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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일정하지만 때론 불규칙하다. 그것은 상대적인 개념에서 더욱 그러하다. 깊은 밤, 수면을 취하는 자의 시간과 깨어있는 자의 시간, 그것은 같은 속도로 흐르지만 같게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나 깨어있는 시간이 악명 높은 서쪽 초소의 망루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바람의 나부낌, 그 사이로 흩날리는 미세한 빗방울의 감촉, 멀리서 들려오는 밤 짐승의 울음소리, 세세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무토의 시간 역시 멈춰 선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자정을 조금 넘은 시간, 다음 교대 근무자가 도착하기까지 남은 6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얼마나 됐지?”
“0시 15분입니다.”
평범한 질문 속에 신경질적인 무토의 감정이 묻어났다. 우치다가 급히 제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해주었지만 초조함은 가시지 않는지 연신 손 끝이 어깨에 맨 총의 개머리판을 두드린다. ‘탁, 타탁, 탁탁’ 일정한 리듬이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걱정스런 표정의 우치다가 말했다.
“계속 잠잠한 것이... 아까 그걸로 끝난 건 아닐까요?”
“아까 일? 그럴까?”
“그렇지 않고서야 계속 이렇게 잠잠한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혹시 너 전에 일어난 사건들이 대략 몇 시쯤에 일어났는지 알고 있나?”
“글쎄요 그건...”
“그럼 입 닥치고 경계나 잘 해... 이제 겨우 2시간 지났어. 근무는 아직 6시간이나 남았고 말이야! 제기랄! 아무리 악명이 높다지만 야간 경계 근무를 8시간 말뚝 근무로 바꾸다니. 히라타 조장, 과연 제 정신이긴 한 건가?”
무토가 도무지 흐르지 않는 시간을 히라타의 탓으로 돌리며 푸념하자 우치다가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요. 대신에 내일은 꼬박 쉴 수 있으니... 고마워야 해야 할지... 참! 그나저나 위안소 가보셨어요? 지지난주에 반도에서 새파란 처녀들이 실려 왔다면서요? 내일 비번이니 저랑 거기나 가시죠?”
“처녀는 개뿔... 이미 공출 될 때 쓸 만한 계집들은 죄다 건드려 놓은 걸? 듣자니 끌려오면서 제대로 씻지도 못해 냄새가 장난이 아니라던데... 난 보기와 달리 비위가 약해서 말야!”
무토가 코를 찡긋하며 불쾌함을 표시한다. 하지만 우치다는 그런 무토의 반응이 의외라는 듯 보다 적극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정비를 좀 했겠죠. 성병검사도 하고 살충제를 뿌려서 벼룩이랑 이도 다 잡았답니다. 게다가 우리는 오전에 근무 열외니까 씻고 곧바로 가면 무토 병장님 마음에 들 위안부 계집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같이 가시죠? 이 멀리까지 와서 그런 낙도 없으면 무슨 재미로 군 생활을 할까요. 저는 그 사이 벌써 두 번이나 다녀온 걸요. 이름이 뭐랬더라? 미... 미코 그래 미코! 눈도 크고 저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지만 착해 보이더라구요.”
“어린 놈이 밝히기는! 그리고 위안부 계집 따위... 착해서 어디다 쓰게? 그래봤자 창부(娼婦)야 쓸 데 없는 데 마음 주지 마라! 어차피 여기서 2~3주 대기하면서 위생검사나 받다가 얼마 안가 최전방으로 배치 될 계집들이야. 그럼 다시 볼 일도 없고!”
“네...”
무토의 핀잔에 마음 상한 듯 우치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조용히 바닥을 향하는 시선 위로 말 할 수 없는 상념들이 그득하다.
‘미코... 미코...’
우치다는 문득 미코의 얼굴을 떠올렸다. 단순히 음심(淫心)이 동해서만은 아니었다. 말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녀를 향한 미묘한 감정의 부산물들이 있었다. 몸을 섞었다곤 하나, 며칠 전 처음 만나 두 번 본 게 다인 위안부 소녀, 육체적 경험이 낳은 애틋함일까? 때 마침 눈에 들어온 망루의 밤 그림자 하나가 미코의 옆모습을 닮아 있었다. 두 번째로 몸을 섞던 날, 어둑한 위안소 안에서 보았던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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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보충대는 부대 내의 후미진 곳에 있었다. 막사라고도 할 수 없는 허름한 건물이 바로 그것이었는데, 각지에서 차출된 위안부들이 모두 모여 그 곳에서 대기했다. 대기 기간은 통상 2~3주, 길게는 한 달, 목적은 간단했다. ‘사기 진작용 위안부의 위생 감독’ 기간 중 그들은 매독, 임질 등 각종 성병에 대한 위생검사를 받았다. 문제가 있는 여성들은 치료 또는 격리 조치되고, 이상이 없는 여성들만이 전선으로 공급되어 황군(皇軍)의 외로움을 달랜다. 그 대부분은 반도에서 충당하나 중국 또는 다른 국적의 여성들도 있었다. 위생검사가 끝나기 전의 위안부는 원칙상 별도의 위락 행위가 금지되어 있지만, 그러한 규정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옷을 완전히 탈의시킨 후 이루어지는 1차 육안 검사, 거기서 합격한 위안부는 2차 채혈 검사의 결과가 나오기 전에도 종종 부대 내의 간이 위안소에 배정되곤 했다. 검사가 완전히 끝난 인원은 곧바로 전방으로 보내지는 보충부대의 특성 탓도 있었지만, 조선인 위안부는 대체로 안전하다는 인식이 그들 전반에 깔려 있었다.
