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물들도 산고를 느낍니다. 출산 중에 죽는 동물들도 다수 있습니다. 산고로 눈물을 흘리는 동물들도 있습니다.
2. 답변이 안 됩니다. 기도와 식도의 입구가 하나인 것과 예수가 세상죄를 지고 대속했다는건 연결시킬 필요 전혀 없습니다. 신이란 존재는 속죄를 위하여 희생양이 필요하다는건데 미련하기 짝이 없는 답변이 됩니다. 현 조직신학에서는 사라진 기독론입니다.
3. 4 .. 모릅니다.
5. 창조설을 신앙적으로 믿는것에 반대하지 않지만 창조설이 과학인것 처럼 말씀하시는건 곤란합니다. 아니 현대 과학을 송두리째 부정하시는겁니다. 꼬리뼈라는 명칭이 그냥 붙여진 이름이라는건 교회의 주장이지 과학적 주장은 아닙니다. 어른이 되면 여러개의 꼬리뼈가 하나가 됩니다. 퇴화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지만 진화의 과정중 파생된 결과물인 것은 확실합니다. 꼬리뼈없이 직립보행이 가능하냐 이런 질문은 굳이 안 하셔도 됩니다. 꼬리뼈는 분명 남아 있으니까요.
6. 7 .. 모릅니다.
8. 죽음의 근거가 성서 뿐인가요? 성서 자체를 긍정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는데도 말이죠. 생명체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극히 자연스러운 생명 활동입니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지구가 수용할 수 있는 생명체는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섰을 겁니다. 자연의 순환을 교회의 견해만으로 부자연스럽게 몰고가면 안 됩니다.
뒷 부분 질문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죠.
1. 종교심이라는 표현보다는 종교에 대한 "신앙"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것 같습니다. 원시적 신앙은 기본적으로 기복신앙입니다. 극복할 수 없는 힘에 대한 경외감과 산출물들, 사냥감이나 풍년에 대한 기원 같은것에서 출발합니다. 진화론 안에서 신앙의 발생도 가능합니다. 인간의 생각하는 힘, 사고는 진화의 결정체입니다. 그 사고라는것이 풍족한 삶, 안락한 생활, 불안한 내일에서 내세에 이르기까지 됩니다.
포이에르바하는 도리어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할 지경에 이르렀고, 그런 신에게 니체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진화론과 신앙은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사고가 극도로 발전할수록 신앙과 종교 역시 발전했으니까요. 종교를 가진 동물 본적이 있으신가요? 끊임없이 새로운 종교가 발생하는것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시나요? 신도 역시 계속되어 창조되고 계속 소멸하나요? 당신이 답변하려고 생각하는것 역시 인류가 진화해온 결정적 증거가 됩니다.
2.. 모릅니다.
3. 인간이 먹는 과실은 지극히 일부분입니다. 다양하다는데 의견에는 반대입니다. 인간이 섭취할 수 있는 과일 수가 수백개 되나요? 그런데 식물이 맺는 과실 또는 열매는 그 식물 수에 가깝습니다. 또한 그 열매는 식물의 번식과 직접 연관됩니다. 특정 꿀새는 특정 식물의 꽃만의 꿀만 섭취하고 꽃가루를 옮깁니다. 특정 벌새가 사라지면 특정 식물도 사라집니다. 도리어 창조설에 위배되는 이야기죠. 왜냐하면 생명의 멸종이라는건 창조행위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이 등장하기 이전 조르주 퀴비에는 처음으로 멸종생물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지금은 멸종이 그다지 충격적인 단어는 아니지만 하늘나는 먹이시고 들에 핀 꽃도 입히시는 하나님이란 분위기가 팽배했던 18세기에 이 단어는 교회와 성서에 반기를 드는 행위였습니다.
도토리를 제공하는 떡갈나무, 졸참나무는 도토리를 열매로 맺는데 도토리를 땅위에서 새싹이 거의 자라지 않습니다. 다람쥐가 겨울내 먹으려고 땅 속에 감추고 일부 도토리를 찾아 먹지 않아야 싹이 맺게 됩니다. 이런 공생 관계가 과연 창조되었다고 보시나요? 외래종 때문에 토산종이 죽는건 어떤가요? 다 자연에 맞게 창조되었는데 함께한다고 한쪽이 전멸하는것도 인간만의 책임인가요? 왜 호주에만 캥거루나 주머니 쥐같은 유대류 생물들이 사나요? 비슷한 기후인데 아메리카 대륙에는 사자, 호랑이나 코끼리는 없을까요? 그렇게 창조되어서요? 아니면 특정 대륙에서 멸종해서 일까요?
4.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친절을 베푸는 이타적 행위가 비진화적인가요? 아니면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을 유지하는게 더 진화에 어울리나요?
친절과 호의, 이러한 이타성과 스스로를 지키려는 이기심은 이율배반이 아니라 진화하면서 만들어진 사회성의 일부일 뿐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전쟁을 해서 애국심이 높은자 용기있는자는 먼저 죽었습니다. 타인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은 그 후손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비겁하고 용기없는 자들은 생존률이 더 높았는데도 도리어 사회는 유지되고 발전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기적이기만 했던 사람들의 이기적인 지성만 남았나요? 아니면 이타성이 유지되고 교육되고 계승되었나요?
이 질문은 사회심리학, 진화생물학, 진화 인류학, 인간 행태학, 사회 생물학, 진화 심리학을 깡그리 부정하는 질문이 됩니다. 도킨스의 저서들 읽어 보시고 반론을 펼칠 수 있다면 한국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할지도 모릅니다.
5. 인간의 보육 기간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긴건 위에 언급한 사회 심리학, 인간 행태학 사회 생물학 등을 통해서 증명된 부분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보다 지식을 보존하고 전달하는데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행동양식을 보통 교육이라고 하죠?
태어나서 몇 시간만 뛰어나가서 풀 뜯어먹고, 헤험쳐서 플랑크톤을 먹는 동물들에게 교육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생을 유지하려는 본능만이 있을 뿐이죠. 그런 동물들에게 있어서 지식의 축적과 전달같은건 없습니다. 도리어 보육기간이 길면 길수록 지식 전달에 유리하고 개미나 벌보다 훨씬 월등한 사회성을 갖추게 됩니다.
영장류와 일부 포유류를 제외하면 태어나자마자 경쟁자가 되고 필요하다면 형제, 자매도 잡아먹습니다. 거미 새끼는 어미 거미를 먹이삼아 태어나고 암사마귀는 교미 후에 숫사마귀를 잡아먹어립니다. 사회라는건 원시적인 형태로 개미와 벌에게 존재하고 그보다 뛰어난 사회라는것은 오직 인간에게 존재합니다.
즉, 인간은 동물들이 본능에 의지해서 살아가기보다 양질의 본능을 충족하면서 동시에 개체를 유지하는데 유리한 사회를 구성하게 됩니다. 사회가 더욱 분화되고 발전하면서 보육기간이 더더욱 늘어나고 있습니다. 남자구실만 하면 장가가고 여자는 회임할 수 있으면 시집가서 애를 낳았습니다. 지금은 반대가 되어서 거의 30년간 교육하고 양육합니다. 나날이 발전하는 인간인데 더 늦게 결혼하고 더 오래 교육합니다. 왜 그럴까요? 왜 더 많은 시간과 재화를 들여서 교육하고 길러서 더더욱 늦게 아이를 낳을까요? 과연 창조설로 이게 설명이 됩니까? 도리어 진화를 긍정할 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