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팬픽] 빙과 - 진로上
게시물ID : animation_2698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추천 : 3
조회수 : 57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9/21 12:28:07
방과 후 반에 남아서 갱지에 글씨를 끄적이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그다지 낯설지만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내 맞은 편에 앉아 특유의 웃음을
빙글빙글 굴리고 있는 사토시의 모습 또한 반갑지는 않지만 참으로 익숙한 모습이었다.
"
이걸로 벌써 세번째려나?"
 
"뭐가"
 
"방과 후에 이렇게 앉아 머리를 굴리는 모습 말이야"
 
몇년이고 지켜봤지만 별 필요 없는 곳에서 잠재력을 발휘하는 기묘한 녀석이다. 단순히 기억력이 좋다고 여길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대상이 사토시였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어물쩍 넘길 생각이야 호타로?"
 
이번에 기입해야 하는 주제는 앞으로의 진로이다. 확실히 부활동 가입, 신입생으로서의 각오 따위 보다야 성의를 담고 써야할 주제임엔 분명하나
그 이유 때문에 내 신조를 잠깐이나마 무시할 거리도 아니었다. 애초부터 내가 열의를 담는 것은 오로지 스스로 정한 신조를 지키는 것 뿐이었다.
머리를 싸매서 그럴싸한 답을 제출하더라도 내 진로가 그 쪽으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도 하고 말이다.
 
"뭘 기대하는 거냐"
 
사토시도 그런 이유 때문에서인지 이번 만큼은 내가 조금의 열의를 가지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한데, 택도 없는 소리다. 아니, 이 녀석이라면
일종의 인사치례랄까, 겉으로만 기대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분명하다.
 
"역시 그거구나"
 
갱지에 휘갈겨 쓴 '공무원'이란 글자를 보고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진로 작성은 긴 작문 필요 없이 대충 생각한 직업의 이름만
써주면 그만이었지만 너무나도 간단한 나머지 기억에서 잊혀져 버리고 말았다. 전에 썼던 다른 주제들 보다 진중해야 하는 게 객관적인 시선이었지만 정작 답을 어떻게든 기입하기로 마음 먹으면 가장 쉬워지는 아이러니한 주제다.
 
"먼저 부실로 가 있을게. 천천히 와"
 
"잠깐"
 
그렇게 짤막하게 헤어지려던 순간, 나는 일순에 든 호기심에 사토시를 불러 세웠다. 녀석이라고 대단한 직업을 썼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말이다.
 
"넌 여기에 뭐라고 썼냐"
 
사토시는 구레나룻 부분을 긁적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너하고 똑같아"
 
...그럼 그렇지. 그래도 사토시 딴엔 나와 다르게 제법 고민한 다음 내놓은 답이었을 것이다. 물론 녀석이 공무원 따위를 진정 원할 일은 없을 것이다.
데이터 베이스가 품고 있는 고유의 딜레마가 빚어낸 보류로서의 의미가 강한 답일 것이다. 
 
"부실에서 보자 호타로"
 
사토시는 먼저 인사를 하며 등을 돌렸다. 나도 그에 따라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교무실에 들러 용지를 반납한 뒤 계단을 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난 어른이 되면 어떤 일을 하면서 살고 있을까. 고등학생이 된지 벌써 1년이 가까워져 가고 있지만 그런 생각을 가져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건 아마도 미래의 직업에 대한 고민이 내 신조인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면 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이라면 간단하게'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업이란 건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자연히 주어지는 물건 같은 게 아니다.
 
가장 좋아하거나 자신 있어 하는 일을 발견하고 그것을 남들에게 내세울 정도로 다듬고 나서야 가질 수 있는 것.. 이라고 누나는 설명했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신조를 지켜 나가는 건 알량한 자존심 보다는 나태함과 안도감에 가까운 것 같았다. 특출난 점은 없지만 모난 점도
없기에 결국은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고 주위의 어른의 충고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마음가짐을
고수하는 것을 보면 이는 오레키 호타로의 인간상을 단편적으로 드러내는 모순과도 같았다. 끝끝내 이렇다할 결론도 내지 못 하고 부실에 다다랐다.
문이 닫겨 있음에도 소리가 새어 나오는 걸 보면 부원 전원이 모여있는 게 분명했다. 문을 여는 순간 시선이 쏠리는 건 감안해야 될 것 같았다.
 
드르륵
 
"어 호타로, 왔어?"
 
"아, 오셨군요. 오레키씨"
 
"...."
 
넉살 좋게 반기는 사토시, 공손하게 인사하는 치탄다, 날카롭게 노려보는 이바라, 개개인의 성격이 충실히 반영된 환영들이다. 나 또한 오레키 호타로 답게 무심히 인사를 건네며 남은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안 그래도 아까 일에 관한 걸 얘기하고 있는 중이었어"
 
... 사토시 녀석, 진작에 지뢰를 깔아 놓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치탄다는 눈을 번뜩이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엔 대체 무엇이 이 아가씨의
호수에 파문을 일으켰을까.
 
"오레키씨!"
 
"ㅁ,뭐"
 
"오레키씨는 장래에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으신가요?"
 
