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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서설_4부
게시물ID : phil_96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레고맨
추천 : 3
조회수 : 1039회
댓글수 : 16개
등록시간 : 2014/09/11 03:03:49
4부
나는 사회적 도덕의 문제에 있어서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경우와 불확실한 경우 둘 다 일반적인 여론에 따라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진리의 탐구에 종사하려 하므로 그와 전혀 다르게 일 할 생각이다.
즉,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엉터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나에게 전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감각은 우리를 쉽게 속이기에, 상상에 따른 감각은 아예 배척했다.
기하학도 추리나 논리적 과오를 범할 수 있기에 모든 논거를 거짓으로 규정했다.
더 나아가 나의 생각도 나의 환상이나 꿈만큼 참되지 못하다고 '일부러' 가정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도 내가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만큼은 거짓일 수가 없기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가 너무도 확고하고 견고한 진리임을 확신했다.
이는 그 어떤 회의론자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러한 진리를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내가 탐구하려고 했던 철학의 제1원리로 삼았다.
 
이를 바탕으로 나는 '내가 무엇인가'를 검토했다.
내가 아무런 육체도 없고, 세계도 없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전혀 없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그와 반대로 다른 것들을 의심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때문에 확실히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다시 반대로 내가 상상했던 모든 것들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내가 생각하기를 그치면 내가 존재한다는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사라진다.
바로 이점에서 나라는 존재는 그 본질이나 본성이 사유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닌 하나의 실체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실체로서의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어떤 것도, 어떤 장소도 필요없다.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정신은 육체와 구분되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정신은 육체보다 인식하기가 훨씬 더 쉽다.
육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정신은 정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어서 나는 명제의 확실성을 증명하기 위해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검토했다.
왜냐하면 내가 제시한 명제의 근거를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은 사유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의미가 아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명석하고 판명하게 깨닫는 사물들은 전부 참이라는 일반적인 법칙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판명하게 깨닫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아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의심하는 것보다 인식하는 것이 더 위대하며, 내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런 내가, 부족한 내가 완전함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나는 나에게 주어진 생각을 통해 '완전함'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보다 더 완전한 관념이 나로부터 유출될 수는 없다. 이는 전적으로 그 누군가에 의해 나에게 이식된 것이다. 그것은 신이다.
우리는 신에게 받은 '완전함'을 바탕으로, 우리 자신을 신이 지닌 완전함에로 이끌 수 있다.
 
기하학은 이론상 완벽할 뿐, 실제적인 것은 아니다.
삼각형 세각의 합이 두직각의 합과 같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실이 현실에 이러한 삼각형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하학에 대한 관념, 우리의 생각은 기하학의 원리와 함께 '현존'도 다룬다.
신이 현존한다는 것은 우리의 관념만이 증명해 낼 수 있다.
 
감각적인 사물 이상으로 정신을 고양시키지 않는 이상,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어렵다.
철학의 격률에 '먼저 감각 속에 들어오지 아니한 어떤 것도 오성 속에 존재하지 아니한다.'라는 말이 있다.
물론 시각이나 청각 같은 감각은 감각기관의 차이, 즉 인간 개개인의 차이로 인해 확신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우리의 오성이 거기에 관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상상력이나 우리의 감각이 결코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신에 대한 증명은 이 모든 감각의 차원을 넘어선다.
 
신이나 영혼을 믿지 못하는 것은 육체가 있다는 것, 별과 땅이 있다는 것도 못믿겠다는 의미가 된다.
우리의 인식은 신으로부터 오기에 확신할 수 있다.
 
깨어있을 때의 인식과 꿈을 구별할 필요는 없다.
꿈은 오류로 가득차있지만, 깨어있을 때도 수많은 오해와 오류가 발생한다.
기하학자가 꿈에서 새로운 증명을 찾아내면, 그 증명은 확실하고 참된 것이다.
반면 태양을 보고 태양의 실제 크기를 판단할 수는 없다.
주목할 것은, 이성이 우리의 관념이나 개념이 진리의 어떤 근거를 가져야 한다고 명령한다는 점이다.
완전하고 모두가 참인 신은 모든 관념을 진실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투입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추리가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결코 그렇게 완전하게 명증적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때때로 우리의 상상력이 추리만큼이나 또는 그 이상으로 뚜렷하고 생기가 있다 할지라도,
우리 자신이 전적으로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사유가 모두 다 참일 수가 없지만, 우리의 사유가 참을 가지는 경우는 우리가 꿈을 꿀 때보다도
오히려 우리가 깨어 있을 때 우리가 갖게 되는 관념 속에 필연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이성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
본론으로 들어가니 점점 어려워지네요.
너무 옛날 책이다보니 번역이 엉망인 곳도 많고, 원문에 충실한지는 모르겠지만 읽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암튼 '내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이븐 시나가 '치유의 서'에서 논했던 공중인간을 떠올리게 하네요.
정신과 육체는 분리되어 있다는 증명이 어느새 정신의 확실성을 증명하는 논거로 변형되다니...
 
