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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고 푸른 바다가 세차게 밀려와 바위에 몸을 부딪친다.
빠르지는 않지만 가볍지만도 않은, 오히려 둔중하고 억센 그 힘을 증명이라도 하듯 해안가의 바위들은 온통 여기저기 파여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시커먼 파도가 바위와 만나 요란스럽게 포말을 만들며 주변을 새하얗게 물들여간다. 그 와중에도 티가 나지 않는 이유는 짙은 안개가 그득히 주변을 메우고 있는 까닭이다.
마치 채색되지 않은 도화지들로 가득 메워진 모습마냥 주변은 온통 하얗게 물들어 주변을 환하게 물들이고 있었으나, 그 백색 광휘 안에서 보이는 것은 정작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간간히 회백색으로 물들어 하얀색임에도 어두컴컴한 느낌을 주기까지 했으니 아이러니하다.
“진짜, 지금은 배가 안 뜬다니까!?”
“오빠! 나 집에 당일치기로 다녀온다고 했단 말야! 어떻게 자고가 나 아빠한테 맞아죽어!”
젊은 커플 두 쌍이 인적 없는 조그마한 선착장에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그 중, 머리를 노랗게 물들인 커플이 언성을 높여가며 다투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커플은 조용한 편이었고, 노란 머리의 커플들 싸움을 연신 불안해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뻔할 노릇이었다!
남자는 자고 가자고 하고, 여자는 집에 가겠다고 한다.
결국 여자가 져주거나, 남자가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오빠가 다 전화 돌려봤어, 오늘은 이 섬에 우리 데려다준 배 빼고는 들어오는 배가 없대.”
“누구한테 전화했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새벽에만 배가 들어왔다 나가고 하루종일 배가 없다는게 말이 돼!?”
물론 남자는 전화를 돌려 본 일이 없다.
애초에 오늘은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었고, 200일이 조금 지난 연애기간 동안에 채 못나갔던 진도를 쭉 빼고 싶었던 노란머리 남자의 욕망만이 보였다.
그의 가방 안에는 당일치기 여행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양주 두 병과 짙고 독한 향수, 그리고 콘돔들이 들어있었다.
“저기, 일단 배가 오는지 안 오는지 확실히 알아야 하니까… 시청 번호 알아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부터 물어보자….”
검은머리 남자가 노란머리 커플에게 넌지시 말을 건넨다.
그의 패기 없는 모습에 노란머리 남자는 기가 찬다.
“야, 여기까지 와서 모범생 놀이 하실라구? 아, 왜 그러냐 진짜. 응?”
검은머리 남자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조용히 쏘아붙이는 노란머리 남자.
그 모습에 노란머리 여자가 비아냥댄다.
“왜 애꿎은 사람은 건드려! 돌아가고 싶다잖아! 여기서 자고가고 싶은거 오빠 뿐인거 알아?”
“와아아아!! 답답해 미치겠네!! 진짜 배 안 뜰거라니까! 내 말 좀 믿고 민박집 들어가서 짐 풀자 좀!!”
남자는 억울하다는 표현을 온 몸을 이용해 격정적으로 보여준다. 머리를 쥐어짜며 온 몸을 비튼다. 검은머리 커플은 그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혹스러워 하나, 정작 같이 싸우고 있는 노란머리 여자는 그 모습이 싫지만은 않은 기색이다. 드문드문 보이는 입가에 씰룩거림.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이 역력한 노란머리 여자의 모습. 그렇다고 집에 가겠다는 단호함을 누그러뜨린 것은 아니지만…….
통 통 통 통 통 통 통 통 통
멀리서 익숙한 엔진 소리가 들려온다.
짙은 안개를 가르고 소리부터 모습을 드러내오는 그것은 여태껏 한 사람 빼고 모두가 기다렸던 여행의 종착지였다. 바다의 짠내 물씬 나는 소금기를 잔뜩 머금고, 예전에는 나름대로 말쑥했을 그 모습을 잃어버린 채 색이 바래버린 한 척의 낡은 배.
