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팬픽] 룬의 아이들 : 윈터러- 순간의 여름
게시물ID : animation_27250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추천 : 4
조회수 : 155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10/02 00:42:56
벨노어 백작의 영지에서 보리스는 아침을 맞이했다.
 
아직까지도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피부에 닿는 물건 부터 시작해 얼굴을 마주하는 모든 이가 계약된 은혜를
전제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나마 그 계약에 얽매인 사슬을 볼 수 없는 자가 있다면 말괄량이 로즈니스와 그 아이의 하인, 캐미아가 전부였다.
 
"보리스 도련님. 아침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마침 문 밖에선 란지에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지만 란지에의 목소리엔 주인을 섬기는 자의 마음가짐 따윈 찾아 볼 수 없었다.
보리스도 그 점에 일순의 호기심이 생겨 자신을 보필할 하인으로 란지에를 선택했지만 아직까지도 스스로를 벨노어 성의 식객과도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는 보리스가 언제 그 호기심을 해소할런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 들어와"
 
보리스는 반쯤은 잠긴 목소리로 란지에를 불렀다.
문은 열렸다. 하지만 란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 대신 문 밖으로 쏟아지는 무수한 순백의 빛, 윈터러와 같은 색깔을 한 광채가 쏟아져 나와
보리스의 방을 감쌌다. 그리고 그 빛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살갗이 타들어갈 정도로 강렬해져갔다.
 
......
 
다프넨은 비좁게 뜬 눈을 하다가 창문 사이로 내려쬐는 햇빛을 이기지 못 하고 얼굴을 돌렸다. 각도를 꺾은 다프넨의 흐릿한 시야에 검의 사제,
나우플리온이 식탁에 앉아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게 들어왔다.
 
"...벌써 점심 때 인가요?"
 
아침의 해는 이렇게 강렬하지 않았다. 숱한 걸음을 걸었었던 다프넨은 이 사실을 어느 또래 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어"
 
나우플리온은 입 안에 든 것들을 채 먹지도 않고서 말했다. 다프넨은 그런 행동이 참으로 그 답다고 생각하면서 웃었다.
 
"뭐가 좋다고 그렇게 실 없이 웃고 있어. 얼른 일어나"
 
나우플리온은 그제서야 다프넨을 바라보았다. 졸음이 씻겨 나간 다프넨의 시야에 나우플리온의 모습이 더욱 선명히 들어왔다.
 
다프넨은 다시 한번 소리 내어 웃었다.
 
"뭘 그렇게 묻히고 드시는 거에요"
 
"남이 먹는 방식에 참견하지 마라"
 
"혹시 몰라요. 당신의 식습관을 제가 자연스레 따라하게 될지"
 
"이 녀석이, 누가 누굴 겁박하려 들어. 내 말도 곧이 곧대로 따랐던 적이 없던 놈이 하물며 내 행동거지를 순순히 따라할리가 있겠냐"
 
둘만의 친근한 농담 따먹기는 이로서 끝이 났다. 다프넨은 기지개를 켜며 상체를 젖힌 뒤 침대에서 일어나 나우플리온의 맞은 편에 앉았다.
다프넨의 앞엔 이미 식사가 한껏 차려져 있었다.
 
"섬에 들어와서 그렇게 길게 잤었던 적은 없는 걸로 아는데, 무슨 꿈이라도 꿨냐?"
 
다프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밀죽의 마지막 한숟가락을 얌전히 떠먹었다. 트라바체스에서 배우기 시작해 아노마라드에서 숙달시킨 식사 예절은
아직까지 다프넨의 양손에 배어 있었다.
 
"그럼 그 꿈 얘기나 한번 들어보실까"
 
나우플리온은 어느새 식기를 치우고 다프넨의 얘기를 반쯤은 장난스런 자세로 경청할 준비를 마쳤다.
 
"썩 대단한 꿈도 아니에요. 그렇게 기대하실 필요 없어요"
 
"나라고 대단한 꿈을 바라지는 않아. 그저 잠깐의 유흥거리면 충분하단 말이다. 설마 그렇지도 못 한건 아니겠지"
 
"글쎄요. 당신이 받아들이기에 따라선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고 유흥거리만도 못 한 환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는 그런 꿈이에요"
 
나우플리온은 혀를 차며 손가락으로 식탁을 서너번 박자감 있게 두드렸다.
 
