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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쇠말뚝 떡밥에 대한 이이화의 이야기
게시물ID : sisa_878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썬빠
추천 : 0/4
조회수 : 933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0/07/02 18:25:30
일제시기 일본사람들은 우리 나라 산수의 기를 꺾어 인물의 배출을 막으려고 산마루 등 요지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말이 전해졌다. 그래서 이를 믿는 사람들이 쇠말뚝을 뽑아내는 일에 나섰다.

한데 이 말은 이여송의 경우처럼 근거가 없다. 일제 당국은 개항 이후 우리 나라의 지도, 해도를

작성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들은 지도작성의 과정에서 산마루에 쇠말뚝을 박아 표지로

삼았던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조선사람들의 풍수설을 미신으로 몰아붙였다. 그들은 풍수설을 알아보려고 조사를

했고 이에 관련된 글도 많이 썼다. 1909년 원산부윤 이마무라는 '묘지에 관련된 미신과 그 폐해'라는

글을 쓰면서 남의 묘지를 빼앗아 조상의 묘를 쓰는 늑장, 사기를 쳐서 남의 묘지를 차지해 쓰는 유장,

남의 묘지에 몰래 쓰는 암장, 금지구역 안에 몰래 쓰는 범장, 남의 분뮤를 파내고 조상의 지체를 옮겨놓는

은장 등을 소개하면서 그 폐단을 낱낱이 지적했다. 그러면서 '공자묘가 있는 주변에 암장을 하면 자손들

중에 큰 벼슬아니차 높은 학자가 나온다는 미신이 돌았다. 향교 안에 묘지를 쓰는 것은 예전부터 엄금했는데

지금 은밀히 암장하는 까닭에 시끄럽게 논의가 일어난다'라고 1914년에 간행된 '조선풍속집'에 지적하였다.




 1925년 호소이라는 일본사람은 '정감록의 검토'에서 풍수설을 미신으로 몰아붙였다. 그는 '풍수설은 내지

(일본)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하다. 바람을 막고 양지를 향한 명당에 묘지를 쓰면 백골이 편안해질

뿐만 아니라 그 음택이 자손에 미치고 한 가문이 반드시 현달해서 행복과 영화를 마음대로 누린다고 믿었따.

문자를 아는 양반 유생일지라고 이런 미신을 믿었다. 그때에 다른 사람의 묘지를 침범해서 늑장, 암장이 행해졌으며

따라서 묘지에 관련된 소송이 자못 번거롭게 쏟아졌다'라고 여러 가지 사실을 적어놓았다. '정감록의 검토'는

'비결집록'에 포함시켜 같은 해에 간행되었다.



 조선충독부에서는 무라카미라는 관리를 시켜 이를 세밀해 조사에 1931년에 '조선의 풍수'를 간행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민속신앙을 억제하면서 풍수설에 따른 묘지도 산림을 훼손한다는 구실로 막았던 것이다.



 이는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한 것에 불과하다. 이렇게 풍수설을 부정한 일제가 쇠말뚝을 박고 다녔겠는가. 그래서 

쇠말뚝설은 근거가 없으면 어느 일본인 개인의 짓이거나 풍수쟁이들이 어뚱한 소문을 퍼뜨린 것으로 보인다.






역사풍속기행 中

고로 이이화는 식민사학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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