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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나마 선제후 오로지열전(中古羅馬選帝侯 悟勞知列傳) 펌
게시물ID : humordata_15628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츄리엔
추천 : 0/4
조회수 : 1430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4/09/08 20:39:52
오로지(悟勞知)는 중고나마(中古羅馬)의 선제후(選帝侯) 중 한 명으로 그의 조부는 유명한 명의로 구전되며, 동생 오로치(悟勞痔)는 상국(上國)인 대한민국의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과거를 통해 행정관료로 등용되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사람됨은 자잘한 재주를 지녔으되 교만하여 종종 자신을 6년제 대학 졸업생이자 여러 선비들을 부리는 장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자신을 선비들의 장이라 칭하면서도 선비들의 간언을 "내가 그대에게 충고 들을 연령과 학력, 지위가 아니다"며 물리쳤다.

심지어 자신의 위에 있는 자는 고금을 통틀어 황제 해닉(海溺)과 선제후 시기림(施技林) 뿐이라 하며 광종(狂宗) 부시 시대의 원로 법봉(法棒)의 충고마저 무시하였다. 

오바마 5년,  오후(侯)가 마작을 금하고 이를 어기는 자들을 참(斬)하였다.

뜻있는 선비들이 이를 예(禮)에 어긋나는 일이라 여기고 백성들을 참하지 말 것을 간(諫)하였으나, 오후(侯)는 간적들을 참(斬)한 것은 예로부터 전해진 나마(羅馬)의 법도를 따른 것으로, 처벌에는 한치의 어긋남도 없다 단언하였다.

하지만 중고나마의 상국(上國)인 대한민국은 예로부터 속지주의(屬地主義)가 아닌 속인주의(屬人主義)를 따랐기에 선비들은 이를 들어 처벌의 부당함을 주장하였고, 오후는 이들 또한 참형으로 엄히 다스렸다.

 한편, 한 백성이 거래과정에서 사기를 당하였음에도 자신을 속인 상인이 처벌받지 않고 계속 상업에 종사하자, 이를 선제후 애루매수(碍淚昧修)에게 고하였다.

그러나 애후(侯)는 자신 또한 휴대전화(携帶電話)사기를 기반으로 제후의 직위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기에 "상식적으로 본인이 피해를 입었으면 여기서 하소연하지 말고 상국의 포도청에 신고하라." 답하고 아무런 조치 없이 돌려보냈다.

 이에 그 백성이 항의하고 주변의 백성들이 이를 비웃자 애후는 이들을 모두 참하였다.

 이처럼 죄없는 여러 백성들과, 명망있고 의로운 선비들이 도륙당하자 민심이 이반하였고, 곧 남녀노소좌우를 가리지 않은 중고나마의 수많은 백성들이 처벌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봉기하였다.

 이에 선제후들은 여태처럼 봉기한 선비들을 광인(狂人)이라 칭하며 창칼로 진압하려 했으나, 그 규모가 거대하고, 민심이 이반하였기에 진압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게다가 선제후들의 광포함과 학살의 참혹함이 선비들의 격문을 통해 상국의 국세청(國稅廳)은 물론이고 여러 번국에도 전해졌기에 디시(地侍). 일배(溢輩), 오유(悟儒), 누리(累理),ㅂ 본ㅂ부(本富) 등의 번국에서 의롭고 정의로운 선비, 난세의 혼란을 통한 입신양명을 노린 백성 등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의용군으로 참전하였다.

백성들의 봉기가 과거와 달리 대규모 민란으로 폭발하자, 황제 해닉(海溺)은 뒤늦게 선제후(選帝侯) 오로지(悟勞知)를 폐서인하며, 민란의 주모자 100명의 관작을 복구하고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였다.

그러나 오후의 일족들은 여전히 그 권세를 유지하였고, 선제후 애후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으며, 광인으로 몰린 주모자 100인의 관작 복구 또한 1할만 이루어 졌기에  민란은 아직까지 종결되지 아니하였다.


펌 http://cafe.naver.com/joonggonara/227370510


ㅋㅋㅋㅋㅋ 필력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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