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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감자
게시물ID : panic_8882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굶주린상상력
추천 : 53
조회수 : 3761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6/06/27 22: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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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햇살이 따갑다. 불에 달군 바늘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 같다.
이 염천하에 그냥 서있는 것만으로도 수명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04321번은 천천히 호미질을 하고 감자밭의 잡초를 뽑았다.
04321번의 머리카락 끝은 노랗게 변색되어 있다. 특별히 멋을 부리려는 것이 아니다. 비바람과 햇볕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탈색된 것이다.
04321번은 여전한 속도로 검은 흙 속에 호미를 박았다. 15년 전 처음 밭일을 시작한 이후 그 속도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15년 동안 먹지도 잠들지도 않고, 찰나의 순간도 쉴 틈 없이 호미질을 했지만 04321번의 호미질 속도는 여전히 투박했다.
그러나 일반인들에 비해 아주 조금 속도는 느릴지언정, 04321번은 땅속의 감자가 다치지 않도록, 정확하게 필요한 부분에 땅을 파헤치고 잡초를 뽑았다.
 
04321번이 파헤친 흙속에서 땅강아지 한 마리가 딸려 나왔다. 뜨거운 햇볕에 노출된 땅강아지의 껍질은 순식간에 습기와 윤기를 잃고 말라가기 시작했다. 익숙지 않은 열기에 몸을 뒤트는 땅강아지의 생명도 함께 말라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04321번의 시선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삶과 죽음은 04321번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04321번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자, 신참 받아라.”
 
 
운송업자의 트럭 컨테이너에서 새로운 일꾼들이 느릿느릿 걸어 나왔다. 농장 감독관들은 눈을 빛내며 새 일꾼들을 살폈다.
 이번에는 젊은 여자 일꾼이 섞여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04321번처럼 오래전에 일꾼으로 만들어지고, 긴 시간동안 야외에서 일하고 있던 일꾼들의 몰골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주름투성이 피부에서는 벗겨진 각질이 먼지처럼 떨어진다. 얼굴에서 가장 먼저 깎여 나가는 부분은 귀와 코와 입술이다.
04321번의 얼굴은 이미 해골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하지만 제작(?)된지 얼만 안 된 새로운 일꾼들의 파리한 얼굴에는, 희미하기는 하지만 아직 미약한 혈색이 남아있다.
 두어 달 땡볕아래에서 밭일을 하다보면 점차 해골같은 얼굴과 주름투성이의 몸뚱이로 변해 갈 것이다.
그리고 그 몸뚱이는 최소 20년을 쉬지 않고 움직이며 일한다.
 
 
“얏호!”
 
감독관 중 막내 녀석이 작은 환호를 지른다. 16개의 새 일꾼 중 젊은 여자가 섞여있는 것이다.
 다른 고참 감독관들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음흉한 눈빛을 교환했다.
 
새빨간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성일꾼은 흑인이었다. 덕분에 그 일꾼의 얼굴에는 일꾼 특유의 창백함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노랗게 번들거리는 눈이 아니라면 평범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지경이다.
 
 
 
화석연료가 바닥났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지하자원의 고갈을 이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끝에 낭떠러지가 입을 벌린 내리막길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는 문명의 질주는 막을 수 없었다.
 물질문명의 안락함을 버릴 수 없던 인류는 내리막길의 가속도에 브레이크를 걸지 못했다. 그리고 눈을 빤히 뜬 채 낭떠러지로 떨어졌다.
 
번성하던 때에 비하면 한줌조차 되지 않는 남은 에너지를 위해 전쟁이 벌어졌다.
그동안 쌓아올린 문명의 총아는 낭떠러지로 떨어진 인류의 머리통을 다시 후려 갈겼다.
수십억을 구가하던 인류의 수가 천만 단위로 떨어지는 데 고작 5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보다 냉정하고, 잔인하고, 이기적이고, 잔혹한 이성으로 인류가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었다.
 
 
 
일꾼 운송업자의 트럭이 먼지를 날리며 돌아갔다. 저 트럭의 엔진은 대농장에서 재배된 감자로 움직인다.
감자나 고구마, 옥수수를 발효시켜 뽑아낸 에탄올의 사용효율이 석유의 60%에 다다를 정도로 발전했을 때 수많은 대농장들이 생겼고, 농장주들은 이전의 석유재벌들과 비슷한 부를 축적했다.
 
60억의 인구가 지구 위를 바글거리고 있을 때라면 달 표면 전부를 감자밭으로 만들었다 해도 에너지 부족을 해결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격감한 숫자의 인류에게 철저하게 통제되는 전깃불과 대중교통을 제공하는 정도라면 지금의 것으로도 그럭저럭 해결이 가능했다.
 
