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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베간 현대미술 작가.(에 대한 진중권의 이야기)
게시물ID : art_187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너귤
추천 : 11
조회수 : 2225회
댓글수 : 27개
등록시간 : 2014/09/17 12:44:23
ㆍ“난 어떤 목표도, 체계도, 경향도 추구하지 않아” 포스트모더니즘 문 열다

1960년대에 독일 미술에는 앵포르멜과 팝아트에 맞서 서로 대립되는 두 흐름이 일어났다. 하나는 게오르크 바젤리츠와 안젤름 키퍼의 신표현주의 노선으로, 이들은 독일표현주의의 전통을 이어 독일미술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했다. 이들은 사진과 대중문화를 배격하고 ‘회화’를 통해 독일의 굴절된 역사를 다루려 했다. 다른 하나는 게르하르트 리히터로, 그는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더 이상 독일만의 예술은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다. 회화가 역사에 관해 진리를 말할 수 있는지 회의하며 차라리 사진을 신뢰했다.


■ 모던에서 포스트모던으로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종종 대중매체에 “생존하는 이들 중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작가”로 소개되곤 한다. 그 가격에는 현대미술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그가 그토록 높이 평가받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그의 작품세계가 흔히 ‘포스트모던’이라 불리는 정신적 분위기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리라. 1966년의 어느 날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자신의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Richter, Gerhard), ‘베티(Betty)’, 1988, Oil on canvas, 101.9×59.4㎝


“나는 어떤 목표도, 어떤 체계도, 어떤 경향도 추구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강령도, 어떤 양식도, 어떤 방향도 갖고 있지 않다 …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일관성이 없고, 충성심도 없고, 수동적이다. 나는 무규정적인 것을, 무제약적인 것을 좋아한다. 나는 끝없는 불확실성을 좋아한다.” 양식의 다양성은 모더니즘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양식적 다양성은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모더니즘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새로움’의 추구에 있었고,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언어가 다양해진 것일 뿐, 양식의 다양성은 결코 모더니즘의 예술적 목표가 아니었다. 오히려 모더니즘의 강령들은 저마다 ‘오직 내 것만이 진정으로 새롭다’는 식의 배타성을 갖고 있었다. 포스트모던은 다르다. 여기서는 ‘다원주의’가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추구된다. 심지어 전통으로 복귀하면 안된다는 모더니즘의 터부마저 포기된다.

리히터의 작품세계는 온갖 예술언어로 짜인 모자이크다. 포토 리얼리즘과 같은 사진적 재현이 있는가 하면, 구상성이 배제된 회화적 추상이 있다. 추상의 경우에도 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을 닮은 게 있는가 하면, 구성주의나 미니멀리즘, 색면추상과 모노크롬을 연상시키는 것도 있고, 개념미술에 가까운 게 있는가 하면 달리나 에른스트처럼 초현실주의적 공간감을 주는 것도 있다. 심지어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를 연상시키는 낭만주의적 풍경도 존재한다. 이렇게 끝없이 새로운 언어를 가지고 나타남으로써 그는 늘 주위를 놀라게 한다.

한 화가가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한 예술가에게서 예술언어의 교체는 통시적으로, 즉 시간의 축을 따라서 이루어진다. 가령 우리는 피카소의 청색시대, 홍색시대, 큐비즘에 대해 얘기한다. 리히터는 다르다. 그는 이 모든 예술언어를 공시적으로 사용한다. 즉 같은 시기에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가령 사진적 재현에서 회화적 추상으로 스위치하는 것이다. 그를 ‘카멜레온’이라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 자본주의 리얼리즘

