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BGM] 우리는 준비 없이 온다
게시물ID : lovestory_886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2
조회수 : 25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9/10/30 08:38:19

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d-LvJ7Orhgg






1.jpg

김진기솔잎 바늘

 

소나무 아래 앉아 시집을 읽고 있는데

눈이 자꾸 글을 벗어난다

그때 가을바람 한 무리가 지나가면서

책장 위에 무엇인가 툭떨어뜨린다

바늘이다

어릴 적 할머니가 쓰시던 눈에 익은 그 바늘

끝은 아직 뾰족하다

밤마다 남폿불을 밝히고 내 양말을 깁던 할머니

그때마다 내 뒤꿈치도 따끔거렸지만

머릿속은 실타래처럼 풀려

글이 저절로 눈 속으로 들어왔다

바늘 끝이 환했다

할머니의 바늘을 책갈피에 꽂고

시집을 읽는다

시가 눈에 들어온다







2.jpg

고영민동행

 

 

 

길가 돌멩이 하나를 골라

발로 차면서 왔다

저만치 차놓고 다가가 다시 멀리 차면서 왔다

먼 길을 한달음에 왔다

집에 당도하여

대문을 밀고 들어가려니

그 돌멩이

모난 눈으로

나를 멀끔히 쳐다본다

영문도 모른 채 내 발에 차여

끌려온 돌멩이 하나

책임 못 질 돌멩이를

집 앞까지 데려왔다







3.jpg

정현종준비

 

 

 

우리는 준비 없이 온다

욕망은 준비 없이 움직이므로

시작은 그러했듯이

평생의 일들은 한번도

제대로 준비된 적이 없다

물론 또한

경황없이 떠날 것이다






4.jpg

김필규묶는다는 것

 

 

 

우리 아부지는 짐을 잘 묶는다고 동네에 소문이 났었다

일제강점기 공출 낼 때 벼 가마니 묶는 일로 아부지는 마을에 불려 다니셨다

아들녀석 객지 공부하러 나갈 때 부치는 짐도

부자(父子)의 인연만큼이나 팽팽히 묶었지만

부쳐온 짐을 내가 풀 때는 한 가닥만 잡아당기면 풀어지도록 했다

 

그러나 정작

당신의 생에 얽힌 묶임과 매듭은 끝내 풀지 못하고 가신 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시신을 묶는 일은

그렇게 짐 잘 묶는 당신이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몸을 내어 주고 아무 말 없이 맡겨 두었었다

짐은 단단히 묶는 일도 중요하지만 풀 때 쉽게 풀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우리 아부지를 묶은 매듭

저승에 가서 쉬 풀었는지 모르겠다







5.jpg

이태수구름 한 채

 

 

 

구름 한 채 허공에 떠 있다

떠 있는 게 아니라 거기 단단히 붙들려 있다

한참 올려다봐도 그 자리에 그대로다

풀 것 다 풀어 놓고 클 태()자로 드러누워

꿈속에 든 건지미동조차 없다

 

아무리 끌어당겨도 아득한

내 마음의 다락방이 유독 큰 저 집

눈을 감았다 떠 보면

새들이 불현듯 까마득하게 날아올라

허공을 뚫고 있다

구름을 날카로운 부리로 마구 쪼아 댄다

 

그분은 이 한낮에도 캄캄한 마음

다듬이로 두드려 구김살 펴 주고

주름들을 다림질해 준다

나도 모르는 허물들마저 하나씩 지우면서

그중 유별나게 깊이 파인 영혼의 골을 메운다

궁륭 같은 골에 날개를 달아 준다

 

하지만 내가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구름 한 채 무참하게 이지러진다

며칠째 두문불출내가 구들장을 지고 있는

우리 집창 앞까지 낯익은 새들이 날아든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새들은 저희끼리 목청을 가다듬고 있다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