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호랑이가 담배피고 이천수가 오노 세레머니를 하던 시절.. 그 오래전 사람들은 어떻게 인터넷에서 자료를 얻었을까?
안녕하세요. 뀨뀨입니다. 오늘은 아주 오래전,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에 있던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바로 '와레즈'입니다. 와레즈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소한 친구들도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웃기게도 같은 20대 중반이지만 이용해본 친구들보다는 안해본 친구들이 더 많은, 어떻게 보면 매니아적인 성격을 가졌던 보물창고라고 칭하고 싶네요. 그럼 지금부터 이와 관련된 글을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와레즈의 정의란 뭘까?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매일경제 단어사전에서는 이런식으로 정의 내린적이 있다.
한문장으로 요약하자면, [ 정품 소프트웨어를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곳 ] 이다. 그리고 그 목적에 부합하여 각종 게임, 유틸리티, mp3 등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와레즈란 건 IT강국 한국에서 시작된건 아니다. 사실 언제부턴지도 모르지만 외국에서 도입된걸 우리나라의 선지자들(?)이 모방하여 창궐하기 시작한다. 이쯤이 대략 2000년 쯤이었고, 전성기는 01년에서 03년 사이로 기억된다.
예를 들어보자면 와레즈 사이트 중 하나였던 럭키월드의 2012년 하루 방문객 수는 보통 10만명 안밖이었다. 필자 역시 접속했던 기억이 있어서 생생하게 기억난다. 당시 아마추어 수준으로는 꽤 방대한 양의 사이트 운영으로 기억된다.
이처럼 와레즈가 떠오르게 된 이유는 DJ정부의 인터넷PC 보급 사업과 더불어 56K모뎀이 사라지고 ADSL이 동시에 보급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대멀티캡, 세진컴퓨터랜드, 주연테크, 현주 컴퓨터, 컴마을, 용산전자상가조합, 멀티패밀리 정보산업, 성일컴퓨텍, 세지전자, 엘렉스 컴퓨터, iDOM엑스정보산업, PC뱅크까지 총 12개 업체가 입찰권을 따내서 대대적으로 신문에 홍보도 때렸던 기억이 난다. 당시 Personal PC는 세진컴퓨터랜드가 세종대왕, 박찬호 시리즈로 우세하던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모니터 제외 99만 9천원대의 PC가 보급되니 용산의 조그만 상가에서 시작해서 200개가 넘는 전국 지점을 두었던 세진컴퓨터랜드는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2000년에 파산하고 만다.
[ 현대멀티캡 신문 광고. 우리집은 셀러론 433MHz짜리를 구입했었다. ]
[ TV CF중 한 장면. 무려 1997년의 송혜교와 김국진. ]
이렇게 무럭무럭 가정마다 PC가 한대씩 보급될 무렵, 한국통신(현 KT)에서 56K 모뎀의 2배 속도인 IDSN을 주력사업으로 밀며 종량제로 돈을 쳐먹고 있을 때, 1999년 하나로통신(현 SK브로드밴드)에서 8Mbps 속도의 '하나포스'를 토대로 ADSL사업을 Start-Up 하게된다. 한국통신은 부랴부랴 '메가패스'라는 브랜드네임으로 스티붕 유를 모델로 기용하며 동참하게 되었고 두루넷도 ADSL서비스를 런칭하며 초고속인터넷 시장의 출발점을 함께하게 된다.
이같은 변화는 우리나라 인터넷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종량제에서 정액제로 인터넷 모델 자체가 변천하며 월 3만원대로 무제한 용량을 업로드&다운로드 하게 된다. 이전에 전화비 폭탄을 맞던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인터넷 모델이었다. ADSL을 바탕으로 고용량 자료들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쉐어웨어와 데모버전이 난립하던 시기도 바로 이때가 시발점이었다. 56K 모뎀 시절에도 마찬가지지만, 요상한 구조로 다운로드 속도를 획기적으로 늘려주었던 FlashGet이 인기를 끌기도 했는데...
[ 이런식으로 네모난 구슬들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면서 오래 참았던 오줌을 싸는 희열과 동급의 기분을 느끼기도... ]
이와같은 바탕들 덕분에 2000년부터 와레즈의 역사는 비로소 '정식적으로' 시작되었다. 날개달기, 삼국지, w.a.r.e.z(짱와레즈, 현 짱공유닷컴), 야쿠르트, 해적단 등의 여러 와레즈가 있었지만
[ w.a.r.e.z 와레즈. 전체적으로 녹색톤과 돋움 폰트가 아직도 기억난다. ]
[ 해적단와레즈. hjd.wo.to가 주소였던걸로 기억된다. ]
하루 히트수가 가장 많고 가장 유명했던걸로는 꼬께네와 럭키월드를 빠뜨릴 수 없다.