그런 위안부 보충대의 막사 뒤편에는 여타의 건물과는 비교가 할 수 없는 허름한 가설물들이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판자로 얼기설기 이어 만든 2평 남짓 작은 공간, 그 곳이 바로 우치다가 미코를 만난 간이 위안소였다. 화장실은 물론 창문조차 없는 열악한 환경 탓에 여름에는 늘 고약한 냄새가 진동했고, 그 흔한 전등 하나 달려있지 않아 한 낮에도 문을 닫으면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보급품으로 지급된 초가 비치되었지만 조선인 위안부들은 유독 밤에도 초를 잘 켜지 않았다. 이에 대한 불만이 종종 제기되었지만, 과거 간이 위안소 한 동이 화재로 전소된 사건 이후론 아무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허나 화재 사건 이전에도 조선인 위안부들은 초를 켜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미코 역시 그랬다. ‘네 얼굴을 보고 싶다.’는 우치다의 거듭된 부탁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마지못한 듯 성냥을 들었다. 고작 촛불 하나를 켠 것에 불과했지만 예외적 행동이 주는 호의는 특별한 감정을 부여했다.
“예쁘네... 예뻐”
우치다가 고개 숙인 미코를 향해 말했다. 아련한 불빛 아래 비친 그녀의 모습은 세련되진 않지만 풋풋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 꾸미지 않은 풋풋함이 작고 순박한 얼굴을 더 돋보이게 했다. 하지만 아무리 우치다가 칭찬해도 미코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코가 일본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이름이 뭐야? 그러니까... 너, 네 이름이, 사람들이 너를 부를 때, 뭐라고 하냐고, 그래 너!”
“저는 미... 자, 미자예요.”
“저느미? 자미자에요? 저느미 자미자에요?”
우치다 역시 알아듣지 못하고 헤매자, 미코가 우치다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리곤 손바닥 위에 제 이름을 글로 썼다. ‘美子(미자)’, 그제야 알겠다는 듯 우치다가 말했다.
“미코? 미코(美子)상? 와! 이름도 예쁘다. 미코... 미꼬! 귀여워! 난 우치다야!”
“아니... 미자, 미자, 내 이름은 미자예요. 김미자!”
우치다가 자신의 이름을 일본식 한자음으로 바꾸어 말하자 미자가 급히 제 이름을 다시 말했다. 하지만 거듭된 정정에도 불구하고 우치다는 그녀를 계속 미코(美子)라고만 불렀다. 그녀는 역시 그때마다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반복하여 말했지만 우치다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그건 미코라는 이름의 어감이 좋았던 탓도 있지만, 그가 본국에 두고 온 첫사랑의 이름이 ‘미치코(美智子)’였던 까닭이 더 컸다. 물론 ‘미자’로선 그러한 사실을 알 리 없기에, 두 사람의 실랑이는 계속됐다.
“미코! 미코! 네 살결... 엄청 부드러워 알고 있어?”
“미자! 미자! 제 이름은 미자라구요. 왜 자꾸 이상하게 불러요. 김미자!”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 미자의 무릎을 베고 누운 우치다는 장난스레 ‘미코’를 노래하고, 그녀는 고개 저으며 자신의 이름 ‘미자’를 반복했다. 조금은 고집스럽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갑작스레 떠나온 고향, 볼 수 없는 가족들, 위안소에서의 참담한 현실... 적어도 제 이름만은 고향에서처럼 불리고 싶었을까? 촉촉이 젖은 눈망울이 흔들리며 하늘을 향한다. 그래봐야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캄캄한 위안소의 천장뿐이건만, 빗물 같은 애절함이 한 방울, 우치다의 이마를 적셨다.
“울어? 우는 거야?”