명제의 확실성에 대한 논의에서는 '생각하기에 존재한다'와 '존재하기에 생각한다'가 같은 의미라고 주장합니다.
생각하는 나든 존재하는 나든, 결국 내가 세상의 중심, 기준이면 된다고 본 거겠죠.
내가 명석하고 판명하게 깨달으면 전부 참이다. 하지만 그게 어렵기도 하다라... 자신이 기준을 세워놓고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하다니
그저 나를 기준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겠다. 그 이상의 목적이 없었기에 이렇게 헐렁하게 넘어갔나 봅니다.
아직도 데카르트를 이야기하는 건, 그의 논의가 치밀해서라기 보다는, 신본주의 세계에서 이렇게 인본주의 사상을 외쳤다는 점 때문인 듯 합니다.
 
신에 대한 증명이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대륙합리론의 선험적 이성이라는 개념이 재천명되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이 세상의 진리를 밝힐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인간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생각,
이는 나보다 뛰어난 존재, 신이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은 근대철학이 기독교에 내려준 면죄부 같은 것이었죠.
헤겔은 모르겠지만, 칸트까지는 이러한 생각이 보편적이었고, 이 부분이 대륙합리론과 영국경험론을 가른 분기점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성과 꿈에 대한 관점은 흥미롭습니다.
꿈하면 보통 프로이트나 라캉을 떠올리는데, 꿈을 거짓, 환상으로 전제하고 논의하는 이들과 달리
데카르트는 꿈이든 이성이든 무슨 상관이냐고 하네요. 물론 뒤에가서는 이성이 더 본질적이다라고 하지만... 암튼 새롭네요.
제가 보드리야르 팬이라 어떤 연관성을 찾고 싶지만, 여기서 보드리야르를 꺼내는 건 좀 오버일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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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삭제]숲속의당나귀
2014-09-11 11:36:21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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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1 16:03:10추천 0
저는 철학책을 이제껏 단 한줄도 안읽어봤습니다. 이제 읽으려고 대기타고 있죠..주문만 해놓고..
근데 방법서설 올려주시는 내용들을 보니 굉장히 재밌네요, 거의 모든 철학서들이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것인가요?

방법서설은 마치, '구도자의 고백'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은 사유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의미가 아니다.>
이 부분에서,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서, 생각(사유)하기위해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이 나올 수 가 있는 것이죠?
또,
<물론 나보다 더 완전한 관념이 나로부터 유출될 수는 없다. 이는 전적으로 그 누군가에 의해 나에게 이식된 것이다. 그것은 신이다.>
이 부분에서, 왜 그것이 누군가로부터 이식된 것이며, 그것이 신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인지..

두 부분이,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이해가 잘 안돼는데요.
제가 잘못 생각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화자가 사유를 통한 논리적접근에서 두 부분에있어 자신의 가치관에 따른 신념으로 주장한 것인가요?
제가 잘못 생각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결론이 철학적 개연성으로 당연한 것이다..... 라면. 정말 접근하기 힘들것 같아서 질문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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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1 21:37:37추천 0
방법서설은 데카르트가 자신의 경험, 즉 자기가 독자적으로 철학적 방법론을 탐구한 과정을 서술한 책이라
철학책 치고는 약간 독특한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구도자의 고백'이죠.

'선험적 이성'이라는 개념은 역사가 깊습니다. 타고 타고 올라가면 플라톤의 이데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이데아라는 세계가 이미 있고, 그 세계의 모상으로 이 세상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우리의 생각도 이데아의 모상이라는 의미가 되죠.
특히 '내가 생각을 하네? 이건 내가 한 게 아닌데? 그럼 누군가 나에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준게 아닐까?' 라는 생각은
중세를 거치며 '이런 능력은 신이 내려 주신거야'라는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 이 결론을 부정하면... '죽음' 뿐이었으니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결론이었습니다.