 
인간은 적응한다. 풍요로웠던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는 노인들이 상당수 남아있는 시기이지만, 그 풍요는 꼰대들의 향수로 치부 될 뿐 대다수의 사람들은 현실에 적응하고 불편함에 자신을 낮추며 살아간다.
 
하지만 기득권자들은 적응하지 못한다. 그들은 불편함에 몸을 낮추기 보다는 그 불편함을 죽여 버린다.
거대 장원의 농장주들을 중심으로 새롭게 재편된 세계에는 아직 공포가 가득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 공포가 싫었다.
그래서 생존과 이득을 위해 너무나도 쉽게 인간성과 인권이 무시되는 이 시대와 어울리도록, 그들은 가장 몰지각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공포를 죽여 나갔다.
 
인간사냥.
 
특정한 거주구역에 편입되지 못하고 문명의 외각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던 인류의 부스러기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고용된 사냥꾼들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사지만 온전히 달려 있다면 생사불문이었으니까.
 
그렇게 잡아 모은 사람의 시체(혹은 아직 살아있는 사람에게) 특정한 약물이 주입되면 그 사람은 일꾼으로 변한다.
그리고 20여 년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잠시 쉬지도 않고, 끝없이 펼쳐진 밭에서 지평선을 넘나들며 일한다.
전세계에서 움직이고 있는 일꾼의 숫자는 물경 100만개에 육박한다. 그들은 100만 ‘명’이 아니다. 그들은 100만 ‘개’다.
 
 
“자, 너는 24321번.”
 
흑인여자 일꾼의 이마 번호가 새겨졌다. 이제 ‘퀴니’였던 그녀의 본명은 영원히 사라졌다.
24321번의 노란 눈은 아무 의미 없이 주변 감독관 들을 응시했고, 푸석해지기 시작한 뇌세포들은 감동 없는 추억을 희미하게 되살리고 있었다.
 27년분의 기억은 당연히 남아있지 않다. 최근 몇 주간의 기억만이 끊어진 필름처럼 펄럭거릴 뿐이다.
 
 
“벗겨놓고 보니까 훨씬 쌔끈한데요. 나 흑마는 처음인데, 오늘은 내가 제일 먼저 하게 해줘요.”
 
그래도 사냥꾼에게 뒷덜미를 잡혔을 때의 기억은 상당히 뚜렷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나름 희귀한 경험이었으니까.
 
“이 새끼야 바셀린 가져가. 일꾼 거기는 바짝 말라있어서 그냥 박았다가는 부러진다.”
 
아마도 생전의 24321번과 같은 또래로 여겨지는 감독관 하나가 24321번의 몸 위에서 씨근덕거리고 있을 때 24321번은 또 다른 희미한 기억하나가 떠올랐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냥꾼에게 붙잡히고 난 다음, 지금과 비슷한 일을 이미 겪었던 모양이다.
 왜 그랬을까? 그 당시에는 같은 일을 당하면서 소리도 지르고 눈물도 흘렸던 모양이다. 24321번은 그 당시의 기억과 지금의 상황을 번갈아 살펴보았다. 특별한 변화는 없다. 지금 24321번은 객관적일 뿐이다.
 
“어이! 김 씨! 자네는 안하나? 지금이 가장 맛있을 때야. 한 달만 지나도 쭈글쭈글하고 뻣뻣해져서 할 맛이 안 나잖아. 할 수 있을 때 해둬.”
 
13명의 사냥꾼을 상대해야 했던 그날에 추억에 비해, 5명의 감독관을 상대하는 일은 훨씬 일찍 끝났다.
 이 농장의 일꾼은 24,321개 이다. 24,321개의 일꾼을 감시하는 일을 5명의 감독관이 수행하고 있다.
고작 5명이라면 24,321마리의 병아리를 관리하는 일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 일꾼들에게는 특별한 관리가 필요 없다.
 해야 할 일을 지시하고 농장에 풀어놓으면, 일꾼은 묵묵히 일한다. 달아나지도 않는다. 먹지도 않는다. 잠을 자지도 않고, 불평하지도 않는다.
그저 수명이 다할 때까지 지시받은 일을 수행할 뿐이다.
 
“아이고, 이제 얘도 슬슬 맛이 가네. 야, 24321번. 너도 다음 주 부터는 쟤들처럼 밭에 나가야겠다.”
 