"문답무용, 얼른 말해보기나 해"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의 바람 대로 꾸었던 꿈을 소상히 말했다. 나우플리온은 처음엔 이 얘기가 끝나면 어떤 짓궃은 말을 던져줄까 싶은
표정이었지만 꿈 이야이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런 낯빛을 감추었다. 보리스는 점차 표정이 변하는 나우플리온을 보면서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기대가 되었다.
 
"나 원 참, 너란 놈은 무슨 꿈을 꿔도 그런 범상치 않은 꿈을 꾸는 게냐"
 
"꿈이란 걸 가려 꿀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다프넨 자신이 꾸었던 꿈을 대수롭지 않게 소개했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나우플리온의 반응은 가볍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실로 애매한 반응이었다.
그러고보니 다프넨은 문득 자신이 좋은 꿈을 꾸었던 적이 언제였을까 생각했다. 여지껏 꾸었던 꿈의 내용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 해도 깨어났을 때 뒷맛이 달콤했던 꿈은 아마 진네만 저택에서 자랐던 시절이 마지막이었을 것 같았다. 사실 그 시절 자체야말로 다프넨에게 있어 행복했던 꿈과 같은
기억들이었다.
 
"그나저나 뜬금 없이 란지에라니, 너 그 녀석한테 특별한 감정이라도 품고 있었던 거냐?"
 
다프넨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헛기침을 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다프넨이 란지에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 특별함은 어디까지나 동질감에서 비롯된 호기심이지 나우플리온이 말하는 연심
같은 게 전혀 아니었다. 나우플리온은 짐짓 다프넨을 놀리려 들었던 농담이 멋지게 성공하자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지팡이의 사제님께 오늘 네가 꾸었던 꿈을 얘기해 보겠다. 그 검과 비슷한 게 조금이라도 관련된 이상 어물쩍 넘어갈 수는 없겠구나"
 
나우플리온은 문 밖을 나서며 덧붙였다.
 
"오늘은 처신을 조심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도록 하죠"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을 안심시켰다. 과민한 반응이라고 볼 수도 있었지만 나우플리온에게 다프넨은 어느샌가 자신조차도 알게 모르게 의지가 될
정도로 다프넨의 삶의 분신이 되어 있었다. 다프넨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자신을 다스리려 했고 나우플리온이 지니고 있는 검의 사제로서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게 행동하려 했다.
 
혼자 남은 다프넨은 팔배게를 한 채 도로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스콜리에 갈 필요가 없었다. 기분 전환 겸 바깥을 돌아다닐까 했지만 나우플리온의 말도 지켜야 하거니와 다프넨 자신도 꿈의 내용을 마냥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이 이실더란 이름을 썼었을 때 해줬던 충고를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후 단 한번도 윈터러를 칼집에서 빼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출처를 알 수 없는 서슬퍼런 기운이 다프넨의 등 뒤를
흐를 때가 있었다. 더욱이 오늘 꾸었던 꿈은 그 불길한 기운을 불지피는 것 같았다. 

"...."
 
선약을 기억해낸 다프넨은 몸을 일으켰다.  또래 아이들에게 땅다람쥐라 불리며 구박을 받는 아이, 이 섬의 여느 아이들 보다 책을 사랑하는 아이,
마음은 심약하지만 심지 만큼은 올곧은 아이, 다프넨은 그 아이와 오늘 만나기로 약속했다. 어제 스콜리에서 선뜻 말을 걸어온 오이지스는
다프넨에게 다시금 전의 일을 사과하며 어떻게든 그 일에 대한 사과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다프넨은 전에도 오이지스에게 그 일을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오이지스의 간절한 태도에 다프넨은 하는 수 없이 오이지스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오늘의 약속이 그 기회였다.
다프넨은 윈터러를 잠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휘휘 저으며 오늘 만큼은 윈터러를 곁에 두지 않겠다고 마음 먹고 침대 밑에 윈터러를 깊숙이 집어 넣었다. 
다프넨의 발걸음은 장서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마주친 사람들의 시선들 중엔 호의같은 것이라곤 전혀 담겨있지 않았지만 그런 것을
신경쓸 다프넨이 아니었다. 잠시 후 산길을 오르던
다프넨은 밑동이 잘린 나무에 앉아 있는 오이지스를 발견했다.
 