데카르트가 신을 들먹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연막을 친 거죠.
'우리에겐 이성이 있고, 이성은 신이 내려주신 거에요. 나 신을 부정 안해요. 그러니 죽이지 마세요.'
신이 우리에게 이성을 주었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말 하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신학자들은 불같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데카르트 저 쳐죽일 놈~!' 그들도 바보가 아닌데 그런 말로 속을리가 없었죠.
왜냐면 본문에 있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이성으로 이 세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진리를 밝혀낼 수 있다고 했기 때문,
즉 인간도 신처럼 이 세상을 이해하고 통치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신처럼 될 수 있다. 이처럼 신성모독적인 발언이 어디있을까요?
물론 그 덕에 근대철학이 신을 벗어나 인간 스스로 진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이죠^^.

'아는 것이 힘이다'며 과학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라고 예견했던 베이컨이 데카르트보다 덜 평가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어쩌면 베이컨의 사고 방식이 이 세상을 더 많이 변화시켰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인간이 과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고, 관찰하고 실험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을 뿐입니다.
그런 인간 위에 신이 있다한들 별 상관이 없었고, 사실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았죠.
반면 데카르트는 인간 스스로 이 세계의 기준이자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인간이 신의 왕좌를 훔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당대의 세계관 자체를 변화시켜 버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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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삭제]lastlaugher
2014-09-12 12:21:26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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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2 13:09:02추천 0
그렇다면, 제가 그 부분을 바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봐야겠네요..
데카르트같이 사유가 깊고 명료한 철학자가 자신의 책에서 거짓을 논할만큼 그 시대의 문화가 영향을 줬다는 게 어찌보면, 특정시대에 속한 개인적 비극이네요.

그런데, 제가 질문드린 부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은 사유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의미가 아니다.>
이 부분은 아직 이해가 안갑니다..
생각하기에 존재가 거짓이 아니고 실존이라는 것에서, 어떻게 그걸 역으로, 생각(사유)하기 위해 존재한다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는 것이죠?
냄새가 나기에 자장면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해서, 자장면은 냄새나기위해 존재한다고 결론짓는 건 좀 이상하잖아요?
농담하는거 아닙니다.. 오해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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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2 14:02:43추천 0
lastlaugher/
사유의 전제가 존재라는 뜻이에요.
존재하지 않는 것은 사유할 수 없으니까요.
냄새가 난다면 자장면이 존재하니까 이를 뒤집으면
냄새가 나기 위해서는 일단 자장면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하죠.
댓글 0개 ▲
2014-09-12 18:39:41추천 0
그부분이 이해가 안가요
사유하기에 존재한다는 걸 확증할 수 있다고 해서, 존재의 이유가 사유하기 위함이라는 부분이요.
제가 이해력이 딸리는 건가..
댓글 0개 ▲
2014-09-12 19:10:44추천 0
존재의 이유가 사유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유를 하려면 먼저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읽어보세요.
밥을 먹기 위해서는 존재가 전제
응아를 하기 위해서는 존재가 전제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는 존재가 전제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존재가 전제

존재가 넓은 쟁반(플랫폼)이라면
식사, 배설, 데이트, 생각 등은 그 위에 올려 놓을 수 있는 옵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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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2 19:13:19추천 0
"자장면 냄새가 나는 걸 보니 근처에 자장면이 있는 것이 확실해.
왜냐하면 자장면 냄새는 자장면의 존재를 전제로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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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2 19:30:49추천 0
lastlaugher / 근대철학을 맹신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님이 질문하신 부분 때문입니다.
근대철학은 신본주의에서 인본주의로 넘어갔지만, 인본주의가 이상적인 철학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이라는 개념은 '나'이기도 하지만 '너'이기도 합니다. 나와 다른 너, 타자의 존재를 전제합니다. 다양성과 상대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근대철학은 단 하나의 답, 절대불변의 답을 추구합니다.
답은 하나다. 그러니 내가 생각하는 답과 너가 생각하는 답이 다를 수 없다. 내 생각이 곧 너의 생각이고 너의 생각이 곧 나의 생각이여야 한다.
다시 말해 내가 생각하는 인간개념이 맞다면 너도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즉 내 답이 맞다면 다른 답은 모조리 틀렸다는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무식할 정도로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죠.
말은 객관이고 보편이지만, 이는 허울일 뿐, 그저 내가 맞다. 내가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존재의 이유가 사유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세상의 중심이 인간, 즉 '나'라는 생각에 기반한다면, 즉 인본주의에 기반한다면,
존재가 있기에 사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유하니까, 내가 사유해야 하니까 너가 있어야 된다.라고 지 멋대로 정해놓을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고 기준이고 지배자이니... 못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내 필요에 맞추면 그만이죠.
근대철학이 중세의 기독교를 벗어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기독교처럼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 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칸트가 신을 인간의 필요에 의해 요청되는 존재로 정의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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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2 20:30:42추천 0
나르나르/제가 따지는게 아니라.. 오해 안하셨으면 하구요. 정말 몰라서 질문드리는겁니다.
존재가 넓은쟁반이라면, 존재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 즉 사유일텐데.
역으로 사유가 왜 존재의 목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그부분이 이해가 안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주신, 데이트, 밥, 응아로 볼 때. 존재하기에 이것이 비로소 가능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데이트, 응아, 밥을 목적이라 볼 순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제 물음입니다.
제가 철학의 기초적인 지식이 없어서, 전혀 당연시되는 걸 질문드린게 아닌가 좀 걱정은 돼지만.
그래도.. 모르는건 모르는 거니까 헤아려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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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2 20:33:42추천 0
레고맨/님의 말씀은 철학적 서술에 있어 굉장히 열린 시각의 말씀같습니다. 제가 바로 본 것인가요?
사유하기에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해서, 존재의 목적이 곧 사유가 된다는 부분을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것이 ..
제 시각이 너무 동떨어진 부분에서 헤매고 있는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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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2 20:42:49추천 0
lastlaugher / 전공한 적이 없으니... 열린 시각일 수밖에요^^;;;;;
저 스스로도 제 생각이 정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런것 같아 그렇다고 여길 뿐... 누군가 논리적으로 반론을 제기한다면, 또한 생각해보고 그게 타당하다고 여겨진다면
언제든지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생각들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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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2 20:50:18추천 0
오픈마인드.. 좋네요.
나이가 들면서 가지기 힘든 태도 같습니다.
오픈마인드..
댓글 0개 ▲
2014-09-12 20:53:38추천 0
lastlaugher/
"(코기토 명제에서 내가 진리를 말하고 있음을 확신시키는 것은) 생각하기 위해서는 존재해야 한다는 것, 내가 아주 명석하게 본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제4부의 비교적 앞부분에 나오는 문장인데요...