그 배에서 새까맣게 그을린 피부의 훤칠한 남자 하나가 로프를 들고 나오며 말했다.
“육지로 가실 분 들이예요? 금방 섬 나갈 거니까 육지로 가실 거면 빨리 타세요.”
남자는 두 커플에게 행선지를 물으며 로프를 선착장 쇠말뚝에 칭칭 감아 배를 고정했고, 노란머리 여자는 노란머리 남자에게 그 쌜쭉한 눈을 고정했다.
“배 안 온다며, 다 물어 봤다며. 솔직히 말해봐. 안 물어봤지?”
“어후, 들켰네. ㅋㅋㅋㅋㅋ 미안.”
익살스럽게 너스레를 떠는 노란머리 남자에게 마저 화는 내지 못하고 그렇게 누그러진다. 일행도 피식피식 웃고, 이제야 난제가 해결됐다는 생각에 절로 농담도 나왔다. 바로 배를 타겠다는 생각에 내려놓았던 가방들도 나름대로 챙겨들어 추스르고는 배 주인의 출발신호만 기다리게 되었다. 당일치기 여행을 생각하고 싸 온 가방임에도 무거워서 줄곧 내려놓고 있었는데, 가벼운 마음에 가방마저 그 무게가 덜어진 모양이었다.
“자기야, 지금 출발하면 언제 집에 도착하지?”
검은머리 여자가 검은머리 남자에게 남은 일정을 물어왔다.
남자들은 다소 여행과 외박에 자유로움이 있지만 여자들은 아무래도 부담과 무리가 있지 않은가. 너무 늦은 밤에 귀가하는 모습도 결코 좋은 소리는 들려오지 않으니까.
이런 일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은 검은머리 여자보다는 검은머리 남자가 먼저 나서게 된다.
“잠깐, 검색 해볼게.”
검은머리 남자는 바지춤에서 스마트폰을 찾는다.
왠지 허전한 느낌이 들어 주머니에 연신 양손을 찔러 넣어 본다.
사각형의 매끄러운 그 익숙한 바디가 잡히지를 않아 이번에는 애써 들어 메었던 가방을 다시 내려놓고 그 안을 샅샅이 뒤진다. 그 어디서도 남자가 찾는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아, 아까 그 식당에서 두고 왔나봐. 나 금방 다녀올게.”
“아냐, 같이 가자 자기야.”
검은머리 커플은 점심때까지 머물렀었던 섬 안의 식당으로 황급히 발을 돌렸다. 그러던지 말던지 노란머리 커플은 정박되어 있는 배 앞에서 언제 싸웠었냐는 듯이 애정을 과시하고 있었다.
녹색의 작은 숲과 다수의 암반들이 하얗게 주변을 메운 이 섬은, 꽤나 커보였지만 사실 민가의 크기는 그렇지 않았기에 식당까지는 금세 당도할 수 있었다.
듬성듬성 빈틈이 보이는 낡고 파란 기와지붕에 금이 여기저기 쩍쩍 갈라져 있는 벽.
그와 다르게 미닫이문만은 번쩍번쩍하는 새것이었다.
간판도 없이 오는 손님 있으면 식사를 내오고 없으면 마는 그런 섬마을의 낡은 식당.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앉아서 식사를 했던, 노랗고 여기저기 귀퉁이가 떨어진 바닥재가 엉성하게 깔려있는 그 정취 없는 정자에 발을 올렸다. 이곳저곳을 살펴봤지만 어디에도 스마트폰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가마솥의 연기가 모락모락 새어나오는 부엌에서 식당의 주인 할머니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할머니, 혹시 여기 제 핸드폰 못 보셨어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은 마당 한 편에 놓인 장작 두어개를 집어 들다가 검은머리 남자의 질문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탁한 눈동자가 남자를 마주한다.