사토시 쪽을 돌아보았다. 사토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직 네 얘긴 하지도 않았어. 마침 그 얘기를 꺼낼 참 이었는데 직접 와주니 치탄다 입장에선 고마울 따름일 걸"
 
그렇다면 얘기는 더욱 귀찮은 쪽으로 진행된다. 내가 없던 자리에서 사토시가 말해줬더라면 치탄다는 그렇구나 하고 넘어 갈 수 도 있었겠지만 상황은 완전 정반대가 되어버렸다. 일단 후속 질문이 있을 것이라는 걸 당연한 전제로 깔고 치탄다의 질문에 대답하기로 했다.
"공무원"
 
"그렇군요..."
 
치탄다는 납득하는 말투를 하면서도 낯빛은 여전히 평소의 오색빛깔 호기심을 담고 있었다. 치탄다의 성격 상 어째서냐는 질문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기사 어째서 그 직업을 가지고 싶냐고 묻는 건 언뜻 들으면 그 직업과 그 직업을 가지기를 소원하는 자를 비하하는 것 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뭐, 어찌 됐건 더 이상의 질문이 없으니 내 입장에선 고마울 뿐이다. 
 
"...어째서?"
 
치탄다가 기세를 꺾었기에 안심했지만 잠자코 있던 이바라가 치탄다가 하고팠던 말을 대신 꺼내 주었다. 이바라의 표정은 예상 외의 말을 던진 것
치곤 크게 바뀌지 않았다. 날카로움이 빈정거림으로 바뀐 정도라면 적당한 비유가 될려나
 
"그야 가장 적당한 직업이니 말이다. 어느 방면이든지"
 
"가장 둘러대기 좋은 직업이어서가 아니라?"
 
이바라의 양눈이 뾰족하게 좁혀졌다.
 
이바라는 유감 없이 제 말솜씨를 발휘했다. 날을 제대로 벼린 이바라의 말솜씨에 난 그 예리함에 제대로 베인 듯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그래. 오레키, 네가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이유는 그런 것 밖에 없겠지"
 
솔직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넌 뭐 때문에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한거냐?"
 
일단 대답은 해줬다만 이바라의 평소답지 않은 행동에 의아함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마야카도 진로에 대해서 꽤나 고민했던 것 같아"
 
이바라가 해야 할 말을 사토시가 대신해 주었다. 날 바라보는 이바라의 평소의 표정과 다를 게 없었지만 이바라도 제법 고민을 많이 했다는 사토시의
말에 괜스레 무안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너는 어떤 직업을 선택했냐"
 
"만화가.."
 
자신 없이 우물쭈물 대답하는 걸로 봐선 이바라 또한 자신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서 있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라기 보다는 이바라도 보류의
의미가 강한 선택을 둔 것으로 보인다.
어느 누가 감히 자신의 미래를 확신할 수 있겠는가. 이바라는 그저 이바라 자신이 가장 흥미를 가지고 있고 약간의 실력도 가미된 분야의 직업을
선택한 것 뿐일 것이다.
 
"정말로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건 아니야. 그나마 만화는 내가 남들 보다 잘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쓴 것에 가깝지"
 
"그렇다면 너나 나나 선택에 있어 그 의미가 다른 건 아니지 않냐"
 
"아니, 근본부터가 다르지. 오레키, 넌 그저 변명하기 위한 대답을 기입했겠지만 우리는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을 기입했어. 우리가 네 선택에 대해
뭐라 할 수는 있어도 오레키, 고민하지 않은 너는우리가 내린 선택에 평을 내릴 수 없어"
 
참으로 이기적이란 생각이 드는 말이었지만 일리도 있는 말이었다. 직업 의식에서 조차 신조를 지키는 내가 고민 끝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내린
이들에게 왈가왈부 할 권리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라는 것은 그 모범생인 치탄다 조차 보류를 택했다는 말이 되는 건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음으로서 이바라의 말에 동의하는 것으로 한 다음 치탄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치탄다는 내 시선에 당황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가만히 있지를 못 했다. 고개를 빳빳이 쳐드는 당당한 태도를 바란 것도 아니지만 지금 오가고 있는 이야기에 있어선 치탄다가 나 보다 앞서
있다고 봐도 좋았다. 겸손을 떠나서 자기비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넌 뭐라고 적었냐"
 
"담임선생님께서 적지 못 한 학생들은 내일까지 제출하라고 말씀하셔서... 전 아직 기입하지도 못 했어요"
 
반을 맡는 담임에 따라 학교생활이 달라진다더니 그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닌 모양이다.
 
치탄다의 경우엔 특유의 호기심 가득한 면모가 부각 되어 가끔씩 잊기도 했지만 학업적으로도 우수하고 다른 방면에서도 보통 이상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팔방미인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치탄다는 소위 사토시가 말하는 자릿수가 올라가는 4대 명가의 장녀이기도 했다. 이를 테면 치탄다에겐 미래의
진로에 대한 선택권이 여기 이 자리에 있는 누구 보다 다양하게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바라의 말마따나 내가 고전부원들의 진로에 대해 가타부타할 권리도 이유도 없었고 설사 물어 보았다 치더라도
그랬다간 끊임 없는 질문의 연쇄가 시작될 것 같았다. 침묵을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가방 속에서 페이퍼백을 꺼냈다. 솔직한 심경으론 지금
흐르고 있는 공기에 질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취해야만 하는 행동이었다.
 
 
-------------------------
일단은 써보고 후회하잔 느낌으로 써봤습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