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처세술에 대한 개인적 잡상
게시물ID : phil_97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카라빠돌이
추천 : 0
조회수 : 119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9/14 23:41:15
처세술의 단계가 있겠지요.

처음엔 보신.
처세술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일단계인것이 보신이 아닌가합니다. 자기 몸을 보호한다.
두번째엔 부귀영화.
보신을 이루면 부귀영화를 차지함이 처세술에 두번째 단계겠지요.
세번째엔 명예.
살아남고 살아서 누리고 죽어서 명예를 얻는것이야 말로 처세술에 궁극적 달성단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은 처세술하면 의례 낮잡아 보는 경향이 강한데 완성에 가까워진 처세술을 익힌자 일견 종교계의 성자같이 보입니다.
잘못된 처세술을 배운자라 하면 가령 삼국지에 허유나 구한말에 이완용을 들어봅시다.
허유에 경우엔 친구인 원소와 같이하며 원소에게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관도대전 중에 자신의 큰 비리가 밝혀지고 자신의 가족이 문초를 당하자 원소를 버리고 조조에게 붙죠.
그러하여 자신의 옛 친구인 원소의 세력을 맹공하며 결국엔 업까지 함락시키지만 그 업에서 자신의 공을 자랑하다 허저에게 죽게 되죠.

이완용의 경우엔 친미파. 친러파를 전전하다가 나중엔 친일파로 돌아서서 일제에 협력하죠.
이완용을 뭔가 거악으로 보며 히틀러처럼. 사실 전 히틀러도 뭔가 거악으로 보는 이런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여튼 이완용을 그런 만화책에서 나오는 악당으로 보기엔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런 만화책같은 악당은 송병준이라고 할수있겠죠. 삼국지에서 그런 거악이라면 이각과 곽사를 들수있구요.

이완용을 보면 전형적으로 처세술을 매우 잘못배운 사람같아요.
미국이 득세할때엔 친미파적 성향을 들어내고 러시아가 득세할때엔 친러파적 성향을 들어내거든요.
결국 뭐 힘이 가는곳에 이곳 저곳 붙었다고 할수도 있고요.


현대사회에도. 아니 고대부터 지금까지 이런 잘못된 처세술을 읽힌 사람이 많은것 같습니다.
처세술을 잘 읽힌 사람이라면 가령 삼국지에 보면 가후가 있고 초한쟁패시대엔 진평이있죠.
한국사로보면 하륜과 한명회가 있습니다.


거기서 제가 가후에 이 일화를 재미있게 생각하죠. 처세술에 높은 경지라고 말이죠.
조조가 가후를 불러 자신의 후계자로 조비가 알맞는지 조식이 알맞는지 가후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가후가 침묵하다가 원소와 유표의 일이 생각난다고 조조에게 말하죠.
그때 조조가 깨쳤다. 뭐 이런 식에 표현이 삼국지 연의에 나오고 이런식의 생각을 삼국지를 읽은 사람이 많이 하더라구요.

아닙니다.
조조는 가후를 죽일생각이었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조조는 가후가 자신의 아들중에 누구의 라인을 타는지. 누구와 편당을 형성하는지 알고자 했던겁니다.
유비나 손권이었다면 저렇게 안했을텐데 역시 조조라 그런지 직접적으로 물어보죠.

사람들이 생각하는게 가후가 조비를 밀었다고 생각을 하더란 말이죠.
아닙니다.
그냥 살라고 처세술의 영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는 어느 편당도 아님을 밝힌것이며 동시에 야심이 없음을 들어낸겁니다.


말도 안되는 소립니다.
가후가 누굽니까.
자기 맏 아들을 죽였고 자기 조카인 조안민을 죽였고 자기 장수인 전위를 죽였고 자기가 즐기던 추씨를 죽였고
결정적으로 그 조앙이 죽었기 때문에 조조의 본 부인은 조조에게 이혼을 통보하고 떠납니다. 그래서 변씨가 조조의 본 부인이 되었죠.
사람들은 뭔가 착각을 하는거 같아요.

조조와 가후가 군신관계를 유지했다거나. 그것이 무슨 게임마냥 충성으로 이루어진 관계로 말이죠.
그런 개떡같은게 있을리가 있겠습니까.
조조니까. 그래도 자기 아들 직이고 자기 조카 직이고 자기 장수 직이고 자기 가정파탄낸 자를 곁에 둔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위험한 자였기 때문에 자기 옆에 두어야만 안심이 되니까요.

