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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신당 : 참회의 서 #6. 적응-2~3 : http://todayhumor.com/?panic_88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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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흙길 위, 살랑이는 바람결에 낙엽 하나가 떨어졌다. 기온이 낮은 만큼 만주의 가을은 그 어디보다 성큼 다가와 있었다. 많은 초목이 땔감으로 쓰이기 위해 벌목됐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나무들은 낙엽을 떨군다.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애도가 없어서도, 슬프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저 묵묵히 사는 것이다. 먼저 간 것들의 빈자리를 채우며 다시금 풍요롭기를 소망할 뿐이다. 그리고 그 풍요의 소망 위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유유히 달려가고 있었다.
“고맙네요. 가토 중위님께서 이렇게 직접 안내까지 해주시고...”
“그저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메구미가 붉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하지만 가토는 시선 한 번 돌리지 않고 답한다. ‘무료하다.’, ‘바람을 좀 쐬고 싶다.’, ‘가까운 시내를 구경했으면 한다.’ 흡사 관광객이라도 되는 양 투덜대는 메구미와 그녀가 가리킨 차, 막상 따라오긴 했지만 이래저래 탐탁치 않은 가토였다. 하지만 조금은 경직된 그의 얼굴과 달리 운전대를 잡은 스기야마 부인, 즉 메구미는 시종일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다.
“날씨가 참 좋네요. 하늘도 맑고...”
“네 비온 뒤니까요.”
“만주는 정말 넓군요.”
“아무래도 본토 전체를 합한 것보다 더 넓으니까요.”
이런저런 질문과 답이 이어졌다. 가벼운 대화였지만 한 차량에 동승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가토는 약간의 부담감을 느끼는 듯 했다. 겨드랑이에 바짝 달라붙은 팔이 그 증거였다. 아직도 실험실에서의 촉감을 잊지 떨쳐내지 못했을까? 경직된 가토와 그런 그를 재밌다는 듯 바라보는 메구미, 예의 그 야릇한 눈빛으로 묻는다.
“참... 가토군, 몇 살이나 됐죠?”
“올해로 서른셋입니다.”
“젊네요. 젊음은 좋은 거야. 난 스물, 아무것도 모를 때 결혼을 했죠. 집 안 어르신들의 약속에 따라... 그땐 그게 당연한 줄 알았어요. 다들 그랬으니까. 남편은 10살도 더 많은 생면부지의 남자, 그리고 시작된 악몽 같은 18년의 결혼 생활... 아이는 둘, 하지만 모두 딸... 보통의 여자였다면 벌써 내쳐졌겠지만, 장인의 후광을 원하는 사위는 몰래 아들을 낳아 오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생면부지의 아이는 내 아들이 되고... 이런 나도 모르게 하소연을 해버렸네요. 날이 이렇게나 맑은데 너무 처량한 얘기죠?”
“아... 아닙니다.”
달리는 자동차는 자유로움의 상징이지만, 한 편으론 구속이다. 단 둘만의 공간, 차가 달리기 시작하면 도망칠 곳은 없다. 난처한 질문이라도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토가 말을 더듬자 어색한 기류가 스쳐 지났다. 하지만 그런 순간일수록 완숙한 자의 여유가 빛난다. 메구미가 바로 그랬다. 핸들을 돌리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금 물어왔다.
“나 너무 늙었죠? 벌써 서른 여덜, 남편 눈에는 어떨지 몰라도, 어린 장교의 눈에는...”
“아... 그게... 아직 충분히 젊으십니다. 추... 충분히”
질문은 질문이되, 처연한 말투로 답은 정해져 있다. 가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냉철한 장교지만, 적어도 남녀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생도시절의 그것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못 했다.
“고마워요. 빈말이라도 그렇게 말해주니 나쁘지 않네요.”
메구미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이 역시 뭇 사내들을 공략해 온 필승의 수법중 하나다. 가볍게 운을 띄우고 작은 행동들로 상대의 마음을 흔든다. 사내가 동정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본다면 승산은 100%, 메구미의 시선이 룸미러를 통해 경직된 가토의 눈빛을 헤아린다.
