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 동성애는 그 자체가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이 취향의 문제뿐만이 아니더라 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이다. 동성애가 윤리적으로 잘못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동성애를 억압하는 근거는 이성애가 ‘정상’이라는 하나의 틀로 인해 가능해진다. 하지만 그것은 애초에 인간의 본질이 실존에 우선한다는, 즉 인간의 자유에 앞서 인간이 ‘어떠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당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우리가 동성애가 과연 인간의 자유의 성취인지 아니면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의 상실인지에 대한 진실의 여부를 알아내려면 이처럼 더욱 깊은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만 한다. 이것은 철학의 본질적인 문제로써, 과연 인간을 초월하고 인간이 어떻게 존재해야만 하는지 알려주는 ‘진리’ 가 존재하는지, 아니면 진리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성취함으로써 자신의 진리를 창조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나는 수많은 동성애 옹호자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그들의 논거는 이러하다,
“역사상 개인의 윤리와 종교적 강령이 어떻게 인간의 자유를 침해해왔는지는 자명하다.”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 과연 그 개인의 윤리와 종교적 강령이 ‘진리’였는가? 그들의 논변은 확고한 논변이 아니다. 그들의 논변은 마치 양치기 소년이야기를 보는듯 하다. “이제까지 진리를 말하며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려 한 사람들은 다 틀렸기 때문에 앞으로도 그런 사람은 받아들여선 안된다”.
그들의 주장은 두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역사상 그러한 강령-예를 들어 십자군 전쟁, 혹은 나치- 이 인간의 삶을 해쳤기 때문에 틀린 것이라는 것은 ‘삶을 해치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틀렸다는 생각에서 나왔다고 본다. 하지만 이 해친다는 것이 매우 애매하다. 동성애 반대론자들이 말하는 것이 동성애자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이지만, 이것이 사실은 그들의 본래적인 모습 즉 동성애가 ‘치유’될수 있는 가능성을 근거로 해서 말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애초에 인간의 삶을 ‘해치는’것으로써의 동기와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같은 논변을 들어서 반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사 동성애를 치유한다는 것이 하나의 환상에 불과할 지라도, 그 동기 자체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즉 실제로 동성애가 치유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동성애는 인간의 자유의 실현인가는 다시 본질과 실존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이지, 위와 같은 반박으로 반박될만한 것이 아니다.
둘째로, 그들의 주장에는 숨겨진 전제가 있으며, 그것은 위에 말한바와 같이 인간이 진리를 만들어 나가고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욱 위험한 것은 애초에 그들은 그들이 그러한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역사상 개인의 윤리와 종교적 강령이 어떻게 인간의 자유를 침해해왔는지는 자명하다.” 라는 것이 하나의 또다른 도그마 혹은 강령인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위에서 지적한 철학적인 문제가 해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 자체가 가지는 설득력으로 인해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의 가능성 자체가 봉쇄된다.
그들은 적어도 이성적이라면 동성애의 문제또한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자세를 가져야만 한다. 나는 기독교인 으로써, 인간을 초월하는 진리의 존재를 믿고, 또한 다른 사람들은 수긍하지 못하겠지만 신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경험한 사람으로써 인간의 ‘본래적인’ 모습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물론 이것을 이성적으로 증명해낼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우리가 이성적이라면 본질이 실존에 앞서있는지, 혹은 실존이 본질에 앞서있는지에 대해서 말하려면 신중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것이 동성애의 문제에 적용될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