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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천국의 무게
게시물ID : panic_881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여기봐
추천 : 14
조회수 : 1684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6/05/30 17: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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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번- 670번 앞으로 나오세요!"

남자는 갑자기 들려온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앗!"

밝은 빛이 그의 눈을 찔렀다.

남자는 차가운 대리석 의자 위에 누워있었다. 눈을 떠보니 온통 하얀색 대리석으로 지어진 거대한 홀이 보였다. 

둥근 홀 안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남자, 여자, 어린 아이, 백발의 노인. 황인, 흑인, 백인.

홀 한가운데 놓인 둥그런 단상위에 흰 옷을 입은 커다란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큰 목소리로 연신 번호를 불러대고 있었다.

"670번! 얘들아 빨리 빨리 움직여라. 얼른 670번 데리고 와!"

단상 위의 남자와 같은 옷을 입은 장정들이 사람들 사이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 순간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 몸을 웅크린 그는 이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이 벌거벗고 있었던 것이다. 부끄럽지만 부끄럽지 않은 묘한 기분을 느끼며 남자는 자신의 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는 방금 전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멀쩡한 몸으로 이곳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의 손등에 검은색 숫자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687]

그 사이 단상에 올라갔던 670번 꼬마아이는 장정의 손에 이끌려 홀 벽면에 줄지어 있는 수십 개의 문들 중 한 곳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문 위에는 하얀색 대리석을 깎아 만든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10]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대한 홀과 사람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는 끝도 없이 높은 천장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울거나, 혼란스러워 하거나, 얼굴 가득 웃고 있거나.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단상 위 남자의 외침이 들렸다.

"687번-!"

남자는 지체없이 단상으로 올라갔다.

단상 위 남자는 687번을 아래 위로 쓱 훑어보고는 손에 들고 있는 서류로 눈을 돌렸다. 서류를 읽어내려가며 그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687번에게 말을 걸었다. 

"일찍 오셨네"

"......일찍...?"

"그럼요. 하루에 죽는 사람만 몇 명인데."

"내가... 죽은겁니까?"

흰 옷의 남자는 기계적인 미소를 지으며 눈을 한 번 마주치더니 서류를 소리내어 읽기 시작했다.

"국적 한국. 성별 남자. 나이 28세. 사망 원인... 아이고. 사고를 당하셨네. 소득 수준... 흠, 힘들게 사셨구나. 고생을 많이 하셨네."

"나... 내가..."

"부모...는 돌아가시고. 동생이 하나 있네? 동생이 많이 어리네. 어릴 때 왕따. 흠... 사기도 당했고. 먹고 사는 게 많이 힘들었나봐요?"

"나... 아직은 죽으면 안되는데... 내 동생 어떡하라고요. 사...살려주세요. 내 목숨은 안 아까우니까 몇 년만 더 줘요!!"

"워워."

흰 옷의 남자는 진정하라는 손짓을 한 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한 번 죽은 이상 원래의 삶으로는 못 돌아가요. 일찍 받아들이는 게 여러모로 좋을겁니다. 그리고 기대하세요. 원래의 삶보다 죽은 뒤의 삶이 더 나을 수도 있답니다."

"......."

687번 남자는 그저 허공을 멍하니 바라봤다. 흰 옷의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687번께서는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서 계십니다. 살아 생전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셨네요. 음, 2명이나? 상당히 좋아요."

서류를 잠시간 더 훑어보던 흰 옷의 남자는 고개를 들더니 687번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자, 앞에 있는 원반 보이시죠? 위에 올라서세요."

687번 남자의 발 앞에는 사람 한 명이 올라설만 한 은색의 원반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발을 내딛었다.

그가 올라서자 원반 윗머리에 숫자가 나타났다.

[157]

"오호. 157년이라. 오늘 오신 분들 중 가장 높은 숫자예요. 축하드립니다.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으세요."

687번의 남자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본능적으로 홀 벽면에 가득한 문들을 쳐다봤다. 140과 160 사이, 150이 새겨진 문에 눈길이 갔다.

"이 곳에서 100년 이상의 인생을 제공받으신 분들께는 특별히 선택권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사느냐, 지금 바로 새 삶을 얻느냐."

"...무슨 말이죠. 여기는 도대체 어딥니까."

"천국. 내세. 저승. 부르고 싶은대로 부르세요. 이곳은 죽음 이후의 삶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당신은 이곳에서 157년의 삶을 허락받았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누리고 살 수 있습니다. 157년이 지나면, 당신은 새로운 모습으로 현세, 즉 이승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해가 되셨나요?"

687번의 남자는 머리가 어지러워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돌아가게 되어있어요. 그렇지만 당신에겐 선택권이 있습니다. 지금 바로 현세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이죠."

