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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
게시물ID : phil_88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정당한사유
추천 : 3
조회수 : 2622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4/04/29 11: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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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 착하다는 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
아주 오래전부터 선과 악이라는 개념이 있었다.
혹자는 선과 악이 태초부터 존재한 영고불변의 진리라하고 또다른 혹자는 인간이 서로 공존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회계약과 같은 개념이라 말한다.
무엇이 맞는 말일까?

종교를 말할 때 선과 악은 빠질수 없다.
모든 종교는 하나같이 사람들에게 선하게 살 것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예수는 박애를 주장하며 원수를 사랑하라 하였고. 심지어는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까지 내주라 하였다. 이에 더 나아가선 타인을 사랑하고 자신을 희생하면 천국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에 관한 이야기는 조금 뒤에 하도록 하자. 한편 붓다는 자비를 주장하며 위로는 항상 진리를 추구하되 아래로는 항상 중생들을 도울 것을 말하였다.
그렇다면 왜 성자들은 선을 베풀 것을 그토록 강조하였는가?
당연히 그러할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했지 않겠는가?

필자는 선(善)을 삶의 목표에 이르는 필수 요소라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어릴적부터 형성된 자아에 집착함으로써(아집) 무의미한 삶에 의미를 두고 끝없는 욕심을 탐하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기에 고통스러워한다. 그것이 삶의 전부임으로 착각하고 우물안 개구리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허상 뿐인 자아라는 틀 안에 갇혀 탐욕과 번민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이러한 챗바퀴 같은 고통스런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이러한 고통의 근원인 '자아'를 죽여야하는데, 그렇다면 그 자아를 어떻게 죽이느냐 하는 고민에 빠지게된다. 그러한 고민에 대한 해결책을 바로 성자들은 '선'으로 제시한 것이다.

조금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이전에 썼던 글을 다시 인용하자면,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처음 태어났을 때 '나'라는 개념을 갖고있지 않다. 아기는 자신의 엄마와 일체감을 형성하며 타인과 자신을 구분짓지 않는다. 세상이 자신이고 자신이 곧 세상인 셈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마치 '바다같은 일체감'과 같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아이는 점차 성장하면서 이 현실적인 세상에서 모든 충동과 욕구가 즉시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세상으로부터 점차 자신을 독립시켜 자아를 형성한다. 이렇게해서 어릴적부터 형성되어 계속 자라온 것이 바로 '나'이며 '자아'인 것이다. 이 '나'는 '자아', 또는 '에고'로 불리며 우리의 삶을 끝없는 터널로 밀어넣는 악의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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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렇게 세상과의 일체감으로부터 독립해 자아를 형성하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난다. 이는 결별에 대한 불안감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개인이 결별과 의존성, 죽음의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원초적인 상실감을 부인하는 동시에 ‘바다’같은 일체감‘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 나머지 인생 과정이다.

그리고 성자들은 친절하게도 어리석은 중생들이 이 '바다같은 일체감'을 되찾도록 그 길을 제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첫번째로는 모든 고통의 근원인 '자아'를 죽일 것을. 그리고 두번째로는 그 자아를 죽이는 방법으로써 '선'을 행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선은 방어적이고 부드러우며 평화롭고, 온화하다. 반면 악은 공격적이고 파괴적이며 거칠다. 선의 특징은 서로간의 유대감을 키우고 서로의 공감을 형성하도록 만들지만 악의 특징은 서로에게 분노를 부채질시켜 더욱 분리시키고 서로에 대한 이질감을 키운다. 또한 선은 '자아'에 집착하기보단 '자아'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악은 '자아'에 집착하는 경향이 심하다.
이를테면 누군가로부터 모욕을 당한 경우, 용서와 같은 선의 행위는 자신보다는 타인에게 초점을 맞추지만 복수, 보복과 같은 악의 행위는 오로지 자기자신에게 초점을 맞춘다.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선은 자아를 거스르는 것이고 악은 자아에 영합하는 것이다. 용서는 자아를 거스름으로인해 순간은 고통스러울지 몰라도 정신적으로 더 나은 단계로서의 진보가 가능하지만 복수는 그 순간 자아를 만족시킬 수 있을진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남는 것은 없다. 오히려 복수는 또다른 복수를 불러오며 서로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증오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쇄적 반응으로 나타나 더욱 더 자아에 영합하며 공격적으로 변한다.

기독교는 희생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있는데, 희생은 온전히 자신을 버리고 타인을 위할 때 이뤄진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자아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고, 이것은 깨달음. 즉, 삶의 진리에 가장 가깝게 이르는 숭고한 행위인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희생과 조건없는 사랑은 바로 이런 '나'를 죽이는 것을 바탕으로한 숭고한 삶의 진리적 행위인 것이다.
이정도까지 말했으면 불교는 말할 것도 없겠다.
어쨌든. 필자가 생각하는 선의 개념과 의도는 이러하다. 태초부터 존재해온 영고불변의 진리에 이르는 길, 그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선이다.
영고불변의 진리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으로서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진리에 이르기 위해 밝혀낸 방법이 바로 선인 것이고 이와 대립하는 것이 바로 악인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선과 악을 단순히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사회계약으로 치부하기보다는 영적 진화로의 수단으로써 인식하는 것도 꽤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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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 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마태복음 7장 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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