이는 아마도 그의 개인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동독의 드레스덴에서 태어난 그는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몇 달 전에 서독으로 탈출한다. 그보다 두 해 전인 1959년 카셀 도쿠멘타 Ⅱ에서 잭슨 폴록의 작품을 접했고, 서독으로 망명한 후에는 미국에서 건너온 팝 아트를 보았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독일에서는 마침 플럭서스의 반미학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동독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미학적 교리만 배운 그에게 이 모든 것이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히틀러와 스탈린, 두 개의 전체주의를 체험한 그는 이데올로기를 극도로 싫어했다. 정치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예술 이데올로기도 그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가 고정된 양식에 안착하기를 거부하고 끝없이 언어를 바꾸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예술에 하나의 양식을 강요하는 것은 그에게 히틀러, 스탈린이 하는 짓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타일이 없는 것을 좋아한다. 사전, 사진, 자연 나와 내 그림들-왜냐하면 스타일은 폭력이고, 나는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서독에 망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첫 작품으로 동료 콘라드 피셔와 함께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가구 상점의 공간에 탁자와 소파 같은 부르주아 생활의 도구가 마치 예술작품처럼 받침대 위에 놓여 있다. 두 명의 예술가는 역시 받침대로 드높여진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정치적 내용의 방송을 시청한다. 그날은 마침 콘라드 아데나워 총리가 사임하던 날. 이날을 맞아 서독의 경제기적에 만족해하는 부르주아 시민의 모습을 냉소적 뉘앙스로 연출한 것이다.

이 퍼포먼스에 그는 ‘팝과 더불어 살기-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실연’(1963)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가구를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작품인 양 기리는 것은 일상을 예술로 끌어올리는 팝아트의 제스처를 차용한 것이고,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행위는 플럭서스 퍼포먼스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며,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제목은 동독 예술이 공식적 강령이었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패러디한 것이다. 어쨌든 이 이후 리히터는 자신의 방법을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 부르게 된다.


■ 회화와 사진

1960년대에 리히터는 주로 포토 리얼리즘 작업에 매달렸다. 그가 사진에 매료된 이유 역시 독특한 데가 있다. 회화와 달리 사진은 양식화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진에는 양식도 없고, 구성도 없고, 판단도 없다. 사진은 대상을 회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재현한다. 카메라는 대상을 이해하지 않고, 그것들을 그냥 본다. 반면 손으로 그린 그림들은 일종의 시각적 종합이기에 현실을 왜곡시키고 특정한 종류의 양식화로 흘러간다. 그 결과 현실은 이미 알려진 것으로 상투화되고 정형화된다는 것이다.

1966년에 제작된 ‘8명의 학생 간호사’는 고등학교 졸업앨범에서 뽑은 여덟 장의 흑백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진의 주인공들은 같은 해 7월 시카고에서 일어난 대량 살인사건의 희생자라고 한다. 언뜻 보면 사진 같으나 실은 물감으로 그린 것이다. 1988년에 제작한 ‘베티’를 보자. 이 역시 10년 전에 찍은 딸의 사진을 베껴 그린 것이다. 그림을 완성한 후 그는 이를 다시 사진으로 찍어두었다고 한다. 이로써 사진과 그림 사이의 경계는 유동한다.

1964년 이래 그는 ‘아틀라스’라는 이름 아래 여기저기서 오려낸 사진첩을 마련해 두고 거기서 골라낸 사진을 원작회화의 밑그림으로 사용해 왔다. 이 점에서 리히터의 작업은 앤디 워홀의 팝아트를 닮았다. 하지만 워홀과 달리 리히터는 자신의 작품이 정말 사진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이 점에서 그의 작업은 팝아트보다 포토 리얼리즘에 가깝다. 하지만 포토 리얼리즘이 사진보다 더 높은 해상도를 구현하려 한다면, 리히터는 이들과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의 ‘푼크툼’은 대상의 윤곽을 흐리는 데에 있었다.

가령 바더 마인호프의 연작을 생각해 보자. ‘1977년 10월18일의 죽은 자’(1988)는 테러를 저지르다가 체포되어 옥중에서 연쇄 자살했던 독일 적군파들의 죽음을 다룬 연작 중의 하나다. 테러리스트를 소재로 삼았다고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던 이 작품은 작가가 테러리스트들에게 은밀한 동정을 품은 게 아니냐는 억측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품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거부했다. 자신의 작품과 정치 사이에 뭔가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유토피아적 기획의 미심쩍은 본성을 드러내는 데에 목적을 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유토피아에 대한 불신 역시 포스트모던하다.

