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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속에서의 사유
게시물ID : panic_885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판토텐산칼슘
추천 : 15
조회수 : 92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6/06/15 2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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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계처럼 정확한 건 아니지만 일상이란 게 어제와 비슷한 시간대에 움직이게 되잖아? 학생이 등교를 하거나 직장인이 출근하면서 매일 엇비슷한 시간대에 나가는 것처럼 말야. 그렇게 살다보면 매번 마주쳐서 통성명 없이도 얼굴이 익숙한 사람들이 있기도 하고.

 

내가 자주 마주치는 사람은 젊은 남자였어. 처음엔 매번 얼굴을 보니까 낯이 익어서 잘 보인다고 생각했지. 근데 자꾸 얼굴을 볼수록 기묘한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비슷한 사람들을 세워놔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특유의 느낌이 생기더라구. 친구들에게 털어놓으니 연상남과의 썸이냐면서 꺅꺅거리길래 관뒀어. 자주 보는 게 엄청 대단한 것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잊혀지겠거니 싶었거든.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니까.

 

오늘도 인파 속에서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데 시야 한 구석에 그 남자가 잡히더라. 무슨 일을 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아침마다 꾸준히 나오는 건 대단한 거 같아. 굳이 저 남자가 아니더라도 모두들 대체 어떻게 생활하는 걸까? 나는 매일 매일 일어나는 게 고역인데. 오늘도 끝까지 누워 있다가 엄마한테 이불도 뺏기고 잔소리만 잔뜩 들었거든. 밥도 못 먹어서 배고픈데 이따 매점에서 간식이라도 살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홱 들었어. 어라 아직도 빨간불? 고장 난 거 아니야? 이러다 늦으면..으 오늘은 아무래도 샛길로 가야겠다. 괜히 바닥을 툭툭 치고 있는데 앞 사람이 움직였어. 나도 급하다고 서둘렀는데 멀찌감치 그 남자가 걸어가고 있더라. 키 큰건 역시 부럽네 나도 더 커야 다리가 길어지고 그럼 빨리 걸을 수 있을 텐데. 아무래도 안 되겠어. 매점에 가면 우유를 사자. 성장통이 사라진 지 꽤 지났지만 혹시 모르잖아? 저 사람정도는 아니더라도 더 클 수도 있지! 한가로운 생각을 하면서 건물 뒤를 돌아 들어갔어. 바로 앞엔 외길로 뻗은 샛길이 있었고 쭉 가면 학교 뒷문이랑 이어지거든. 딱 골목길에 들어가려는 순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어. 일단 멈췄지. 누군가한테 말하면 비웃음을 살 게 틀림없지만 지금 내가 이 길에 들어서면 후회할 거란 생각이 들었어. 왤까, 대체 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지? 내가 왜, 무엇 때문에 이 상황에서 주춤거리고 있는 걸까? 그래,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너무 혼란스러워서 머리를 짚었어.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자. 지금 저 길에 들어가지 않으면 100프로 학교에 늦어. 그러니까 가야해. 그쪽을 향해 발을 들었는데 등 뒤에 소름이 돋아서 더 이상 앞으로 걸어갈 수 없었어. 학교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공포가 나를 휘감았지. 머리 한켠에서 작은 내가 속삭였어. '살해당할 거야.' 아니 누구에게? 되물을 새도 없이 그 골목길을 지나쳤어. 앞서 있던 그 남자가 힐끔 뒤를 보려는 기색이었거든. 어휴 깜짝이야. 나쁜 짓 한 것도 아닌데 오늘 왜 이래 진짜.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는데 다른 의미로 또 불안해지더라. 항상 골목길로만 들어갔어서 골목길을 지나친 지금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모르겠거든. 조금 희망찬 생각을 해볼까? 위기를 기회로 새로운 지름길을 찾을 지도 몰라! 여긴 어디로 통하는 곳일지 주변을 둘러보면서 걸었어. 아앗! 계속 들어가니까 벽이야. 어떡하지? 어떡하긴 되돌아가야지. 눈치는 보이더라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런데 막상 위험한 자리를 피하고 나니까 이런 생각도 들더라. 만약 내가 과민 반응하는 거면 어쩌지? 길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자주 보는 얼굴인데 오해받았다는 걸 알게 되면 민망해질 거 같고. 여기 잠깐 있다가 움직일까? 이러고 있으면 학교는 어떡하지? 온갖 생각이 드는데 정작 도움 되는 의견은 하나도 없고. 벽에 비친 내 그림자도 나처럼 혼란스러운지 머리가 점점 길어지다가 새로운 머리가 솟아나더라. 두근두근, 하는 소리가 귀 옆까지 다다른 것 같네. 생각해보니 심장은 아까부터 달음박질 치고 있었어.

 

 

그리고 나는 눈을 떴지. 이불 속이야. 그간의 일상, 내가 좋아하는 길과 그 남자 모두가 꿈이었던 거야. 몸이 무거워서 눈만 감았다 떴어. 어슴푸레한 빛을 보니 아직 새벽이야. 후아, 심장이 아직도 뛰는 거 같애. 불안해서 다시 잠을 못 자겠더라 꿈이 이어질까봐. 잠도 깰겸 곰곰이 생각을 했어. 나는 왜, 길에 들어가려는 찰나 남자에게서 위협을 느꼈을까? 그 이후엔 별별 생각이 다 들어서 갈팡질팡 했지만 딱 그 순간만큼은 확신했었거든.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고 깨달았지. 있잖아 그 남자, 종종 마주쳤다고는 했지만 횡단보도가 끝이었어. 횡단보도를 건너고 나면 길에서 겹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거든. 단 한 번도.

그걸 우연이라고 쳐도 골목길의 분위기가 이상했는걸. 샛길에서의 그 남자,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그 뒷모습이 작아지지도 않았어. 외길에서 자연스럽게 아주 천천히, 느긋하게 제자리를 걷고 있었던 거야. 거기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골목길에 다가섰을 때 나지막한 콧노래가 들렸어.

 

한참이 지나도 그 흥얼거리는 소리는 잊혀지지 않을 거야. 낮은 목소리에 중간 중간 끼어들던 거친 숨소리. 음울한 음표가 괜히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지. 그래, 지금 들리는 것처럼.

 

 

출처 제가 꿨던 꿈을 좀 각색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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