"왔구나. 정말.. 고마워"
 
"뭐가"
 
"난 너한테 정말로 몹쓸 짓을 했었잖아.. 그래도 여전히 날.. 친구로 받아줘서 고마워.."
 
"그 일은 신경쓰지 말라고 했잖아"
 
다프넨의 어조는 오이지스를 어르고 달래는 게 아닌 말 그대로 신경을 쓰지 말라는 약간의 무미건조한 어조였다. 하지만 오이지스는 그래도 좋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이 섬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같은 눈높이에서 대해주는 이는 다프넨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다프넨도 이 점은 오이지스와 그다지
다를 게 없었지만 나우플리온을 제외한 이 섬의 어느 누구의 시선도 개의치 않는 다프넨은 오이지스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고 해서 선뜻
선의를 베풀지는 않았다. 오이지스의 유약한 모습에서 유악하기만 했던 자신의 옛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아 약간의 동정심이 들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한테 뭘 가르쳐줄 생각이야"
 
어제의 대화에서 다프넨은 오이지스에게 정녕 지고 있는 죄책감을 덜고 싶다면 이 섬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 한가지를 가르쳐 달라고 말했고
오이지스는 그런 말을 한 다프넨에게 선뜻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겠다 말했었다.
 
"어.. 그게... 수영이 어떨까 싶은데.. 괜찮겠어?"
 
오이지스의 선택은 옳았다. 대륙 출신의 다프넨에게 달의 섬에 오기 전 까지는 딱히 수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지만 앞으로 이 곳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수영은 가히 필수불가결이었다. 다프넨은 오이지스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인 뒤 오이지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이지스는
다프넨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섰다.
 
"어디서 가르쳐줄 생각인데"
 
"가장 좋은 데는 강가긴 한데.. 거기에 가면 아마 많은 방해를 받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내가 아는 장소가 있어. 거기로 가자"
 
다프넨도 수영을 배우기 가장 적합한 장소로 마을 중앙에 난 강가를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오이지스의 입장에선 그 곳은 다른 아이들의 훼방을
받기에도 좋은 장소였다. 다프넨은 오이지스의 사정을 헤아리기로 하며 순순히 오이지스의 뒤를 따라갔다.
 
오이지스와 다프넨의 발걸음이 다다른 곳은 섬의 외진 곳에 위치한 해안가였다. 어째서 오이지스가 이런 곳을 알고 있는지는 몰라도 파도도 적당히
부서지고 수심도 얕아 보이고 크게 자라난 나무들이 즐비한 숲이 볕을 가려주는 게 명당이라고 봐도 좋은 장소였다.
 
다프넨은 신발을 벗은 채 모래사장을 밟았다. 다프넨의 체중이 모래사장을 사뿐하게 짓누르는 동시에 따뜻하게 뎁혀진 수많은 모래알들이 다프넨의 발가락 사이사이를 파고 들었다. 상당히 낯선 감촉, 다프넨은 저도 모르게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오이지스는 벌써 옷을 적당한 수준까지 탈의한 다음
바다에 몸을 담구고 있었다.
 
"들어와. 어려워 할 필요 없어"
 
다프넨에게 있어 물에 몸을 담궈본 적이라곤 렘므에서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보였던 적 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오이지스는 역시 섬사람 답게 물
속에서 유려한 움직임을 보여줬다. 땅다람쥐란 별명이 무색해질 정도였다. 다프넨은 오이지스가 저 정도인데 다른 아이들은 얼마나 대단할까라고
생각하며 상의를 말아올렸다. 바지는 어떻게 할까 하고 잠시 생각했지만 이내 무릎까지 오게 바지를 몇겹이고 접었다.
 
찰박
 
다프넨의 맨발이 드디어 바다와 맞닿았다. 이윽고 바다에 잠긴 다프넨의 신체는 발바닥에서 발목으로 발목에서 종아리로 점차 그 깊이가 더해져 갔다.
하체가 완전히 잠긴 다프넨은 다리를 느리게 저으며 오이지스가 있는 쪽으로 나아갔다.
 