“…!! ……!!!!”
검은머리 커플은 멀리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외침에 고개를 돌려 바라본다.
방금 도착한 배의 주인은 로프를 풀고 있고, 노란머리 커플은 어느새 배에 올라 크게 손짓을 하며 소리를 치고 있었다. 곧 떠나니 어서 빨리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손짓으로 빨리 배에 올라타라고 아우성이다. 다급해진 검은머리 남자가 노인을 재촉한다.
“할머니, 제 핸드폰 못 보셨어요? 방금 전에 여기서 점심 먹고 갔었거든요?”
무심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려 배를 바라보는 노인.
다급한 남자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여유로웠다.
“저 배 타고 나갈라구?”
“네! 제 핸드폰 보셨어요? 저 저거 타고 나가야 하거든요!”
“저걸 왜 타려고 해?”
이해할 수 없는 노인의 태도에 검은머리 커플이 얼어붙는다.
마치 대답을 회피하는 것 같았고, 무언가 숨기는 것 같기도 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모습.
검은머리 남자는 할 말을 잃어, 입만 벙긋벙긋 하다가 몇 번이고 말을 다시 삼켰다.
노인은 그런 남자의 모습에도 아랑곳 않고 남자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직시한다.
나이가 들어 주름지고 늘어진 눈꺼풀이 동공의 반을 덮고 있었지만, 노인의 송곳 같은 시선만큼은 확실하게 검은머리 커플의 동공에 각인되었다.
“우리 집, 민박도 해. 자고가.”
말은 다소 유하게 들리는 듯 했지만, 노인의 그 시선은 강경하게 그들을 옳아 붙들고 있었다. 하얗고 탁하게 빛이 바랜 노인의 동공은 마치 새하얀 포말을 잔뜩 만들어내는 시커먼 파도를 보는 것 같았다.
“… 아, 아니…. 저희가 가야 하거든요….”
“자고 가.”
멀리서 끊이지 않고 들려오던 노란머리 커플의 목소리가 어느새 작아지기 시작했다.
분명 배는 떠나고 있었다.
이미 섬에서 나가기에는 늦어버린 일이었다.
노인은 그제야 남자에게서 눈을 떼고, 장작들을 든 채로 다시 부엌에 들어갔다.
뒤에서 바들바들 떨던 검은머리 여자는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남자의 옷깃을 꼬옥 붙들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돌아보고 뒤늦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안심시키려 애를 썼다. 남자는 그렇게 여자를 달래는데 힘을 쏟으면서도 부엌에 들어간 노인을 경계했다.
그때, 노인이 부엌에서 성큼성큼 걸어 나와 다가왔다.
남자의 스마트폰을 들고서.
“… 오… 왜… 왜 이걸… 감추셨…”
“얼빠진 것들 같으니라구. 안방에 들어가면 장롱 안에 이불이랑 베게랑 다 있으니까 퍼뜩 들어가! 어딜 겁도 없이 허튼 배를 타려고.”
남녀는 의아함에 넋을 잃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멀어지는 배를 바라보며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천에 안개가 이렇게 고약하게 끼어있는데 육지로 가는 배가 당최 어디에 있어. 육지까지가 얼마나 먼데. 다른 섬에 가는 배라면 몰라도.”
그 말에 소름이 끼쳐 남녀는 할 말을 잃고, 망연자실 멀어지는 배를 바라본다.
이미 배는 안개 속에 깊이 파묻혀, 그 시커먼 그림자만을 흐릿하게 남기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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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지가 오래 되서, 부담없이 그냥 써 보려고 술술술 적었는데 잘 만들어졌나 모르겠네요.
요즘와서 생각이 드는거지만 아무래도 현장감있는 실화괴담이 더 무섭지 않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아무래도 소설은 운치가 있어서 좋으니까.
여러모로 장르마다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좋아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되실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출처 | 윈스턴, 본인, 작성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