"......이해가 안 되는데요. 이곳이 천국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왜 다시 돌아갑니까. 나는 그 지긋지긋한 인생을 다시 살고 싶지 않습니다."

흰 옷의 남자는 슬며시 입술을 말아올려 미소지으며 말했다.

"지금 즉시 현세로 돌아갈 경우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원하는대로 세팅할 수 있습니다. 뭐랄까, 게임 캐릭터를 만든다고 생각해 보세요. 

당신은 누군가의 아이로 세상에 다시 태어나게 될 겁니다. 그런데 그 누군가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국적. 부모. 성별. 기본 옵션을 모두 다 당신 손으로 선택 가능해요. 

하지만 이곳에서 157년을 산 후 다시 태어날 때는, 선택의 기회가 없습니다. 무작위죠. 어때요, 이만하면 괜찮은 조건입니까?"

"......."

"지금부터 당신은 150번 문으로 걸어갈 겁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당신은 이곳에 남아있기를 선택한 겁니다. 그 전에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뭐...아니... 나는... 모르겠어요! 시간을 줘요!"

흰 옷의 남자는 고갯짓으로 단상 아래 장정을 불렀다. 장정은 687번의 팔을 잡고 150번 문으로 끌고 갔다. 

687번의 남자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천국... 내세... 현생... 풍족한 삶...

150번의 문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문에 다다르기 두 발짝 전, 687번의 남자는 손을 번쩍 치켜들고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지금 돌아갈게요!! 지금!! 내가 선택하겠다고!!!"

687번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단상 위의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리오라고 손짓했다.



"지금부터 선택가능한 옵션들을 보여드릴 겁니다. 원하는대로 선택하시면 됩니다. 단, 이 경우 당신의 본성은 바뀌지 않습니다. 외적인 조건들은 변하지만 당신은 당신일 겁니다. 이해되셨습니까?"

687번의 남자는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마음이 급했다. 

"알겠어요. 얼른 선택할 수 있게 해주세요."

흰 옷의 남자는 단상 위 조그만 책상 위로 서류와 펜을 내밀었다. 집중해서 서류를 살펴보는 687번에게 흰 옷의 남자는 질문을 던졌다.

"왜 지금 돌아가기로 선택하신거죠?"

"......."

687번의 남자는 말없이 펜을 들고 선택해나갔다. 선택을 끝낸 후 그는 흰 옷의 남자에게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지긋지긋하게 거지같은 인생말고, 제대로 된 인생 한 번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흰 옷의 남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687번을 한 번 쳐다본 후 눈을 내리깔고 서류를 읽었다.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읽은 그는 고개를 들고 687번을 다시 한 번 쳐다봤다. 그는 손을 들어 바로 맞은편에 보이는 검은색 문을 가리켰다. 

"저 문으로 가시면 됩니다. 행운을 빕니다."

흰 옷의 남자는 바로 고개를 돌리고 다음 숫자를 호명했다.

"688번-!"

687번의 남자는 몸을 돌려 검은색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11번-!"

남자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는 흰 대리석 바닥에 누워있었다. 밝은 빛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는 목을 움켜쥐고 발버둥쳤다. 잠시 후 그는 아무 느낌도 없음을 깨닫고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온통 하얀색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홀 안에 있었다. 그는 발가벗고 있었고 손등에는 검은색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12]

또 다시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12번-!"

남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쳐다봤다. 흰 옷을 입은 남자가 단상위에 서 있었다.

어느샌가 흰 옷을 입은 건장한 남자가 다가와 발가벗은 그를 일으켜 세운 뒤 단상으로 끌고 갔다.

"12번... 왔구만..."

"뭐... 뭐야... 당신 누구야... 나 방금.. 나 분명히......"

"오호. 한 번 오셨던 분이네. 보자..."

단상 위에 선 흰 옷의 남자가 손에든 서류를 읽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어 12번을 바라봤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12번을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랬어요?"

12번의 남자는 어리둥절해 그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제대로 한 번 살아보겠다더니... 이렇게 일찍 왔네."

"일찍...?"

"스스로 선택한 삶이면 스스로 버리지 말았어야지. 
 21살이라... 목 매다니까 어때요, 많이 아파요?"

"무슨..." 

흰 옷의 남자는 고갯짓으로 단상 아래의 건장한 남자를 불렀다.

"자살은 옵션이 없지. 스스로 무게를 내려놓고 왔으니 남은 게 있나. 이번엔 잘 해봐요."

12번의 남자는 건장한 남자에게 이끌려 단상 맞은편의 검은색 문으로 걸어갔다. 그는 발버둥치며 소리질렀다.

"뭐야!! 이거 놔!!! 뭔 소리야!!! 야!!!"

흰 옷의 남자는 단상 위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12번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번에도 힘들면 다시 와. 선택은 자유지...... 
 1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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