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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잔에 잠긴 조롱
게시물ID : readers_1555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거세된양말
추천 : 1
조회수 : 28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9/17 22:23:38
술잔에 잠긴 조롱


밤이 딸그락 딸그락 소리를 내면서
허파에 들어차는 시간이면
나는 옛날 애인들을 생각하고
희극이란 것을 겪어본 일이 없는
내 연애사를 생각하고
삼류 통속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그런 꿈을 꾼다. 뜬 눈으로.

뜬 눈으로 나는
내가 자학하며 내쫓았던 그 소녀를 생각하고
사랑이 무엇인지도 몰라서
사랑하고자 해도 사랑할 수 없었던
어린 날의 유사연애를 조롱하고,
그러나 지금에야 조롱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나는
항상 현재의 나에게 비굴하니까.

뜬 눈으로 나는, 세상
어느 곳보다 추운 곳에서 자랐기에
오히려 내 추위를 가시게 만들었던 그녀에게
몇 편의 시와 엽서를 보내고
내 수첩에
생경한 희망의 구절들을 머뭇거리며 끄적이게 만든
그녀 앞에서 오로지 경계하는
들짐승이었던 나를 생각하고
파르르 떨리는 침묵에 잠기는 것이다.

뜬 눈으로 꿈을 꿀 때
나는 온갖 옛날 연인들이 뒤섞인 여자를
사랑하고 애원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녀는 레즈비언이었다. 이제는 꿈마저
삼류 신파극이다. 나는 비극이
코미디가 되어가는 와중에 있나.

그 외에도 수많은
몇몇은 이름은 기억하고
몇몇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흡사한 윤곽과 색깔을 지닌 소녀와 여인들이여

그래서 나는
한 달에 한 번은 이름마저 기억나지 않는
그녀들을 위하며 술을 마시고
또 한 달에 한 번은
이름은 기억나는 그녀들을 생각하며
술을 마시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통속 연애 시로 바글거리던
머릿속을 알코올이 깨끗이 지우고
그 자리에 흰 공백과 휘발성의 향기를 남겨두면
나는 희희거리며
또 실패할, 차라리 실패하기 위해
연애라는 장난을 향해 손을 뻗고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이라는 코미디를 위한
한 잔의 독한 술을 들고 있는 것이다. 건배.

아. 포도주가 왜 이렇게 단가.
아무래도 냉장고에 있던 것은
포도주 병이 아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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