여기서 가후가 조비편을 들었어도 가후는 죽고 조식편을 들었어도 가후는 죽고 둘의 편을 다 들지 않았어도 가후는 죽고 모른다고 해도 죽습니다.
4가지 모든 답안지에서 전부 죽음에 놓여있었던거죠.
처세술을 높은 경지에 있는 가후였기 때문에 이 위기를 넘어간거고 그런 머리 비상한 가후조차도 버퍼링이 걸릴 정도에 일이었던거죠.

사람들은 가후가 뜸들인게 답을 알면서도 일부러 뜸을 들여 조조를 깨우치려고 했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개떡같은 소리죠.
가후가 그 질문을 듣는 순간에 이것이 자신의 생사존망을 가르는 일임을 깨닫고 머리를 총회전 시키고 있었던겁니다.
그래서 나온 답이 원소와 유표에 일을 생각하는것이죠.

이것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것이 아닙니다.
그저 옛일이 생각난다는것이죠. 만약에 조식이 권좌를 잡았다고 해보지요.
조식이 연회중에 가후에게 이 일을 물었다면 가후는 실 없는 망언을 했다고 말하면 됩니다.
그럼 뛰어난 인텔리인 조식의 경우엔 가후를 죽일 일이 없죠. 왜냐하면 가후가 조비를 편든게 아니라 그저 돌아가는 시류를 말했으니까요.
또한 장자를 재치고 그 밑에 아들이 후계를 있는건 순리에 있는 일이 아니죠. 조식은 순리대로 권자에 오른자가 아니기에 정치역학상 그를 극복해내야죠. 그래서 오히려 정치적으로 가후에 말이 옳다고 하면서 자신은 장자승계에 순리에 따르지 않을만큼 다르단걸 업적으로 인정받아야 됩니다.

가후는 순리를 말한겁니다.
결정적으로 조비는 싸이코니까요. 조식편을 들어서 조식이 권좌를 잡지 못하면 가후는 무조건 죽습니다.
조비 성격에 가후를 살려둘리가 없죠. 또 조비는 순리대로 권좌를 잡은거니 가후를 죽여도 정치적 후폭풍이 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가후가 이 성격을 알고 말한것이냐 하면 그도 맞지만 이것만이 고려대상이 아니죠. 눈 앞에 당장 권력자인 조조가 있습니다.
그냥 가후는 봄되면 새싹이 피고 가을되면 열매 맺는다. 수준에 자연에 이치마냥 세상에 이치는 장자에 쏠릴 수 밖에 없다는것을 말했죠.
그래서 조조의 손아귀에서도 벗어난겁니다. 그냥 순리를 말했으니까요.

그냥 순리였기 때문에 조조 또한 가후가 하는 말을 제대로 들은거죠.
난 녹봉이나 받아먹지. 누가 후계가 되던 상관없다. 라는걸 조조에게 강력하게 어필한거거든요.

그럼 왜 4지선다에서 조비편.조식편.누구편도 들지 않던가. 모른다고 해도 죽는가 하면 조조가 있으니까요.
모른다고 하면 가후가 모를수가 없잖아요. 조조가 추씨를 탐할때 그 작은 틈도 파고들 수 있다는걸 바로 잡아낸게 가후입니다.
장수와 장수의 세력과 장수의 군대가 가후의 생각만큼 따라왔다면 조조는 그 자리에서 탈출하다 죽었겠죠. 어떤 변수도 없이 말이에요.

모른다는건 자신의 의도를 감추겠다는거고 가후같이 마초.한수를 이간시킬만큼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자가 자신의 의도를 감춘다는것이니.
4지선다중에서 모른다는 답이 가장 빨리 한 1년안에 죽는 길일겁니다.
양수 다음 타자로 가후가 지목되고 빠르게 제거됬겠죠.
그럼 조비나 조식편을 든다는것을 어떻게 될까요.

조비나 조식. 둘 중에 누가 권력을 잡을지는 모릅니다.
이러면 살아날 확률이 1/2 같지만요 사실은 제로에요.
왜 제로냐면 조비나 조식이나 전부 조조 자식이니까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했습니다.
부모입장인 조조에게 있어서 조비나 조식이나 다 내 자식이에요.