“아닙니다. 아름다우십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말했죠? 거짓말을 잘 하는 남자는 매력 있다고, 그게 거짓이라 해도... 여자는 흔들려요.”
의미심장한 어법이었다. ‘거짓말을 잘 하는 남자는 매력 있다.’란 말로 상대에 대한 호감을 에둘러 표현한다. 그리고 ‘그게 거짓이라 해도’란 말로 더 이상 부인 할 수 없게 옭아맨다. 하지만 정말 무서운 건 역시 마지막이었다. ‘여자는 흔들려요.’ 실로 의미심장한 표현이었다. 그 한마디로 모든 책임을 상대에게 지운다. ‘동경 사교계의 독거미’ ‘독사 같은 여자’ 수많은 젊은 장교들을 파멸로 이끈 그녀에 대한 수식어가 거짓이 아님을 보였다. 그리고 지금, 그 날카로운 이빨이 가토의 심장에 꽂혔다.
“네? 그... 그게... 저...”
“이런 내가 이상한가요?”
질문과 함께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곤 탄탄한 가토의 허벅지에 이빨을 박아 넣는다. 달리는 차 안에서 도망칠 곳은 없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 역시 그녀, 부드러운 어루만짐이 결단을 촉구했다. 가토의 심장이 세차게 요동쳤다. 이제껏 보아온 어떠한 전술지도서에도 수록되지 않은 공격이다. 막아내는 방법도, 회피하는 방법도 알지 못한다. ‘이대로 함락되고 말 것인가?’란 질문과 함께 그것에 따른 득실의 여부만이 계산 될 뿐이다. 부대장의 아내이긴 하나 내각 실세의 딸, 나이는 다섯 살 위지만 아직 아름답다. 뻥 뚫린 야외의 모처지만 아무도 지나지 않을 만주벌판의 한 구석이다. 서른 셋, 야망은 높지만 그만큼 혈기 왕성한 나이... 가토가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무의미한 계산이었다. 산술적인 계산이 충동적 욕망을 이긴 사례는 많지 않다.
‘어차피 이 여자도 누군가에게 떠벌릴 입장은 아니다.’
‘입을 다물면, 누가 알까? 비록 그것이 부도덕한 관계라 할지라도...’
가토가 팔을 뻗어 핸들을 붙잡았다. 그리곤 제 입술로 메구미의 입술을 포갠다. 핸들이 고정 된 차는 하염없이 앞으로만 내달리고, 길 끝, 하염없이 작은 소실점을 향해 거친 숨결이 쏟아졌다.
만주의 어느 가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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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컹’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차가 멈췄다. 나무를 깎아 만든 커다란 차단봉 앞이었다. 열린 트럭 창문 사이로 사병 하나가 얼굴을 내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든다. 관등성명, 출발지, 그리고 방문 목적 등이다. 그 사이 초병 한 명이 유유히 걸어 나와 짐을 살필 듯 트럭 뒤로 다가갔다.
“둘이라고 하지 않았어?”
트럭 뒤편을 얼기설기 가린 천을 치우며 초병이 외친다. ‘저도 인계 받을 때 두 명이라 들었는데요?’ 운전자도 소리쳤다. 무언가 의아하다는 반응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내 총을 들이밀며 소리친다.
“잠깐 나와 봐!”
“어라? 묶어 놨다고 했는데?”
트럭에서 내린 운전병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말한다. 초병의 지시에 따라 트럭에서 내린 세 사람 모두 손과 발이 자유롭다.
“대체 어떻게 인계 받은 거야?”
“글쎄요.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이래서야 조선인 괴뢰부대라도 잠입하면 잡을 수 있겠어?”
“저도 여기서는 확인이 안 되고 본대로 돌아가야 확인이 가능할 것 같은데요? 하지만...”
“하지만 뭐?”
