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나는 사회적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경우와 불확실한 경우 둘 다 일반적인 여론에 따라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진리의 탐구에 종사하려 하므로 그와 전혀 다르게 일 할 생각이다.
즉,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엉터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나에게 전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감각은 우리를 쉽게 속이기에, 상상에 따른 감각은 아예 배척했다.
기하학도 추리나 논리적 과오를 범할 수 있기에 모든 논거를 거짓으로 규정했다.
더 나아가 나의 생각도 나의 환상이나 꿈만큼 참되지 못하다고 '일부러' 가정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도 내가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만큼은 거짓일 수가 없기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너무도 확고하고 견고한 진리임을 확신했다.
이는 그 어떤 회의론자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러한 진리를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내가 탐구하려고 했던 철학의 제1원리로 삼았다.
이를 바탕으로 나는 '내가 무엇인가'를 검토했다.
내가 아무런 육체도 없고, 세계도 없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전혀 없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그와 반대로 다른 것들을 의심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때문에 확실히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다시 반대로 내가 상상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내가 생각하기를 그치면 내가 존재한다는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사라진다.
바로 이점에서 나라는 존재는 그 본질이나 본성이 사유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닌 하나의 실체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실체로서의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어떤 것도, 어떤 장소도 필요없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정신은 육체와 구분되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정신은 육체보다 인식하기가 훨씬 더 쉽다.
육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정신은 정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어서 나는 명제의 확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검토했다.
왜냐하면 내가 제시한 명제의 근거를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은 사유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의미가 아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명석하고 판명하게 깨닫는 사물들은 전부 참이라는 일반적인 법칙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판명하게 깨닫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아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의심하는 것보다 인식하는 것이 더 위대하며, 내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 내가, 부족한 내가 완전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나에게 주어진 생각을 통해 '완전함'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보다 더 완전한 관념이 나로부터 유출될 수는 없다. 이는 전적으로 그 누군가에 의해 나에게 이식된 것이다. 그것은 신이다.
우리는 신에게 받은 '완전함'을 바탕으로, 우리 자신을 신이 지닌 완전함에로 이끌 수 있다.
기하학은 이론상 완벽할 뿐, 실제적인 것은 아니다.
삼각형 세각의 합이 두직각의 합과 같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실이 현실에 이러한 삼각형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하학에 대한 관념, 우리의 생각은 기하학의 원리와 함께 '현존'도 다룬다.
신이 현존한다는 것은 우리의 관념만이 증명해 낼 수 있다.
감각적인 사물 이상으로 정신을 고양시키지 않는 이상,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어렵다.
철학의 격률에 '먼저 감각 속에 들어오지 아니한 어떤 것도 오성 속에 존재하지 아니한다.'라는 말이 있다.
물론 시각이나 청각 같은 감각은 감각기관의 차이, 즉 인간 개개인의 차이로 인해 확신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우리의 오성이 거기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상상력이나 우리의 감각이 결코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신에 대한 증명은 이 모든 감각의 차원을 넘어선다.
신이나 영혼을 믿지 못하는 것은 육체가 있다는 것, 별과 땅이 있다는 것도 못믿겠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의 인식은 신으로부터 오기에 확신할 수 있다.
깨어있을 때의 인식과 꿈을 구별할 필요는 없다.
꿈은 오류로 가득차있지만, 깨어있을 때도 수많은 오해와 오류가 발생한다.
기하학자가 꿈에서 새로운 증명을 찾아내면, 그 증명은 확실하고 참된 것이다.
반면 태양을 보고 태양의 실제 크기를 판단할 수는 없다.
주목할 것은, 이성이 우리의 관념이나 개념이 진리의 어떤 근거를 가져야 한다고 명령한다는 점이다.
완전하고 모두가 참인 신은 모든 관념을 진실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투입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추리가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결코 그렇게 완전하게 명증적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때때로 우리의 상상력이 추리만큼이나 또는 그 이상으로 뚜렷하고 생기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이 전적으로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사유가 모두 다 참일 수가 없지만, 우리의 사유가 참을 가지는 경우는 우리가 꿈을 꿀 때보다도
오히려 우리가 깨어 있을 때 우리가 갖게 되는 관념 속에 필연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이성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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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으로 들어가니 점점 어려워지네요.
너무 옛날 책이다보니 번역이 엉망인 곳도 많고, 원문에 충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읽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암튼 '내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이븐 시나가 '치유의 서'에서 논했던 공중인간을 떠올리게 하네요.
정신과 육체는 분리되어 있다는 증명이 어느새 정신의 확실성을 증명하는 논거로 변형되다니...
명제의 확실성에 대한 논의에서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와 '존재하기에 생각한다'가 같은 의미라고 주장합니다.
생각하는 나든 존재하는 나든, 결국 내가 세상의 중심, 기준이면 된다고 본 거겠죠.
내가 명석하고 판명하게 깨달으면 전부 참이다. 하지만 그게 어렵기도 하다라... 자신이 기준을 세워놓고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하다니
그저 나를 기준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겠다. 그 이상의 목적이 없었기에 이렇게 헐렁하게 넘어갔나 봅니다.
아직도 데카르트를 이야기하는 건, 그의 논의가 치밀해서라기 보다는, 신본주의 세계에서 이렇게 인본주의 사상을 외쳤다는 점 때문인 듯 합니다.
신에 대한 증명이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대륙합리론의 선험적 이성이라는 개념이 재천명되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이 세상의 진리를 밝힐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인간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생각,
이는 나보다 뛰어난 존재, 신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근대철학이 기독교에 내려준 면죄부 같은 것이었죠.
헤겔은 모르겠지만, 칸트까지는 이러한 생각이 보편적이었고, 이 부분이 대륙합리론과 영국경험론을 가른 분기점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성과 꿈에 대한 관점은 흥미롭습니다.
꿈하면 보통 프로이트나 라캉을 떠올리는데, 꿈을 거짓, 환상으로 전제하고 논의하는 이들과 달리
데카르트는 꿈이든 이성이든 무슨 상관이냐고 하네요. 물론 뒤에가서는 이성이 더 본질적이다라고 하지만... 암튼 새롭네요.
제가 보드리야르 팬이라 어떤 연관성을 찾고 싶지만, 여기서 보드리야르를 꺼내는 건 좀 오버일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