맏 아들을 죽인자가 다시금 자신의 아들중에 하나에게 생채기라도 입히면 부모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또한 조조가 그때까지도 갈팡질팡하면서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는데요.
그것 자체가 다 자식이라서 그런겁니다.
그러니 조조 마음속에서 후계자가 정해진것도 아니에요. 이 상황에서 후계자는 조비가 맞습니다. 조식이 맞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이라면 그나마 살아날 수 있겠지만 맏 아들 조앙을 죽인 전과가 있는 가후의 경우엔 필살당합니다.
자기 아버지 죽었다고 서주대학살을 감행할만큼 조조는 감정적인 사람이죠. 감정적인 행동을 하면서 그 행동을 냉철하게 보는게 조조입니다.
감정을 상하게 하면 이성적으로 필요성이 없다고 할때 거의 죽이는게 조조입니다. 가차 없이 죽이죠.


그렇기에 가후의 이때에 대답은 처세술에서 추구하는 보신과 부귀영화를 지켜낸 가장 좋은 답이라고 보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말했듯이 처세술에 높은 단계는 일견 보기엔 성자같이 보인다는 것이죠.
살라고 하는데 말이에요.

허유 같은 경우엔 원소를 배반했을때에 허유는 그냥 지금에 시장이나 군수정도 자리에 만족하며 허송세월하며 죽는것 밖에 남은게 없었습니다.
가후를 예를 들어죠.

가후가 왜 조조에게 갔는가.
난 이걸 무슨 대단한 판타지 로망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살라고 조조에게 간거에요.
관도대전 당시에 가후가 어디로 갑니까. 유표한테 갈까요. 손책한테 갈까요. 이미 이방인인데 이들이 장수와 가후세력을 받아주기나 하겠습니까.
아니 가후가 그냥 자기 몸만 빠져나와서 허정처럼 떠돌며 임관을 청한다고 해도 유표나 손책이 받아나 주겠습니까.
거기에다 만약 조조가 관도대전을 이기면 반드시 가후에 신병을 양도하라고 할겁니다.
그럼 유표나 손책이 조조보다 약한데 약한 세력이 가후를 보살필까요. 의형제도 아니고 중요인물도 아닌데요. 그냥 줍니다. 조조에게
그러한 형태로 조조에게 끌려가면 가후는 죽습니다. 조조가 죽이겠죠. 자기에게 이빨을 들어냈으니까요.

원소한테 갈까요.
원소한테 가면 원소가 이기면 보신이 되겠지만 원소가 지면 역시 죽습니다. 조조가 죽이죠.
조조에게 가서 조조가 설령 원소에게 밀려서 진다고 해도 가후는 다른세력에 임관하던지. 아니면 원소밑에 들어가면 됩니다.
보신을 완벽하게 충족하죠.

원소에겐 가봐야 보신만 간신히 충족하고 부귀영화는 절대로 누릴수가 없게됩니다.
그러나 조조에게 가면 조조가 져도 나의 보신엔 상관이 없고 조조가 이기면 보신과 부귀영화를 같이 누리게되죠.
그럼 여기서 리스크는 조조가 투항해온 장수는 받아주되 가후는 죽이는 시나리오인데요.
그럴수가 없어요. 정치적으로.

그렇게 하면 조조는 투항해온 자를 죽인 세력이 됩니다. 그럼 누가 조조에게 투항합니까.
조조는 가후를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습니다. 자 세력이 파멸하니까요. 물론 이각과 곽사같은 무리들은 아예 생각이 없어서 죽이고 남을 위인들이지만요. 가후는 조조를 대면해본적이 있으니 조조가 그런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던겁니다. 애 당초 이각.곽사 같은 무리가 답이 없는걸 알고 장제의 조카인 장수의 세력에 가담하여 완에 둥지를 튼게 가후니까요. 그런 인간구분은 철저하게 할수있죠. 이미 그런 막장인간들을 봤으니까.

그래서 가후가 장수를 설득해서 조조에게 투항하죠.
이것이야말로 완전에 가까운 처세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후가 젊었을때 도적에게 잡혀 자기 족보위조해서 살아남았다는 기술을 읽었을때부터 가후는 참 처세술의 귀재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세술에 요점은 무엇일까요.
제가 보기엔 처세술에 요점은 타이밍과 자신의 한계파악입니다.
가후는 조조를 놓친 그 순간에 깨달았다고 봅니다.
자신의 꿈과 야망과 흑심은 전부 다 깨어졌구나. 이제 남은건 녹봉이나 받아먹고 인생 종치는거란걸 말입니다.

