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중에서
신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정당하게 해주는 가치라든가 질서를 우리 앞에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나 뒤에서나 확연한 가치의 영역속에서 어떤 정당성이나 변명도 설명해낼수가 없다. 우리는 자유로우며 고독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를 선고 받은 셈이다. 사람은 스스로를 창조한 것은 아닌 까닭에 선고를 받는 것이오, 세상에 한번 내던져지자 그가 행동하는 모든 것에 책임이 있는 까닭에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 그는 감정의 맹위를 믿지 않는다. 그는 하나의 열정이 숙명적으로 그것이 하나의 구실이 될 수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존주의는 또한 이땅 위에 볼 수 있는 어떤 표적 속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표적을 판독하는 것이라고 실존주의자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사람이란 아무런 의지도 도움도 없이 매 순간 인간을 창조하도록 선고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퐁주는 자신의 훌륭한 글에서 "사람은 사람의 미래다"라고 말했다. 확실히 옳은 말이다. 다만 거기서 미래라는 것이 하늘에 쓰여 있고 신이 그것을 안다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미래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인간이 어떤한 인간이든 간에 만들어야 할 미래, 그를 기다리는 무구한 미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말이 옳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사람은 고독하다. 고독이라는 것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예를 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환경에서 나를 만나 보려고 찾아온 내 제자의 경우를 인용하고자 한다.
그의 아버지는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지고 또 친독적 경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의 형은 1940년 독일군 침공시 살해된 터라 이청년은 조금 원초적인, 하지만 갸륵한 생각으로 형의 원수를 갚고 싶어 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변심과 형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 있었다. 어머니는 그에게서밖에는 위안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당시 청년은 영국으로 출발해 자유 프랑스군에 가담하든가, 즉 어머니를 포기하든가 혹은 어머니 곁에 머물러 생황을 돕든가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는 어머니가 자기 하나만을 의지해서 살고 있으며, 그의 실종, 아마도 그의 죽음이 어머니를 절망에 빠지게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한 결국 구체적인 의미에서 그가 출발하고 투쟁하기 위해 취할 모든 행동이 모래에 물을 붓는 격일지도 모르며, 아무 소용 없는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르는 애매한 행동인 반면에 그가 어머니를 위해서 하는 행동은 모두 뚜렷한 반응이 있는 행동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예컨대 영국으로 떠난다면 스페인을 통과하다가 스페인 당국의 난민수용소에 무기한 체류하게 될지도 모르고,또 무사히 영국이나 알제리에 도착해서도 사무실에 처박혀 펜이나 놀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완전히 다른 두 가지 행동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하나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지만 개인만을 위한 행동이요, 또 하나는 무한정적으로 광범한 전체, 즉 국가 전체를 위한 행동이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애매함을 면할 수 없고, 도중에 중단되어버릴 수도 있는 행동이었다.
동시에 그는 두 가지 종류의 모럴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공감에서 오는 모럴, 즉 개인에 대한 헌신이며, 또 한편으로는 더 광대하나 효과가 의심스러운 모럴이었다. 양자택일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누가 선택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까? 기독교의 교리였던가? 아니다, 기독교 교리는 남을 불쌍히 여기라, 이웃을 사랑하다, 남을 위해서 그대를 희생하라, 가장 어려운 길을 택하라 등등의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어떤 것이 가장 거친 길인가? 전사나 어머니 가운데서 누구를 형제처럼 사랑해야 하는가? 막연하지만 전체 속에서 투쟁하는 것과 명백하게 하나의 확실한 존재의 생활을 돕는 것, 그 어느 것에 더 큰 효용성이 있을까? 누가 그것을 선험적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 아무도 하지 못한다. 규정되어 있는 어떤 모럴도 그것을 말할 수는 없다. 철학의 모럴은 결코 타인을 방법으로 여기지 말고 목적으로 취급하라고 말한다. 좋은 말이다. 만일 내가 어머니 곁에 있다면 나는 어머니를 방법이 아닌 목적으로 취급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로 인해 나는 내 주위에서 투쟁하는 이들을 방법으로 취급할 위험성이 있다. 또 거꾸로 내가 투쟁하고 있는 동지들에게 합세한다면 나는 그들을 목적으로 취급하게 되어 그 사실로 인해 나는 어머니를 방법으로 취급할 위험을 무릎쓰게 된다.
가치라는 것이 막연한 한, 또 그것들이 명확하고 구체적인 경우에 비해서 너무나 광범한 것인 한, 우리는 우리의 본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그 청년이 시도하려고 한 것이다.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그렇게 말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감정입니다. 어느 것 하나를 택하고 싶습니다. 만약 모든것, 즉 복수와 행동과 모험의 욕망을 희생할 만큼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느낀다면 나는 어머니 곁에 머무를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나는 출발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감정의 가치는 무엇이 만들어내고 있었던가? 그것은 그가 어머니를 위해서 머물러 있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즉 나는 얼마만큼의 돈을 그에게 바칠 수 있을 만큼 어떤 친구를 사랑한다고. 그러나 그런 말은 그런 일을 해야만 할 수 있는 말이다. 또 내가 어머니 곁에 머물렀다면 어머니를 위해서 더 머물러 있는 만큼 나는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그 애정을 인정하고 정의할 만한 바로 그러한 행동을 해야만 나는 그 애정의 가치를 결정할 수는 있다. 그런데 이 애정이 나의 행동의 정당성을 이 애정에서 요구하고 있으니 나는 해결할 수없는 쳇바퀴 속에 끌려들어가고 만다. 한편 지드는 이를 위선적인 감정과 거의 구별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어머니는 곁에 머물러 내가 어머니를 사랑한다고 결정하는 것과 연기를 해서 어머니를 위해 머무르는 건 거의 같다.
다시 말하면 감정은 우리가 행동을 함으로써 형성된다. 그러므로 감정에 따라 행동을 이끌어갈 수는 없다 그것은 바로 행동을 허용하는 개념의 설명을 어떤 모럴에 요구할 수도 없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적어도 그는 충고를 받으려고 어떤 선생을 찾아간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목사의 충고를 바란다면 독자는 그 목사를 선택할 것이며, 결국 어느정도 그 목사가 충고하려던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충고자를 택하는 것, 그것은 또한 자기 자신을 앙가제하는 것이다.
그 증거로 독자가 기독교 신자라면 "목사님께 의논하시오"라고 독자는 말하리라. 그러나 목사 중에는 부역 목사도 있고, 기회주의 목사도 있고, 애국적 항쟁 목사도 있다. 어느 목사를 택할까? 그런데 그 청년이 항쟁 목사를 택하거나 부역 목사를 택한다면 벌써 그는 그가 받게 될 충고의 종류를 결정한 것이다. 이처럼 나를 보러 오면서 내가 하려던 충고를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또 나는 충고할 단 하나의 대답밖에는 할 수 없었다.
즉 당신은 자유요, 선택하시오, 다시 말하면 창조하시오...라고. 할 바를 지시하는 어떠한 보편적인 모럴도 존재할 수 없소. 세상에는 아무런 표적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