“저희가 저 자들을 인계받은 곳이 함경도라서... 본대에 돌아가 경성까지 문의하려면 시간이 좀...”
“엉망이구만! 야 이거 안 됐! 못 들여보내니까 그렇게 알아!”
“하지만 출입증이 이렇게 있는데...”
“출입증이고 뭐고, 이렇게 엉성해서는 나도 상부에 보고를 못 한다고!”
초병과 운전병, 두 사람이 옥신각신 수송자의 신변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즈음, 위병소 안에서 다른 초병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 오며 말했다.
“이토 상등병님, 이놈들 그건가 본데요?”
“그거? 그게 뭔데?”
“가토 중위님이 특별히 불렀다는... 그 서쪽초소의...”
“설마... 그 빌어먹을...”
“일단 통과시키시죠. 딱 봐도 복장이 희한한 게 보나마나입니다. 괜히 돌려보냈다간 가토 중위님한테 불호령이 떨어질 걸요?”
초병이 차에서 내린 세 사람의 수송자들 중 유독 한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특이한 머리모양은 물론, 요상하게 달라붙은 바지와 셔츠, 신고 있는 구두조차 어딘가 남다르다.
“이 봐 너! 이리 와 봐!”
이토라 불린 초병이 기이한 복장의 사내를 부른다. 손가락만 꺼떡거리는 폼이 숫제 제 아랫사람 부리는 모양새다.
“누구? 나? 아니 딱 보니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어디서 사람을 오라가라야? 군인이 민간인한테 이래도 돼? 대한민국 예비군 가오가 있지... 현역 주제에... 나 예비역 병장출신이야!”
초병의 행동이 기분 나빴던지 기이한 복장의 사내가 대뜸 팔을 걷으며 달려든다. 숫제 한 판 붙기라도 할 기세다. 반면 뒤에 선 청년과 소녀의 표정은 걱정만이 그득하다. ‘저 사람 대체 왜 저럴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걱정 마! 얘네 내 말 못 알아들어! 야 이 시베리안 허스키 닮은 십장생아! 아오~ 개나리들!”
상대가 총을 들고 있음에도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하는 완벽한 판단력, 별 것 아닌 일에도 쉽게 흥분하는 탁월한 침착성, 사고를 몰고 다니는 행운의 주둥이, 그나마 그 중 제일 이성적인 것은 주둥이였다. 총구가 디밀어 지니 뻐끔대며 입을 다문다. 물론 그래도 할 말은 했다.
“압... 우... 웁... 마.. 말로 합시다. 마... 말로...”
“이거 정신 나간 놈 아냐? 야 시베리안 허스키가 뭐냐? 십장생? 개나리? 음 개나리는 좀 알겠네.”
초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다. 하지만 ‘시베리안 허스키’ 와 ‘십장생’에 대해 답해주는 초병은 없었다.
“네가 답해봐! 시베리안 허스키가 뭐지? 그리고 십장생은... 그래 네 이름부터 묻자. 이름이 뭐냐?”
“이... 이청연...”
“이청연? 조센징인가? 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지?”
“저... 저기요... 근데... 지금 내 말 알아듣는 거냐... 세요?”
청연의 낯빛이 어둡다. 분명 초병은 일본어로 묻고 답하는데, 의사소통에 조금의 어색함이 없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때, 등 뒤에 선 소녀가 보따리 속의 물건을 청연에게 내밀며 말했다.
“신경(神鏡)이... 신경(神鏡)이 선생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뭐야! 이거 그 거울이잖아?”
청연이 당황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둘러 싼 군인들도 일제히 소녀와 소녀가 꺼내든 물체를 향해 총구를 돌렸다. 조금은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그러자 내내 침묵하던 청년이 그들 사이로 다가와 유창한 일본어로 이야기했다.
“제례에 사용하는 물건입니다. 보시다시피 거울이고,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저 분에게 잠깐 드려도 되겠습니까?”