이완용이나 허유 같은 인간에 가장 특징적 부분을 말하자면 저겁니다. 한계가 없어요.
누구는 욕망에 한계라던가. 그렇게 말하지만 제가 보기엔 자기 자신의 출세와 부귀영화에 한계를 깨닫지 못합니다.
어느 순간에 무언가가 실패했을때 자신의 인생에서 받을 수 있는 출세와 부귀영화가 규정지어진다는 것이죠.
그 이상은 못한다는걸 깨닫는게 처세술에 가장 기본같습니다.

가후의 능력이 부족하겠습니까. 그 지모가 부족하겠습니까.
음모도 아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게 가후입니다.
근데 이제 못쓴다는걸 깨달은거에요.
왜냐.
죽으니까. 보신에 절대 위배된다는겁니다.

그 능력으로 유비에게 가던 손권에게 가던 죽을 확률만 대폭 늘어나게 되는겁니다. 왜냐하면 배신자를 누가 받아주겠습니까.
배신은 인생을 통틀어 단 한번만 할 수 있습니다. 한번하면 그건 암군을 떠나 성군을 만나러가는것이 될 수 있으니까요.
진평의 경우가 대표적이겠죠. 그가 물고온게 크면 클수록 그를 영입하는 측면에선 암군을 떠나 성군을 만나려는 인재라고 해줄수라도 있는겁니다.
두번째부턴 그것도 없어요.

처음 배신을 하면 믿음을 상실하되 능력은 인정받습니다.
두번째 배신부터는 믿음도 상실하고 능력도 상실합니다. 그게 내 능력이 없어져서 상실되는게 아니라 남이 능력조차 기용해주질 않으니까요.

이완용이나 허유같은 경우엔.
아니죠. 지금도 그렇고 언제나 그렇지만 처세술을 잘못 배운자들의 가장 특질적 부분이 보신을 아주 헌신짝처럼 버린다는겁니다.
보신이 점점 약해지면서 없어지고 남은건 부귀영화뿐이죠.
재미있는건 보신이 약해지면서 덩달아 명예도 약해진다는것이죠.
처세술을 읽힌자가 자신의 보신을 가볍게 보기 시작하면 그는 명예도 가볍게 보는 특징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마음이 전부 부귀영화에 쏠리게 되죠.

사실 처세술이 발전한 모든 계기는 보신인데 말이죠. 부귀영화도 보신을 더 확고하게 하기 위해 누리는것인데 말입니다.
명예는 죽어서도 보신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 즉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보단 자신의 이름이 지켜지길 바라는 마음인것이죠.
처세술에 명예는 자신의 이름을 지키는것에 중점을 둡니다. 이름을 널리 알리는게 아니죠.


현대에도 참 그런 사람이 많이 보입니다.
명심해야 될건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한도안에서 즉 이름 석자로 지키는 한도 안에서 부귀영화를 추구해야 한다는것이죠.
자신의 이름도 지키지 못하면 자신의 목숨도 역시 없는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강한건 명예거든요. 명예가 사람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니까요.

권력은 사람을 따르게만 할수있을뿐 죽일수가 없어요.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면 권력은 매우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금력은 사람을 부리게만 할수있을뿐 따르게 할수없어요. 사람을 강제로 따르게하기 시작하면 권력이 금력을 까죠.
명예는 사람을 죽일수도 있고 살릴수도 있습니다. 자유로이 생사이탈권을 행하면서도 생채기 하나 입지 않죠.

처세술에 핵심은 명예의 반드시 지켜야할 부분은 지키고 나머지 부분은 최소한도로 소모시키면서 보신을 이루고 부귀영화를 쟁취하는겁니다.
3박자가 딱 맞아야 완벽하게 굴러가거든요.
진평이 그 한계점에 있다고 봅니다.

진평은 항우를 배신한 배신자 아닙니까. 항우측 입장에서 보면 천하에 쳐 죽을놈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유방에게 있어선 패왕의 폭정을 끝내려 힘을 합친 동료죠.

