서 이 문제를 따진 것. 그래서인지 그는 6개월간 허송세월을 하다 해군본부 군수참모부장으로 보직 발령을 받았고 이후 정보작전 참모부장을 거쳐 해군 군수사령관을 끝으로 2004년 4월 전역했다. 끝내 중장 진급은 못했다. 

사실 그는 장병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던 전투 현장에서부터 상부의 부당한 지침을 감수해야 했다. “당시 적의 도발이 점점 확대됨에도 불구하고 상부의 기본 작전지침은 ‘선제사격 절대 금지’ ‘확전 방지’ ‘NLL 고수’였습니다. 본래 우리의 대응 절차는 경고방송, 시위기동, 차단기동, 경고사격, 격파사격 순이었으나 이런 지시 때문에 차단기동까지만 할 수 있었습니다. 적의 기습 공격에 노출돼 있어 대량 사상자가 발생할 위험을 안고 싸웠습니다.” 

연평해전의 시작은 1999년 6월 6일 북한 해군의 NLL 침범으로 시작됐다. 당시 어선 20여척과 함께 NLL을 넘어온 북한 경비정 3척은 평상시와는 달리 우리 함정을 들이받으려 했다. 박 전 제독은 즉각 계획적인 도발이라고 판단했고 전 함대에 비상소집령을 내리고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1998년 11월 2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후 6개월간 적의 도발에 대비한 교육과 훈련을 시킨 뒤였다. 

당시 남북한 함정의 포가 불을 뿜기까지는 숨가쁜 기동전이 이어졌다. 덩치가 크고 속도가 늦은 북한 함정이 충돌해오면 우리 해군은 재빨리 회피하는 작전을 폈다. 경고사격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엔진이 낡은 북한 함정을 무리하게 움직이게 만들어 장비 고장을 유도하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NLL을 고수할 수 없어 결국 우리 고속정이 취약한 북한 함정 선미(船尾)를 들이박아 피해를 입혔고 양측의 긴장은 고조돼 갔다. 남북한 함정 20여척이 서로 꼬리를 무는 기동 공방전은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열흘간 이어졌다. 

“컵라면으로 식사를 대신하며 하루 종일 포를 붙잡고 있는 우리 장병들의 얼굴에 처음엔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역력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장병들이 체격도 좋고 영리하지 않습니까. 스쳐 지나가는 북한군의 까맣고 야윈 얼굴을 보면서 ‘붙으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더군요. 사탕이나 껌으로 공포감을 이겨낸다기에 사재를 털어 사탕, 껌 등을 800만원어치 사서 각 함정에 나눠줬습니다.” 

6월 13일 서해안 사곶 기지에서 3척의 어뢰정을 출동시키며 공격 의지를 가다듬던 북한군은 6월 15일 아침 9시28분 공격을 개시했다. 그날 아침 북한 함정이 평소와는 달리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박 전 제독은 바로 응전 준비를 지시했다. “적의 공격이 시작됐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전 함정에 포별로 타깃을 정한 뒤 록온(lock on : 자동추적장치 가동)시키도록 명령했습니다. 적의 함포는 수동인 데 반해 우리 함포는 함정이 어떻게 움직이든 목표를 자동으로 추적합니다. 명령을 내린 지 1분 뒤에 적의 사격이 시작되더군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명령을 내리기 전 평생 가장 간절한 기도를 했다. 승리도 승리지만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을 한 명도 다치지 않게 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의 이런 애원이 먹힌 것일까. 우리는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적을 완파했다. 76㎜, 40㎜ 함포와 20㎜ 발칸포가 14분 동안 비처럼 포탄을 퍼부은 현장은 처참했다. 갑판에 있던 북한군은 거의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함포의 위력 때문에 형체도 없이 찢긴 사체들이 즐비했다. 적의 함정 4~5척이 침몰, 대파됐고 5~6척이 손상을 입었다. 목격한 전사자만 수십 명이었다. 반면 우리 함정은 고속정 1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었고 장병 11명이 부상을 당한 정도였다. 

14분간의 전투 끝에 ‘이겼다’고 판단한 박 전 제독은 우리 함대를 후퇴시켰다. 그는 “확전 금지 지침도 있었지만 적이 괜한 복수심을 불태우지 않도록 사체를 수습할 시간을 주었다”며 “적의 육지 기지에서 보복공격을 할 우려도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북한군의 서해안 기지에서는 당시 지대함 미사일이 발사 준비를 했지만 우리 함정이 물러서자 발사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는 “북한의 지대함 미사일은 2마일 밖에서는 함정과 섬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후퇴시킨 함정들을 인근 섬에 바짝 붙였다”고 말했다. 

치밀한 준비와 정확한 판단으로 당시 해전을 승리로 이끈 박 전 제독으로서는 3년 후 벌어진 서해교전에서 우리가 치른 희생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연평해전을 겪은 후 적의 NLL 침범시 근접 기동전을 벌이는 전술은 수정돼야 옳았습니다. 보복을 노리는 적에게 기습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6·15 정상회담으로 우리 군 지휘부 및 장병들의 긴장이 늦춰졌고 당시 언론보도대로 북한의 도발 징후와 함정의 남하 의도에 대해 군 지휘부가 혼선을 겪으면서 기회만 노리던 북한 해군에 역습을 당한 겁니다. 근접 기동전이 불가피한 5단계 전략은 서해교전 후에야 시위기동, 경고사격, 격파사격 순의 3단계로 변경됐습니다.” 

박 전 제독은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는 NLL 수정 주장에 대해 “북한 주장대로 NLL을 조정해 12마일 영해선을 인정해 줄 경우 수도권 도서 12마일까지 북한 함선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돼 수도권 서쪽 방어가 거의 불가능해진다”며 “작년 남북 해양수산 분야 회담에서 남북 7개 항구 개방과 북한 함정의 제주 해협 통과를 해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합의했는데 이 역시 햇볕정책 성과를 보이기 위한 무리한 합의였다”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 해협을 통과하는 북한 상선을 감시하기 위해 우리 해군 전력이 낭비되는 것은 둘째치고 북한군이 수십 척의 상선에 나눠 타고 우리 연안으로 동시 다발적으로 침투하면 대처가 곤란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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