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후, 원로 아나운서 김동건(71)씨를 만나러 서울 도심의 한 커피숍에 가는 길이었다. 덕수궁 대한문 앞을 지나는데 마침 ‘왕궁 수문장 교대의식’이 한창이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직장 근처라 이미 여러 차례 구경한 행사지만 어제는 다른 때와 느낌이 달랐다. 수문장 교대는 새 경비병력이 기존 병력을 대체하는 의례적 절차일 뿐이다. 물러난 경비병들은 숙소에 가서 쉬거나 다른 일을 하면 된다. 불안해하거나 다칠 일이 없다. 그러나 수문장 아닌 ‘왕궁’의 권력이 바뀐다면? 이미 6·2 지방선거 후 새로 들어선 지방권력이 인사를 통해 전임 권력을 ‘손보는’ 풍경이 곳곳에서 연출되고 있다. 새 술은 새 부대라 했다. 자신과 뜻이 맞는 사람들과 일하겠다는 건 당연하다. 그렇지만 정도 문제다. 금도(襟度)가 따라야 한다.
7년 전인 2003년 6월. 김동건 KBS 아나운서는 매주 월요일 밤 10시에 방영되는 ‘가요무대’ 프로그램 녹화를 여느 때처럼 마쳤다. 18년째 진행해 오던 프로그램으로, 그날이 832회분 녹화였다. 방송사 관계자가 김씨에게 다가와 “오늘이 마지막 녹화다. 다음 주부터는 다른 사람이 진행한다”고 통보했다. 노무현 정권이 출범한 지 채 넉 달도 되지 않은 때였고, KBS 사장은 정연주씨였다. 평소 정치판에 끼거나 정치적 발언을 일삼지도 않았기 때문에 김동건씨는 아직도 쫓겨난 이유를 정확히는 모른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당사자보다 더 열을 받은 지인·후배들이 “가만 있으면 되겠느냐”고 할 때 그는 “새로 KBS 사장이 돼서 MC 하나 못 바꿔서야 되겠느냐”는 말로 일축했다. 불평하기에는 방송 외길을 걸어온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정작 그가 섭섭했던 대목은 퇴출 자체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통보로 인해 전국의 ‘가요무대’ 시청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게 서운했다.
커피숍에서 최근 ‘출연금지 블랙리스트’를 거론해 KBS로부터 고소당하는 등 화제로 떠오른 개그우먼 김미화씨 이야기를 꺼냈지만 김동건씨는 “내 분야도 아니고…”라며 아예 말문부터 막았다. 그는 최근 7년 만에 KBS 1TV ‘가요무대’에 복귀했다. “첫 녹화 때는 마음이 울컥해서 차라리 NG를 내고 다시 녹화할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7년의 공백이 그렇게 큰 줄 몰랐다. 다행히 두 번째, 세 번째 녹화로 갈수록 안정되더라”고 했다. 권력과 방송인의 관계에 대해 다시 물었다. 그는 “상식이 지켜지면 될 일”이라고 했다. “권력이 방송인을 이용하려 해선 안 된다. 또 당사자인 방송인들은 권력에 기대 이익을 보려 해선 안 된다. 그게 기본 상식 아닌가.”
방송인들이 권력에 혹은 치이고, 혹은 업히고, 혹은 억울하게 엮여 빚어낸 사연들은 무수히 많다. 사회가 두 쪽으로 갈라진 탓에 한 쪽은 “당했다”는데 다른 쪽에선 “그런 일 없다”며 거꾸로 노이즈 마케팅을 의심하기도 한다. 대통령과 닮은 탓에 TV에 출연하지 못했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기억에 아련하다. 그래서 이번 김미화씨 파문이 법정에서 어떻게 결말이 날지 참 궁금하다.
미국의 연예인들은 민주당·공화당 성향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도 별 피해를 보지 않는다. 우리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한국의 정권 교체는 ‘전부 아니면 전무’ 성격이 너무 강하다. 밀물·썰물에 따른 조수 간만의 차이가 아니라 거대한 쓰나미의 엄습이다. 자기들도 그랬으면서 정권을 내놓은 뒤에는 되도록 커다란 소리로 비명을 지른다. 대중 스타들의 영향력은 날로 커져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을 벗어나기 힘들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디서부터 끊어야 할까. 커피숍에서 일어날 즈음 김동건 아나운서가 입을 뗐다. “우선은, 방송인들 스스로 정치적으로 불편부당·엄정중립을 지키는 게 중요할 듯해요. 공연히 ‘누구 사람’이라는 오해를 불러서야 대중이 순수성을 믿어 주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