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한열사 조금 많습니다..ㅋㅋ하지만 보면 아마 엄청 놀라실꺼에요...제가 하도 책을 안봐서 그런지 몰라도 전 처음 보는거거든요...한열사를 활동하면서 역사도 조금씩 알게되엇지만...도통 우리나라는 국사라는 과목이 아주 매우 비인기 과목이기때문에...ㅡ 정부에서 우리나라 문화를 전통적으로 보존하려면 국사라는 과목을 살리는 작은 하나라도 큰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고려때의 개경도 추정인구 50만에 외국인 타운이 존재할정도로 국제적인 무역도시였습니다만, 신라 서라벌도 그에 못지 않게 대단했습니다. 8세기 전세계 4대도시는 콘스탄티노플, 장안, 바그다드, 그리고 신라 서라벌이었습니다. 아래는 제가 '우리 고구려 바로알기, 해나라 (
http://haenara.net )' 에 올린 신라 인구 관련 글입니다.
제가 글솜씨가 없어 역사스페셜의 내용을 정리하여 올립니다. 삼국유사는 신라의 전성기 때 수도에 17만 8936호가 있었다고 적고있습니다. 보통 1호를 5인으로 잡는데 이대로 17만 8936호를 계산하면 90만정도의 인구가 됩니다. 현재 울산광역시의 인구가 100만 정도임을 감안하면 천년 전 경주에 90만명이 살았다는것이 선뜻 믿기지 않을것입니다. 하지만 끝자리 수까지 세세하게 밝혀놓은 기록을 쉽게 무시할수도 없습니다. 신라시대에 과연 인구조사를 저렇게 철저하게 했겠냐는 의문이 들겠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일본 동대사 정창원에 소장된 신라 촌락 문서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 문서에는 당시 인구가 연령별로 정확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심지어 가축의 숫자까지 상세히 적어놨습니다. 이 시대에 이미 치밀한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삼국사기에보면, 영흥사에 화재가 나 민가 350채가 한꺼번에 불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주택 밀도가 매우 높았다는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신라에서는 신분에 따라 집의 크기를 제한하는 법령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삼국사기 옥사조에 진골은 24척, 6두품은 21척, 5두품은 18척, 4두품 이하는 15척을 넘지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는 택지 면적을 규제할만큼 인구가 증가했다는 뜻입니다. 집터 규모를 알 수 있는 동천동 지역을 근거로 당시 경주에 몇명정도가 살 수 있는지 추산해 볼 수 있습니다. 가로 14m, 세로 20m 집터에 집 3채가 있었으니 8000평 규모의 방(坊)에 150채 정도의 집이 들어설 수 있습니다. 360방으로 환산하면 약 5만 4000가구, 27만 정도의 인구가 살 수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당시 경주는 360방보다도 넓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해주는것이 고분입니다. 왕릉이 생활공간 안에 있는것이 신라 수도의 특징입니다. 축조될 당시부터 이미 도시 범위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6세기 이후 왕릉은 360방의 범위를 벗어나 외곽에 자리 잡게됩니다. 도시가 그만큼 외곽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경주에는 도시의 경계가 되는 나성이 없는 대신 수도 방비를 위해 쌓은 산성이 있습니다. 경주의 산성은 축조시기에 따라 3단계로 나뉩니다. 가장 바깥쪽의 산성들이 후대에 쌓은것입니다. 경주에서 동남쪽으로 21킬로미터쯤 가면 울산시와 경계가 되는 관문성이 나옵니다. 722년에 쌓은 이 성은 경주의 3단계 산성 가운데 하나로, 왜군을 차단하고 신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이 관문성을 경주의 동남쪽 경계로 삼았다고 전합니다. 신라 경주는 360방을 훨씬 벗어난 지역까지 확장되었고 그 범위는 시, 군이 통합된 현재의 경주시와 거의 일치합니다. 이렇게 확대된 도시의 외곽지역에도 사람이 살았다는것을 경주 경마장 부지 발굴현장의 집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기둥구멍과 보조 아궁이, 무덤과 집터, 숯을 굽던 가마터 20기가 발굴되었는데 전국에서 발견된 가마터가 40기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가 집중되어있는 것입니다. 이정도 된다면 기록에서 정확히 밝혀놓은 90만명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아래는 신라 왕경도입니다.
------------------------------------------------------------ 조선 후기의 한양 인구가 20만인것을 볼 때, 그로부터 1000년 전의 도시 인구가 100만이란것은 정말 대단한 수치인것입니다. 하지만 신라는 단지 인구만 많은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위의 왕경도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는 대단한 계획도시였습니다. 우선 천년 전 신라인이 걸었을 길은 집과 집 사이로 반듯하게 나 있습니다. 또한 골목마나 출입문이 있어 치안상태도 좋았던 것 같습니다. 서라벌은 몇번째 골목, 몇번째 집 하는 식으로 주소만 알면 집찾기도 매우 쉽게 되어있습니다. 집터에서는 아궁이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숯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미 신라시대의 풍로가 출토된 바로 미루어 실내에선 온돌 대신 풍로를 놓고 숯을 피워 난방을 했으리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숯을 때면 매캐한 냄새가 나지 않고 그을음도 생기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의 주거환경은 상당히 쾌적했던 것 같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서라벌에는 집에 금을 입힌 금입택이 30채나 되었다고 합니다. 배수시설도 완벽히 되어있었고 일정한 간격으로 수십개의 우물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또 당시 신라의 도로는 인도와 마차가 다니는 차도로 나뉘어있었습니다. 그 도로는 규격별로 나뉘어있었고, 길을 지나다니는 마차의 폭도 고구려의 예를 들어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서라벌은 도시 전체가 바둑판 모양으로 정리되어있었습니다. 이는 고구려도 마찬가지로서 우리나라 계획도시의 역사는 이미 1500년이 넘은것입니다. 많은 분들께서 '역사' 하면 조선을 떠올리며 그 이전의 시대는 조선보다 못했을거라고 넘겨짚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조선보다 훨씬 번영했고 자유로웠던 모습이 있었습니다. 제가 갖고있는 옛 건축물들의 사진을 첨부하며 이만 끝내겠습니다.
고려시대 개경의 거리입니다. 아시겠지만 고려시대 개경에는 알라딘 궁전같은 이슬람 사원과 아라비아 타운도 존재했습니다.
바둑두는 고려 귀족들 입니다.
5세기 고구려 안학궁성. 대동강에서 발견된 길이 375m 폭 9m의 초대형 다리를 지나면 판석으로 포장된 도로가 안학궁 남문까지 쭈욱 이어져있었습니다.
백제 미륵사입니다.
신라 황룡사입니다. 저 목탑은 높이가 86m쯤으로 추정되며 현대의 아파트 30층 높이에 달합니다. 이정도입니다. 감사합니다. 참고로 제가 활동하는 해나라 (
http://haenara.net )에서는 고구려를 비롯한 우리역사에 대한 많은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고구려 소설과 만화등으로 유명합니다. 해나라에서 연재된 '강철의 열제' 라는 퓨전 판타지 소설은 많은 호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