존재의 목적이 사유라는 뜻이 아니라
그냥 생각하려면 일단 존재해야 한다 라는 뜻으로 쓴 말이에요.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댓글 0개 ▲
2014-09-12 20:59:07추천 0
"생각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
"생각하기 위해서는 존재해야 한다"

보조격조사 '는'이 없다보니 생긴 오독이 아닌가 싶네요.
제가 가진 최명관 번역본에는 '는'이 들어가 있습니다.

즉 목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문장이에요.
하지만 "생각하기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라는 문장은
읽기에 따라서 목적으로 해석이 되네요.
이런 경우에는 가능성을 두 가지로 열어놓고
최대한 읽히는 쪽으로 해석을 하는 게 타당할 거 같아요.
댓글 0개 ▲
2014-09-12 21:35:53추천 0
아 그런거였군요
그 어조사하나때문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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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3 01:13:52추천 0
lastlaugher님께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셨네요.
논리의 흐름을 보니 푸코의 초기작 '광기의 역사'에서 데카르트의 기본 명제가 광기, 즉 미친 사람을 인간으로 배제한 선언으로 본 것과 유사한 것 같아요.
때마침 참고할 것이 있어서 컴퓨터 앞에 광기의 역사를 놔뒀는데 여기 쓰네요. 인용해볼께요

진리의 영속성 덕분으로 사유가 오류에서 벗어나거나 꿈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광기로부터 사유를 보호하는 것은 진리의 영속성이 아니라, 미칠 가능성의 부정이다. 광기의 불가능성은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의 본질이다. 누구나 "회의의 어떤 근거"를 찾기 위해, 자신이 꿈을 꾼다고, 또는 자신이 꿈꾸는 주체와 동일하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진리가 여전히 꿈의 가능조건으로 나타난다. 이와 반대로 사유를 통해서조차 미쳤다고 가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광기는 바로 사유의 불가능 조건이기 때문이다.

꼭 데카르트가 선언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사회상과 지식의 발전수준이 데카르트에게 그런 말을 하도록 했을 수가 있죠.
단지 데카르트의 입만 빌려서 나온거라는 표현도 가능하겠네요. 그러나 이 선언을 기준으로 미친 사람들에 대한 사회의 처우가 달라졌다고 푸코는 주장하죠. 비정상인의 배제 말이죠.

lastlaugher께서 철학책은 잘 안 읽으셨다고 했는데, 글 한두문장 보고 여기까지 사유하시는 것을 보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푸코 전도사이긴 하지만 고대 중세 철학보다 니체로부터 시작해서 푸코, 아감벤 등 이런 쪽을 공부해보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일이 잘 풀려야 니체를 본격적으로 공부해보는데... 인생이 꼬여서...

암튼 할 일 하다가 깜짝 놀라 글 남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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