작품은 대상의 윤곽을 사정없이 흐려놓아 마치 초점이 맞지 않은 사진처럼 보인다. 왜 윤곽을 흐려놓는 것일까? 어떤 이는 이것이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흐리기 위한 장치라고 말한다. 뵐플린 이래로 우리는 대상의 윤곽을 흐리는 게 회화적 효과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제로 윤곽 흐리기는 사진에 마치 터너의 안개 그림이나 인상주의의 작품처럼 회화적 느낌을 준다. 다른 목소리에 따르면 거기에는 대상에 손대기를 꺼리는 모종의 ‘접촉공포’가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윤곽 흐리기는 대상을 손으로 잡지 못하게 함으로써 작품에 최종적인 의미를 주지 않으려는 장치라고도 한다.

이로써 대상의 의미는 고정되지 않은 채 열리게 된다. 1986년의 어느 인터뷰에서 리히터는 이렇게 말했다. “유일하게 역설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언제나 적절한, 구성된 모티브로 완결된(closed) 사진을 얻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시작하는데, 조금씩, 조금씩 그 의도를 파괴하여 마침내 작품이 완성됐을 때에는 개방성(openness)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 숭고의 부정적 묘사

1980년대 중반부터 리히터는 포토 리얼리즘 작업과 나란히 추상회화를 제작하기 시작한다. 포토 리얼리즘의 구상과 모더니즘의 추상이라는 두 개의 극단이 동시에 공존하게 된 것이다. 료타르의 설명에 따르면 현대예술은 ‘숭고의 부정적 묘사’라고 하다. 즉 묘사를 포기함으로써 이 세상에 묘사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음을 말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어조로 리히터는 이렇게 말한다.

게르하르트 리히터(Richter, Gerhard), 추상회화, 1990, Oil on canvas, 225×200㎝

“추상화는 구상적 모형이다. 그것은 우리가 볼 수도, 기술할 수도 없으나, 분명히 존재함을 알고 있는 어떤 현실을 가시화시키기 때문이다. 그 세계를 우리는 알려지지 않은 것, 파악할 수 없는 것이라는 부정적 개념으로 표시한다. 그것을 우리는 수천 년 전부터 천국, 지옥, 신과 악마라는 그림으로 대체하여 묘사해 왔던 것이다. 추상회화와 더불어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직접 다가갈 수 있는 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왜냐하면 추상회화는 직접적인 직관성 속에서 예술의 모든 수단을 가지고 무(無)를 묘사하기 때문이다.”어느 책에선가 20세기 예술은 크게 사진을 이용한 ‘복제 미학’과 주로 추상회화를 이용한 ‘숭고 미학’의 두 흐름으로 나누어진다고 쓴 바 있다. 서로 대립되는 이 두 개의 물줄기가 재미있게도 리히터에게서는 하나로 합류한다. 리히터는 끝없이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어 왔다. 이 운동은 때로 극에서 극으로 움직인다. 하지만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언어를 바꾼다고 해서 예전에 사용하던 언어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언제라도 과거의 언어를 끄집어내어 다시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리히터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 현실은 어느 하나의 그림 혹은 텍스트 안에서 단 한번에 남김없이 포착되지 않는다. 남는 것은 결코 손으로 잡지 못한 채 현실에 접근하려는 끝없는 시도뿐이다. 데리다의 텍스트가 결코 초월적 기의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표의 무한연쇄 놀이를 하듯이, 리히터의 그림도 결코 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의 현실은 수많은 예술언어들의 놀이를 풀어놓으면서 안갯속으로 모습을 감춘 채 늘 우리의 손아귀(把握)를 빠져나간다. 이렇게 리히터는 1980년대에 비로소 전면화하는 어떤 경향, 즉 포스트모던의 시대정신을 구현한다.

(이 글은 2005년 ‘예술의 전당’ 기관지에 기고했던 글을 수정, 가필한 것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11161957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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