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적 근대화의 지도자'란 자격을 얻기 위하여
민족주의적 수사를 시각화시키기 위해 무엇보다 '유구한 정통'의 유산이 정권에 의해 가시적으로
복원 관리 성역화돼야 하는데, 이 문화재 관리 사업을 김일성도 박정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박정희의 경우는 어땠을까?
1961년, 박정희 일당이 5월16일에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잡은 뒤에 여태까지 한국 관료체제에 직제에
없었던 두 군데의 기구를 신설했다.
하나는 군사원호청(1984년부터 보훈처가 됨)을 7월 5일에 설립한 것이고, 또 하나는 문화재관리국(199년부터
문화재청으로 승격)을 10월 2일에 만든 것이다.
통치명분을 반공과 '자유 민주주의'에서 찾으려 했던 이승만 정권은 '호국선열'에 대한 보훈 행사나
전통 시대의 문화를 '정통성 원천'으로 볼 필요가 없었는데, '자유 민주주의'와의 관계가 멀다는 것이
뻔한 데다 '국민혼의 뿌리'로서의 과거의 '호국' 과 '문화' 를 중요시해 왔던 일제 파시즘의 철저한 교육을
받은 박정희는 '민족적 근대화의 지도자' 자격을 '보훈' 과 '민족문화' 에 대한 가시적인 배려에서 찾아
내려했다.
사실, 1915년 일군에 짓밟힌 경북궁에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에 해당되는 최초의 근대적 박물관을 설립하고
1916년에 최초의 고적 및 유물보존 법률을 제정하여 오늘날 '국보 문화재' 분류체계의 전신에 해당되는
문화재 분류 및 관리 체계를 확립시키고, 1921년에 '고적조사과(문화재관리국의 전신에 해당)'를 총독부 학
무국산하에 두고, 1933년 '조선총독부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문화재관리법의 전신)'을 발표한 주체
는 다름 아니라 박정희의 전(前) 고용주인 일제 당국이었다
한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짓밟고 빼앗으려는 자들이 어찌해서 이렇게 피침지대의 보물고적에 관심이 많았
던가?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통해 조선의 '타율성'이나 '후진성'을 입증하든지 '일선동조론' 의 근거를 찾든지 등
의 식민사관적'욕망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군사침략을 '조선 문화 보존 및 발전' , '전통의 근대적 연구와
계승'을 위한 '애타적인 시혜'로가장하려는 명분론 차원의 고려가 우선이었을 것이다. 이 차원에서는 박정희
의 의도란 다를게 없었다.
명분이 없는 군사반란을 '민족증흥' 을 위한 '의거'로 둔갑시키려면 '민족 문화의 보존' 이나 민족영웅인 독
립투사에 대한 '보훈'부터 시각화 시켜야 했다. 그러기에 1962년부터 친일파 박정희가 독립운동가들에게 서
훈을 주는 - 생각해보면 웃지못할 - 일이시작됐고, 문화재 관리국이 국보와 문화재 지정 등의 세부적 사업
에 들어갔다.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 박노자 인물과 사상사 250 ~ 251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