우치다가 몸을 일으키며 묻자 미자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애달픈 제 감정 보이고 싶지 않은 듯 촛불을 피해 달아난다. 하지만 애써 참아내도 흐느낌은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서글프게 아롱진 슬픔이 눈망울을 떠나 볼을 타고 흘렀다. 착잡한 표정의 우치다가 손을 뻗어 미자를 돌아 앉힌다. 억지로 돌아선 얼굴 위, 급히 손등으로 부벼보지만 채 닦이지 않은 두 볼의 물기가 촛불에 반짝였다. 제 아무리 스쳐가는 인연이라지만 여자의 눈물에 감정이 동하지 않을 사내가 어디 있을까? 우치다 역시 그랬다. 그에게도 고향이 있었다. 이제는 다른 이의 여자가 되었겠지만 몸 닳게 아파했던 첫사랑이 떠올랐다. 첫사랑, 손 한 번 잡아 본 것이 전부인 사실상의 짝사랑, 열여덟의 까까머리 소년은 열정뿐 표현은 서툴렀다. 우연한 만남, 고백 그리고 애달픔이 유일한 연애의 역사, 그렇게 쑥맥에 불과했던 소년이 지금은 반쯤 벌거벗은 소녀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몸을 섞은 건 이번이 벌써 두 번째, 소년에겐 놀라운 발전이었다. 하지만 ‘미자’에겐 지독한 악몽, 희미한 불빛 아래 우치다의 안타까운 시선이 ‘미자’ 위에 ‘미치코’를 포갰다. 단아했던 미치코, 그 삼단 같은 머릿결을 지우니 헝클어지고 쪽진 미자의 머리가 보였다. 하얗고 보드라웠던 미치코의 손을 지우니 거칠고 때묻은 미자의 손등이 보였다. 때깔고운 기모노를 지우니 찢어지고 헤진 낡은 저고리가 보인다. 그리고 그 저고리 아래 갈비뼈가 여실히 드러난 앙상한 몸뚱이가 있었다. 우치다에게 알 수 없는 죄의식도 밀려왔다. 가련한 그 모습이 그로 하여금 입술을 깨물게 했다.
“너! 몇 살이야? 응?”
“안 울어요. 안 울게요.”
“못 알아듣는 구나... 그게 아니고 몇 살... 네 나이가 몇 살 이냐고!”
“잘 못 했습니다. 때리지 마세요.”
나이를 묻는 우치다의 손짓에 무엇이 떠올랐는지, 미자가 황급히 몸을 웅크렸다. 작고 여린 소녀의 등, 우치다가 깊게 심호흡 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갑갑함 보단 겁에 질린 미자의 표정이 안쓰러웠다. 안심시키려 어깨를 토닥여 보지만 미자의 몸은 한층 더 움츠러들었다.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우치다의 머릿속에 위안부 보충대의 책임자 무라카미 준위의 우람한 몸집이 떠올랐다. 그의 기억이 맞다면, 무라카미 준위는 평소 소가죽으로 만든 채찍을 들고 다녔다. 그제야 촛불의 아른거림 위로 미자의 등에 난 채 아물지 못한 생채기들이 뉘엿뉘엿 나타났다. 돌연 우치다의 감정이 울컥하며 치밀고, 눈시울은 어느새 시큰하다. 쑥맥에게도 어렵지 않은 답안이었다. 떨리는 등에 가슴을 맞대고, 불안한 몸뚱이를 조용히 감싸 안는 것, 우치다가 말했다.
“괜찮아. 겁내지 마... 괜찮아... 지금은... 괜...찮아”
“때리지 마세요. 울지 않겠습니다. 집에 보내 달라 하지 않겠습니다.! 때리지 마세요!”
우치다의 팔이 감싸 안자 미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비록 우치다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녀가 보인 반사적인 행동의 이유 그리고 그 감정은 이해할 수 있었다. 떨리는 작은 몸, 그 애달픈 버둥거림, 우치다는 더욱 세게 미자를 끌어안았다. 그 처연한 떨림이 조금은 잦아들기를 바라며...
아주 오랫동안... 말없이 안고 있었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봉신당 : 참회의 서
Written by 야설왕짐보(미스공 괴담공작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멘트...
개인적으로 미자가 등장하는 씬은 쓰면서도 살짝 콧잔등이 시큰했습니다.
전선으로 내몰린 조선인 위안부들... 글을 쓰려고 자료를 찾아보니, 정말 말도 안나오더군요.
아픈 과거를 어찌 제 주제넘은 글로 다 표현하겠습니까 마는... 부디 누가 되는 부분은 없었길...
그렇게 바라봅니다.
저는 오유와 웃대, 커뮤니티는 두 군데만 하는데, 이전에 위안부 소녀상을 만들겠다 해놓고
뒤로는 사람들의 모금액을 사적으로 유용해 치킨을 사먹다가 발각된 어린친구가 생각이 나네요.
착썬더... 그 친구는 잘 살고 있겠죠? 치킨 잘 사먹으면서... 흐지부지된 그 사건이 떠오르네요.
정말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p.s 미자 불쌍... 할머니들도 불쌍, 착썬더 니 인생도 불썅썅바...
출처 | 나, 미스공 괴담공작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