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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엄마의 세월
게시물ID : panic_881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여기봐
추천 : 26
조회수 : 1819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6/05/29 19: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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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왔다."

"......왔나 우리 아들."

엄마는 오늘도 부엌에서 고기를 썰고 있다. 3년 전부터 키운 삼돌이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특별식을 주는 엄마다.

삼돌이는 아버지가 유난히 아끼던 개였다. 엄마는 자신이 사는 두 번째 이유는 삼돌이라고 했다.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목구멍 가득 하고픈 말이 올라왔지만, 이미 축 처져버린 엄마의 어깨를 보며 나는 목젖이 아프도록 침을 삼켰다.

생기 없이 가녀린 팔로 억척스레 칼질을 하는 저 여자에게 이젠 화를 낼 수가 없다.

나는 방문을 닫고 들어가 교복 차림 그대로 바닥에 누워 눈을 감았다. 쓱싹쓱싹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진다.




엄마의 오른쪽 어깻죽지에는 손가락 길이만한 흉터가 있다. 반 년 전 그 날 밤 엄마는 새삼스레 내 옆에 꼭 붙어 누워서 말했다.

"니 이 칼집 왜 났는지 궁금하다 그랬제."

"...뭔데 갑자기. 아버지 들어오기 전에 빨리 방에 가서 자라."

"니 완전 쪼끄맸을 때. 그 날 느그 아부지가 웬일로 열두시도 전에 집에 들어오드라고."

"엄마."

"그 날 동창회 간다 하고 나갔었그든. 근데 뭐가 쫌 기분이 상했는가봐. 쏘주병을 딱 손에 들고 오드라고. 그라드니 내한테 소리 소리를 지르는데, 내가 그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

"중졸인 년 데꼬 와서 밥 먹고 살게 해줐드니 남편 뒷바라지 하나도 제대로 몬하고 니는 뭐하는 년인데? 시궁창에 뒹굴거를 사람 살게 만들어놨드만 시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따먹을라 해도 맛도 없고 에라이 쌍년아, 이라드라고. 내한테."

"엄마 내 이 얘기 계속 들어야되나."


"내가 그 날 첨으로 대들었다아이가. 니가 쏘곤쏘곤 그래 이쁘게 자고 있는데 그 인간이 쌍스러운 소리를 해대니까 화가 나게 안 나게. 

그래갖고 손에 잡히는거 잡아던졌지. 그래봤자 휴지곽이지만서도.

그니까 지는 쏘주병을 탁 깨드만 내한테 달려들드라고. 걷어차이고 밟히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 때 그 인간이 쏘주병으로 내 어깨를 푹 찌른거아이가.

칼빵 맞은거는 그 때가 처음이지. 와, 아프드라."

"......."

"근데 있제, 인제 내는 못 참겠다. 그 인간이 죽든지 내가 죽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해야 되겠다."

"엄마. 내가 일해서 돈 모으고 있다 했잖아. 쪼금만 참으라고."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아 엄마에게 고함쳤다.

"평생 맞고 살았으면서 그게 하루아침에 되나. 엄마가 뭘 어떡할건데. 도망칠라면 진작에 도망쳤어야지. 이렇게 미련곰탱이처럼 살면서 내까지 힘들게 하지 말고!"

"...미안하다."

맞고 산 죄밖에 없는 엄마의 습관같은 사과에 정신이 들었다.

"엄마. 쫌만 기다려봐봐. 방법이 있다니깐."

엄마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그래, 우리 아들 믿어야지. 괜히 열냈네. 물 한 잔 주께. 먹고 자자."

엄마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건네준 물 한 잔 이후로 나는 여러 시간을 잠들어 있었다.




반 년 하고도 며칠 전 엄마는 집 근처 산을 오르다 웬 남자가 죽어있는 걸 봤더란다. 외지인은 모를 만한 저기 위 숨은 낭떠러지에서 굴렀다 싶은 모습이었다.

뭣하러 깡시골 사람도 없는 산에 와서 봉변인가 안타깝더란다.

그런데 엄마는 신고도 못하고 몇 십 분을 가만히 서서 냉한 시신을 바라보고만 있었단다. 순진한 엄마가 평생 해보지도 못한 나쁜 생각이 들어서였다.

남자는 아버지와 체격이 비슷했다. 얼굴을 깔아뭉개고 옷을 갈아입히면 그럴싸한 모양새가 된다.

매일 술 마시고 산으로 들로 쏘다니다 집에 들어와 처자식 두드려 패는 놈팽이에게 마을 사람들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깡시골 연고 없는 아버지의 장례는 조촐하다 못해 초라했다.

엄마는 남자를 곱게 화장해 옆 마을 바다에다 정성스레 뿌렸다. 평생 놓지 못할 죄책감에 엄마는 매일 밤 마당에 물을 떠놓고 기도했다.




잠을 깬 나를 눕혀놓고 엄마는 서랍장을 뒤졌다. 먼지 탄 청테이프를 꺼내 들고 방을 나가기 전 엄마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다 괜찮다, 아들. 다 끝났다, 우리 아들."

아버지가 이틀에 한 번 꼴로 집어들곤 했던 야구 배트가 마룻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났다. 

현관문이 닫히고 엄마는 몇 시간을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오래도록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나도 모르게 한 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엄마는 3개월 내내 어딘가에 다녀오곤 했다. 

하루는 내가 말했다.

"엄마, 나도."

"내가 니 손은 안 더럽힌다."

일주일 후 엄마는 커다란 냉장고를 집에 들여놨다. 그 날부터 엄마는 삼돌이에게 고기를 썰어주기 시작했다.

나는 엄마를 말렸지만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엄마가 살아온 세월을 감히 지레짐작할 수 없었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던 쓱싹 소리가 멈췄다. 엄마가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려나보다.

나는 방문을 열고 문지방에 서서 엄마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저 조그만 어깨에 세상 모든 죄악이 얹혀있다. 다가가 엄마의 가슴팍에 조용히 안겼다.

뒷문 유리창으로 삼돌이의 얼굴이 비친다. 검은 눈동자 속에선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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