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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단편)레테
게시물ID : panic_882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엄지남친
추천 : 10
조회수 : 1036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6/05/30 23:3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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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레테

 

정신보다 한 발 먼저 깨질 듯한 두통이 날 반겨온다. 매일 아침 이런 식이다. 어젯밤에도 술을 먹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힘겹게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본다. 가장 먼저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채 곰팡이에게 잠식당하고 있는 벽지가 보이고, 천장 바로 밑에 붙어있는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 너머로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의 다리가 보인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다리, 레깅스, 청바지, 검은 스타킹, 커피색 스타킹, 꼬불꼬불한 털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굵은……. , 저건 뭐야.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잔뜩 구겨진 얼굴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낡고, 더럽지만 있을 건 다 갖춰진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실을 열었다. 컵 한가득 물을 따른 뒤, 냉동실을 열었다.

 

없다. 내 고기가 없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벌써 다 먹었을 리가 없다. 친구놈들 소행이 틀림없다. 찌꺼기만 처리해주기로 해놓고, 내가 잠든 사이 알맹이도 전부 다 가져간 것이 확실하다.

 

분노를 넘어 살의가 피어올랐다. 죽일까? 시야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아니야, 아니야. 친구를 죽여서는 안 된다. 그럼 찌꺼기도 내가 처리해야 한다. 그런 번거로운 일을 내가 직접 할 수는 없다. 빠르게 마음을 진정시켰다.

 

작은 한숨과 함께 후드를 꺼내 걸쳤다. 지금 씻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손질이 끝나면 더러워질 몸이니 한꺼번에 씻는 게 낫다. 거울을 바라보며 후드 밖으로 삐져나온 앞머리만 대충 정리했다.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냉장고 옆에 곱게 세워져 있는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섰다.

 

 

 

택시를 타고 OO구 달동네로 향했다. 사람이 사는 집인지, 비어있는 집인지 관심도 없는 동네일 뿐만 아니라 철거 예정이라 다른 달동네에는 서서히 생긴다던 CCTV도 이곳에는 없다. 사냥터로는 적격인 셈이다.

 

택시에서 내려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무 의욕 없이 웅크린 채 숨죽이고 있는, 그러나 싱싱하게 살아있는 초식동물의 냄새가 내 코를 두들겼다. 행복하다. 우선은 연기를 위해 몰입을 해야 한다. 나는 육식동물이 아니다. 너희와 같은 초식동물이다. OOOO152-7번지라고 적힌 포스트잇을 손에 쥔 채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비탈길을 올랐다. 영락없이 지금 막 이사를 온 초식동물 친구로 보일 것이다.

 

얼마나 올랐을까? 작은 공터가 나왔다. 이곳에 함정을 팔 것이다. 캐리어를 옆에 세워둔 채 털썩 주저앉았다. 바지가 더러워지는 것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이제 누군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때, 갑자기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모른 척 포스트잇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모퉁이에서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걸어왔다. 그때서야 고개를 들었다.

 

횡재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오랜만에 질기지 않은 야들야들한 고기를 먹을 수 있단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삐져나오려 했지만, 애써 틀어막았다.

 

저기……, 혹시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가 지금 좀 바쁜데, 일단 어디 봐요.”

 

그녀는 포스트잇을 건네받기 위해 다가왔다. 짙은 향수 냄새가 풍겨와 인상이 구겨졌다. 빨간색으로 염색한 긴 머리에 빨간 립스틱, 가슴이 다 드러나는 딱 붙는 원피스에 가디건을 걸쳤다. 화류계 여자인 듯싶다.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그녀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재빠르게 구겨진 인상을 편 뒤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가까운 곳이네요. 저를 따라오세요.”

 

나는 미리 챙겨놓은 벽돌로 아무 의심 없이 뒤돌아 걸어가고 있는 그녀의 머리를 내리쳤다. 가냘픈 그녀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

 

느닷없는 숨소리에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니, 7~8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두려운 표정으로 입을 막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를 지나 얼굴,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기까지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저런 애새끼한테 뒤를 잡힌 이 상황이 치욕스럽기도 하고, 즐거운 사냥시간을 방해당한 것이 열 받기도 했다.

 

나는 벽돌을 들고 조심스레 다가갔다. 아이는 겁은 먹은 채 주저앉아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래도 착한 녀석이다. 어미를 찾는답시고 뒤돌아 도망가지도, 시끄럽게 울어 재끼지도 않으니 말이다. 달아올랐던 몸이 식으며 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화장실로 들어와 캐리어를 열어 오늘의 사냥물을 꺼냈다. 평소와는 다르게 아이와 여자라서 구겨 넣으니 간신히 두 마리 모두 들어갔었다.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보니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먼저 향수 냄새가 진득하게 배어있는 여자부터 빨리 씻기기 위해 입에 붙여놓은 테이프와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었다.

 

냄새가 너무 심해 얼른 옷을 벗겨 한쪽 구석으로 집어던졌다. 알몸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아무 감흥은 없었다. 호랑이는 토끼와 사슴 같은 동물하고는 짝짓기를 맺지 않는다. 나는 샤워기를 틀어 얼굴을 향해 물줄기를 뿜어냈다. 여자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더니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당황스러운 것이리라. 지금부터가 하이라이트다. 육식동물의 우리에서 눈을 뜬 초식동물의 반응은 언제 보아도 흥미롭다. , 이제 나를 즐겁게 해줘.