그래서 진평이 항우를 패망시키기 위해서 정말 더러운 술수와 음모를 무지하게 씁니다.
유방이 이겨야만 비로서 천하에 안정을 가져왔다는 명예를 손에쥘수있고 그래야만 살아남거든요.
그리고 유방에게 진평이 옴겨간것도 항우와 유방이 공히 비슷한 명예를 손에 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허유의 경우엔 답이 없죠.
처세술을 제대로 익혔다면 그런 행태를 띠지 않았을겁니다.
그냥 도망치면 되요.
죽을것 같으면 산속으로 도망쳐서 살면 됩니다. 그럼 원소가 친구인데 원소가 천하를 평정하면 기분 좋아서 허유에 그 허물을 생각하겠습니까.
오히려 원소가 다시금 허유를 불러와서 기용할 수 있습니다. 원소가 진다고 해도 산속에서 살다가 조조가 기용하려 할수도 있지요.
만약에 그런 상황에서 조조가 기용을 했다면 허유가 비참한 최후를 맞겠습니까. 조조가 필요해서 영입한건데요.

배신도 딱 한가지 상황에서만 할수있습니다.
뭐냐하면 상대가 나를 간절히 원할때. 딱 이 때만 배신할 수 있고 배신한 뒤에는 매우 몸 조심하면서 살아야죠.
가후가 조조에 가담할때에 조조는 애기 손이라도 필요했던 때고 진평이 유방에 가담할때에도 유방은 농민 한명이라도 필요하던 때입니다.
상대가 간절히 원하지 않으면 배신은 그냥 배신이에요. 상대측에게도 그냥 저놈은 배신자네 라고 끝나죠.

상대가 나를 금으로 봐줘야만 내가 금이 되는것이죠.
이완용 같은 경우엔 일제가 이완용을 금으로 봐줬습니까. 개풀이죠.
그저 송병준이나 이완용같은 자를 통해서 일제는 일제에 대한 원망이 그런 친일파에게 향하도록 했습니다.
일부러 방치했어요. 해서 이완용은 암살까지 당할뻔했죠.

귀하게 여긴게 아니라 일부러 티나게 귀하게 여기는척 하면서 실제론 별것 아닌거 조금 때주고 "이눔이 배신자다"라면서 광고는 동내방내 다 냈죠.
그렇게 해서 일제에 대한 원망과 원한을 자신의 앞잡이들에게 돌리도록 한겁니다.
즉 일제가 본 이완용과 송병준 같은 친일파는 그냥 이용물 그 이상이 아니었어요.
진평 같은경우엔 없으면 안되는 이용물이었고 이게 처세술을 추구하는자가 배신했어도 가야될 최소한에 위치입니다.
상대에게 나는 없어선 안되는 이용물이 되어야만 해요.

이완용 같은 경우엔 대체물이 수백.수천이 넘는 냅두다 죽으면 그 모욕이 묘에까지 미칠만한 처절한 쓰다 버릴 이용물에 불과했습니다.


처세술이 모든 가능성이 끊기면 어떻게 되냐면 그저 은거하면서 땅을 조금 일구어 엥간히 먹고 살만큼 생활하며 삽니다.
보신.
보신을 달성하는거니까요. 그러고 끝나요.

그렇게 하고 인생을 종칩니다.
제갈량이 왜 남양땅에 은거했겠습니까. 거기서 그냥 땅이나 부쳐먹고 늙어죽을 생각을했던게 제갈량이에요.
그렇게 은거하다 죽어야지. 하는겁니다.


처세술에 핵심은 가차 없다는 겁니다.
상대에게 가차 없죠.
동시에 자기 자신의 인생에게 조차 가차 없습니다.
처세술을 잘못 배운자의 특질이 또 여기서 나오는데 상대에게 가차 없고 어떤 신념에 가차 없으면서
자기 자신의 인생엔 엄청난 로망을 가지고 또한 자신의 신념은 금과옥조로 여깁니다.

그런자는 대다수 최후가 매우 비참합니다.
아주 비참해요.
죽은 뒤에 조차 비참함이 계속되죠.


여기까지가 처세술에 대한 제 개인의 잡상입니다.
처세술을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는 아마도 저런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듯합니다.
10중에 8~9가 허유나 이각.곽사 같은 사람이니까요.
어쩔 수 없는것이기도 한가 봅니다.
처세술은 참으로 많은 이들이 사용하고 지금도 사용중이며 현실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그 체계가 잡히지 않은것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후흑학이라던가. 제 글처럼 단편적 단상들만 있지.
처세술에 대한 정치학처럼 체계가 나오지 않는것 같아요.

만약에 체계가 잡힌다면 그때선 처세학이라도 불릴수도 있겠죠.
처세술이라고 사람들이 부르고 나 또한 그렇게 부르는것이 처세술이 체계화 되지 못했다는 반증아니겠습니까.
언제쯤이면 처세학이 나올지 궁금합니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