“수상하긴 하지만 좋다. 하지만 명심해! 허튼 짓을 하면 즉시 쏴버릴 거다.”
“아무 일 없을 겁니다.”
돌아 선 청연, 신경을 내미는 소녀,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스기야마와 주술사 마사치카, 그리고 그 곳에서 있었던 일련의 사건 탓인지 청연의 손이 선뜻 다가서지 못 했다. 고통스런 기억이 엄습했다. 자신을 향해 날아들던 푸른 기류, 폭발할 듯 모여들던 사나운 업(業)의 기운들, 청연이 소리 없이 몸서리쳤다. 그러자 소녀가 부드러운 어조로 안심시키듯 말했다.
“소녀, 아직 이것이 가진 힘을 모두 헤아리지는 못하나, 두려워 할 일은 아님을 압니다. 배움은 적으나 이 범상치 않은 부름에 실보단 득이 많을 것이라 사료되니, 걱정 마시고 받아 보십시오.”
“으... 아... 아픈 거 아니지?”
“저도 아무렇지 않게 들고 있지 않습니까.”
“아... 이거 되게 꺼림칙한데... 에라 모르겠다.”
소녀의 설득에 ‘덥썩’ 신경을 받아든 청연,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마치 커피 전문점의 진동 벨처럼 마냥 떨릴 뿐이다. 하지만 그 순간 청연의 머릿속을 스치는 설 산의 한 마디...
‘거울의 떨림과 호흡의 간격을 맞추는 것이 우선, 그것이 곧 내밀어 닿는 것이니 소통의 기본이라.’
지난 기억을 떠올린 청연이 곧바로 리드미컬한 호흡을 시작했다. 다소 경망스럽지만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라고 정확한 박자를 유지하며 신경의 떨림과 제 호흡을 일치시킨다.
“후하아아, 후우우하아아 후하아아, 후우우하아아!”
“뭐하는 짓이냐!”
“제례를 위한 준비의 일환입니다. 어디선가 귀기(鬼氣)가 느껴지는군요.”
청년이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답하자 귀기(鬼氣)란 말에 놀란 초병들은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그 사이 청연의 경박한 호흡법은 계속 됐다.
“후하아아, 후우우하아아 후하아아, 후우우하아아!”
기분 탓일까? 호흡이 거듭되자, 어디선가 검푸른 기운이 솟아나 청연의 주위를 감싼다. 주변은 온통 고요하고, 시끄러이 떠들던 초병도, 남매도 모두 말없이 서 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어느 한 순간의 모습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바람은커녕 주변의 사물 모두 일말의 미동도 없이 멈췄다. 완벽한 정지, 그리고 그 속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자님! 제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봉신당 : 참회의 서
Written by 야설왕짐보(미스공 괴담공작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코멘트
극의 흐름을 조금 더 타이트하게 끌고 가고 싶은데, 계속 청연이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한다는 설정으로 가게되면
통역을 통해야하고, 그러면 불필요한 내용이 길게 이어질 듯 해 부득이하게 과거로 돌아오며 청연이 신경의 힘을 빌어
그 시대의 말을 이해하고 할 수 있다는 설정 추가했습니다.
다소 어처구니 없는 부분일수도 있으나, 귀신도 나오고, 과거로도 돌아가는 소설에서 그 정도야 큰 무리는 없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해 봅니다.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믿어요 ㅠㅠ 너무 이상하면 따끔한 지적 부탁드립니다.
안그래도 다양한 등장인물들에 그에 맞는 비중을 부여하다보니 장면 전환이 너무 잦은듯 하여 걱정이 많네요.
나름 영화라도 찍는다는 생각으로 어색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약간은 번잡스럽지 않나? 하는 것이
큰 걱정이네요. 이 역시 불편하다 생각드시면 따끔한 지적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p.s 다음 편에선 고대(?)하시던... 제 닉값 하는 씬이 나옵니다. 아주 짧지만... 극히 절제했지만... 뭐... 아쉬운대로...
이상 야설왕 짐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