[ 꼬께네와 럭키월드 전성기 시절. 꼬께네는 지금봐도 참 멋진 대문이 인상적이다. ]
일단 대문 디자인이나 전체적인 레이아웃상으로도 어린 나이에 일반 사이트 중 가장 멋지다는 생각을 했었다.
[ 네이버가 이러던 시절의 이야기다(...) ]
보통 당시 유행하던 게임은 FIFA 01나 FIFA 한일 월드컵, 파랜드택틱스, 편의점(감마니아에서 나온..), 롤러코스터 타이쿤, 토니호크 프로스케이터.. 같은 게임들로 기억된다. 와레즈로 대중화된 게임의 최고봉은 리볼트나 GTA2가.. 나 뭐 이런.. 크랙들은 해외에서 다 퍼와서 포함시켰던 것 같고.. 당시는 게임의 용량이 10기가, 20기가 이런게 아니라 작게는 수십메가에서 많게는 1기가를 넘기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ms.kr같은 아무개 초등학교 공개게시판이나 공공사이트에 awepojfapofaj같은 제목으로 업로드를 해놓고 짤릴때까지 다운받는 방식이었다. 속도는 빠른편은 아니었다. 짤리면 다른 곳에 올리고, 또 짤리면 다른곳에... 아직도 기억나는건 포토샵 6.0같은 경우는 크랙을 깔고 폴더를 압축해서 올리기만 하면 작동이 되던 시절이다(...) 어도브에선 이렇게 될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아마도? 유틸리티는 포토샵 6.0, 나모웹에디터가 가장 인기였고 영화도 종종 올라왔다. 유명한 것만.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이런거. 당시 동영상 플레이어는 사사미가 짱먹었었고.. 아드레날린이 그 자리를 꿰찼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한 Windows XP가 릴리즈 되기 전에 휘슬러라는 코드 네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아이디스크같은 웹폴더(웹하드가 아니다. 웹폴더!) 에 분할 rar파일로 r00, r01, r02... 이런식으로 60몇개까지 쪼개서 업로딩 하면 그걸 2박 3일동안 받아서 2박 3일동안 힘들게 힘들게 설치해서 기어코 구동을 시켜본 기억도 있다. 근데 PPPoE 무한오류로 인터넷이 안되서 눈물을 머금고 Windows 98로 회귀를 했던 기억이.. 킁.
곁다리 이야기로 필자는 당시 초딩이었는데 안티ADSL 같은 클럽을 운영하면서 한국통신 어르신들을 빡치게 한 적도 있다. 나름 회원수가 300명이었다(...) 메가패스 망하라는 서명 운동같은것도 선동하기도 했는데, 무려 100명에 가까운 서명을 받아낸 적도 있다. 크크크 그러자 한국통신에서 사람을 보내줘서 우리집 메가패스는 뻥뻥 뚫리게 되었다. 그래서 클럽을 폐쇄했다(...)
어디서 서비스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슈퍼보드'라는 지금의 제로보드 위상급의 무료게시판 공급 업체가 있어서 너도나도 그걸 썼던걸로 기억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와레즈 공급에 1등공신이 되었던 슈퍼보드(...) 지금 봐도 디자인이 촌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왜 제로보드를 쓰지 못했냐면, 당시 웹에 친숙하지 않던 운영자들이 mysql를 사용한 제로보드를 설치할 줄 몰랐기 때문(...) 제로보드를 노프레임으로 제작할 줄 안다면 당시 회사 취업은 껌이었... 정도는 아니고 와레즈 부운영자 정도는 금세 꿰찼을 것이다. 그리고 무료 호스팅업체에서 제공해주는 계정에는 mysql를 제공하지 않았기에 무료 웹게시판이었던 슈퍼보드가 더 유명세를 탔다.
필자는 하루 방문자 2~3만정도 되는 와레즈에서 부운영자로 기생했는데, 초딩이라는걸 숨기고 유틸리티 게시판을 담당하였다. 운영자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잠수를 타자, 호스팅을 받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고 있던 필자가 당시 허접하기 짝이 없는 html코딩 실력으로 나모웹에디터를 사용해 1980년대 웹페이지 디자인과 UI로 리뉴얼을 해버렸고, 2달 사이에 방문객이 1/10수준으로 줄어 2000~3000명을 왔다갔다 하다가 운영자가 돌아와서 꼬라지를 보고 당장 짤리고, 사과문을 게시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 와레즈는 어차피 망했다(...)
[ 2001년 12월 02일 당시 모 와레즈 메인. 땅벌레는.. 초등학교 6학년이던 필자닷. 거럼 이만의 패기. 그 이후로 명줄은 조금 잡긴 했다. ]
재밌게 보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수업시간이 다가와서 일단 절단을 하도록 하겠습니다.(죄송) 2편은 오늘 저녁이나 내일 쓰도록 하겠습니다. 크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