2주가 지났다. 24321번과 같이 농장에 들어온 일꾼들은 바로 그날부터 커다란 바구니를 등에 매고 감자를 수확하고 있다.
하지만 24321번은 그동안 감독관들의 감시탑을 전전하고 다니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24321번은 감독관이 가리키는 방향을 무의식적으로 바라보았다.
한 낮 감자밭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는 누가 밭에 불을 지른 것은 아닌가, 착각할 지경이다.
그러한 밭 여기저기를 점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꼬물거리는 새카만 점들. 1차원의 선조차 될 수 없는 그 점들은 스스로를 위한 그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하며 꼬물거렸다.
 
농장에 도착하고 2주가 지난 지금 24321번의 피부는 수분을 잃으며 눈에 띄게 말라가고 있었다.
저 점들과 같이 걸어 다니는 해골이 되어 꼬물거릴 날이 멀지 않았다.
사실 상관없다. 감시탑 한 구석에서 바셀린 냄새를 맡으면 꼬물거리는 점과 밭에서 꼬물거리는 점의 차이점을 24321번은 알지 못한다.
 
“거참, 24321번 요게 참 좋았는데. 다음에 이런 거 또 안 들어오나.”
 
 
밭으로 나온 지 한 달. 24321번은 감자를 캐고 있다. 김매기 작업을 하는 일꾼과는 달리 수확하는 일꾼에게는 호미가 지급되지 않는다.
수확할 감자를 다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확하는 일꾼은 맨손으로 감자를 캔다.
비록 조금씩 비틀어져 가는 손가락이지만, 움직이는 열 개의 손가락은 그 어떤 기계보다 훌륭한 작업이 가능하다.
 
이제 24321번의 머릿속에는 사냥꾼과의 추억도, 바셀린이 끈적거린 기억도 모두 사라졌다.
24321번은 묵묵히 수확한 감자를 바구니에 넣는 일을 반복할 뿐이다.
 
 
“이봐, 마이클! 오늘 들어온 일꾼 중에도 쌔끈이가 있나봐. 한동안 즐겁겠어.”
 
 
24321번이 일꾼이 된지 4년이 흘렀다. 일꾼들에게 작업복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24321번은 바싹 마른 알몸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 몸을 모고 욕정을 느낄 짐승은 최소한 지구상에는 없다.
 24321번의 머리카락은 거의 빠져 있다. 귀와 코도 거의 사라졌다.
팽팽하게 솟아있던 유방도 대부분 사라져서 육안으로는, 24321번이 원래 남성이었는지 여성이었는지 조자 구분할 수 없다.
말려 올라간 입술사이로 유난히 가지런하고, 여전히 새하얀 치아가 빛나고 있다. 24321번은 그 치아를 살며시 벌리며 감시탑을 바라보았다.
 
바셀린을 든 고참 감독관이 여자 일꾼 한 개를 가지고 자신의 감시탑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금발에 하얀 피부를 가진 저 새 일꾼은 어떻게 살펴봐도 15살은 넘지 않은 듯 했다. 원래 하얀 피부가 일꾼으로 변하면서 더욱 핏기를 잃어 푸르스름하게 보이는 새 일꾼은 4년 전 24321번과 마찬가지로 무기력하게 감시탑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24321번은 여느 때와 똑같이 객관적이었다. 눈은 감시탑을 바라보고 있지만 강철 같은 손가락은 여전한 동작으로 흙속의 감자를 캐내고 있었다.
 
바셀린의 냄새가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다. 24321번과 감시탑과의 거리는 개가 아닌 이상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그 이전에 24321번이 감각을 느낄 능력은 이미 사라졌을 터이다. 언제나 객관적이던 24321번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다시 한 번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바셀린이 아닌 다른 냄새. 그 냄새에서 24321번은 뜻밖의 충동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백마에 영계라니, 이런 횡재가. 부디 너는 빨리 썩지 말고 오래오래 사용하게 해줘라. 응? 누구야? 문 닫고 꺼져!”
 
 
소리 없이 감시탑으로 걸어 들어온 24321번은, 일꾼의 다리사이에서 철벅거리는, 감독관의 허연 엉덩이를 보며 자신이 느낀 충동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24321번은 원했다.
 
“이런 썅. 문 닫고 꺼지라고! 내 말 안 들려!”
 
24321번은 자신의 충동을 마음껏 표현했다.
 
“쿠에에에에엑!!!”
 
그리고 충동이 시키는 대로 감독관의 엉덩이에 있는 힘껏 이빨을 밖아 넣고 고기를 물어뜯었다.
출처 http://jooc.kr/contest/note.detail.html?nn=1003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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