 

하지만 여자는 행동은 내 예상을 빗나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에도, 샤워기를 들고 눈을 빛내고 있는 내 모습도 그녀에게는 아무 충격을 주지 못한 듯, 아이에게 기어가 입에 붙은 테이프를 뜯어냈다.

 

꼬마야, 꼬마야!”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어 아이의 몸을 흔들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머리채를 쥐어 잡았다. 그녀는 비명도 지르지 않은 채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이는 살려주세요.”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돼요?”

 

돼요, 아주 잘 돼요. 원하시는 만큼 제 몸을 탐하셔도 좋고, 죽이셔도 좋아요. 도망치지도 않을 것이고, 소리치지도 않을게요. 제발 아이만은 살려주세요.”

 

내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빠르게 내뱉어대는 말을 듣고 있자니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아는 화류계 여자들은 오만하고 방자하고 자신밖에 모르고 돈만 밝혀대는 알기 쉬운 족속들이다. 그런데 이 여자의 행동은 마치 새끼를 지키기 위해 두려워하지 않고 몸을 날리는 어미의 모습이 아닌가.

 

이 꼬마, 아는 사람이에요?”

 

아뇨, 몰라요.”

 

그런데 왜 자신을 바쳐가면서까지 구하려고 하는 거예요?”

 

여자는 처음으로 시선을 회피하며 입술을 질겅거렸다. 나는 아직까지도 뿜어져 나오는 샤워기를 껐다. 정적. 불편하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불편하다. 고개를 한 번 흔들어 생각을 지운 뒤, 캐리어 안에 담겨 있던 칼을 꺼내 들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을 바라본 여자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동생! 먼저 떠난 제 동생이 딱 저 정도 나이였어요. 동생은 잃었지만, 저 아이만은 살리고 싶어요.”

 

그랬군요.”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며 대답해준 뒤, 아이의 심장을 찔렀다. 칼이 살을 파고들어 가는 기분 좋은 손맛을 느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서열은 육식동물인 내가 위인데, 자꾸 저 여자에게 끌려가는 듯한 내 모습에 기분이 나빴다. 그 바람에 별미인 어린아이의 염통을 훼손시켰지만, 나의 위엄을 보여 줬으니 문제없다. 그녀는 힘겹게 기어와 아이를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아이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그녀의 알몸을 적셨다. 문득 생리라는 단어가 머리를 스쳐지나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꼴이 우스웠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미안해, 미안해. 가람아 미안해.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 , 내 눈앞에서 아이가 죽어 나갔어. 이번에도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미안해. 가람아 미안해. 아이야 미안해. 내 잘못이야. 이번에도 내 잘못이야.”

 

그녀는 횡설수설 알 수 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뭐가 미안한지, 왜 그녀의 잘못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곳이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자신이 왜 옷을 벗고 있는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망설임 없이 아이에게 다가간 여자였다. 그리고 아이의 죽음. 자신의 가슴에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끌어안고 정신을 놓아버린 듯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다.

 

나는 곧 그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눈물. 이제껏 살려달라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은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것도 자신과는 일면식도 없는 아이를 위해 흘리는 눈물.

 

새빨갛게 적셔진 타일과 그녀의 하체, 그곳에 떨어지는 여자의 눈물. 한 방울, 한 방울 눈물이 떨어질 때마다 피의 색깔이 옅어지는 것은 내 착각인가?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연해져 가는 피의 색깔만큼 내 마음도 모두가 읽어버릴 듯 투명해질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나는 천천히 다가가 칼을 높이 들었다. 그런데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여자는 부릅뜬 두 눈을 내 눈에 맞췄다. 빨갛게 충혈된 그녀의 눈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있었다.

 

이 악마, 쓰레기, 살인마, 정신병자, 싸이코새끼! 너 같은 게 왜 아직까지 살아있는 거야. 지옥에나 떨어져. 죽어! 죽어버리라고!”

 

손이 떨려왔다. 어째서 죽음을 앞에 두고 이렇게 강한 모습을 보이는 거야. 도대체 왜. 이제까지는 항상 1명씩만 사냥해왔었다. 그들은 모두 살려달라고,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여자는 다르다. 2명이라 그런가? 초식동물도 뭉치면 육식동물에 대항할 용기를 얻는 건가? 머리가 이상해져 버릴 것 같다.

 

그대로 칼을 내리꽂았다. 여자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허물어졌다. 피가 얼굴에 튀어 지저분해졌지만, 지금 내 머릿속만큼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문이 열리고 친구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나는 사냥을 하고, 이들은 찌꺼기를 처리해주는 대신, 나에게서 고기를 일정량 받아간다. 일정량. 그렇다 일정량이다. 갑자기 오늘 아침 비어있던 냉동실이 생각났다. 한마디 쏘아붙일까 생각했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식탁 위에 부위별로, 취향별로 알맹이를 분류해놓았다. 이들의 몫이다. 내 몫은 없다.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친구들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더 이상의 사냥은 없다.”

 

동요하며 웅성웅성 거릴 것이라는 내 생각과는 달리 이들은 굉장히 담담했다. 마치 내가 이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반응. 혼란스럽다.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들은 머리를 감싸 안고 있는 나를 향해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각자의 할당량을 챙기고는 찌꺼기를 챙겨 집을 나섰다. 그들은 모두 비소를 머금고 있었다. 뭐지? 마치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두통이 몰려왔다. 입술을 깨물며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참은 채 무언가에 이끌리듯 침대로 다가갔다.

 

 

 

정신보다 한 발 먼저 깨질 듯한 두통이 날 반겨온다. 매일 아침 이런 식이다. 어젯밤에도 술을 먹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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