"어떻게 날 가르칠 생각이야"
 
 
"아.. 일단은 이렇게 해봐"
 
다프넨과 다르게 바닥에 발을 붙이지 않은 오이지스는 몸을 돌려 바닷물 위에 둥둥 떴다. 다프넨은 오이지스가 한 대로 따라 하려 했지만 좀 처럼 쉽지 않았다. 다프넨은 엉거주춤 움직이기를 반복하면서 바닷물을 적잖게 들이켰다. 오이지스가 뭍에서 땅다림쥐란 별명을 들었다면 다프넨은 물 안에서
만큼은 물도마뱀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게 어울릴 것 같았다.
 
"미,미안해. 내가 아버지한테 배웠던 방식이어서 제법 쉬운 건줄 알았는데 너한텐 어려울 수도 있겠단 생각을 못 했어"
 
가르치는 것에 영 소질은 없었지만 자신과 같은 나이의 오이지스에게서 바랄 재능도 아니었다. 되려 마음가짐 하나는 자신에게 신성 찬트를
가르치는 이솔렛 보다도 낫다고 다프넨은 생각했다. 다프넨은 오이지스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수영에 소양이 없는 자신을 탓했다. 그리고선 군말
하지 않고 오이지스가 가르쳐준 동작을 몇번이고 반복했다.
 
그 한가지를 익히는데 다프넨은 몇시간을 소비했다.
 
그래도 한가지 동작을 익히니 다음 동작을 익히는데 걸리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얼마 안 가 다프넨은 오이지스의 흉내를 얼추 낼 정도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다프넨도 어느샌가 부쩍 늘어난 자신의 수영 실력에 약간은 놀란 눈치를 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나가자"
 
오이지스는 숲 쪽을 올려다 보며 말했다. 숲에 난 나무들의 초록색 윤곽에 주홍빛 후광이 비치고 있었다. 다프넨은 그 짫았던 순간들이 이렇게 긴 시간이었단 사실에 새삼 놀라며 모래사장으로 올라왔다. 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모래알들이 발바닥에 철썩 철썩 들러붙었다. 다프넨은 넓직한 바위를 찾아 그 곳에 앉았다. 다프넨 보다 늦게 나온 오이지스도 다프넨이 있는 바위 쪽으로 가 다프넨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장점으로 작용하던 그늘이 이젠 단점으로 다가왔다. 이렇게 그늘진 곳에선 젖은 몸과 옷을 말릴 수가 없었다. 견습 순례자가 되기 위한 의식으로 머리카락을 잘랐기에 망정이지 머리카락 마저 길었더라면 미역을 머리에 얹은 것 같은 불쾌함을 느꼈을 것이다. 다프넨은 오른손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털고 난 뒤 바지를 짜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잠깐만!"
 
오이지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황급히 돌렸다. 다프넨이야 나우플리온과 함께 생활하면서 남자끼리 맨 몸을 보이는 것에 대해 일말의 거부감도
들지 않았지만 오이지스 까지 그럴 리는 없었다.
다프넨은 그제서야 그 사실을 안 듯 허리춤에 올린 손을 거두었다.
 
"미안"
 
"아니야.. 나야말로 당연한 일을 가지고 놀란 것 같아"
 
"서로 등을 돌리자. 그럼 괜찮겠지"
 
오이지스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다프넨과 오이지스는 서로 등을 돌린 채 젖은 옷가지를 벗었다. 물을 먹어 묵직해진 천이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옷의 물기를 짜낸 다프넨과 오이지스는 숲을 지나 마을 어귀까지 다다랐다. 다프넨은 상의를 입지 않고 가지런히 개어 어깨에 얹고 있었다.
태양은 이제 거의 저물어 온기를 거의 느낄 수가 없었지만 다프넨에게 이 정도의 서늘함은 평소 허리춤에서 느꼈던 냉기보다야 따스하다고 할 수
있었다.
 
"난 장서관에 들렀다 갈게.. 아, 그리고 오늘 일은 정말로 고마웠어"
 
"나아먈로"
 
오이지스는 다프넨이 내민 손을 수줍게 붙잡았다. 제로 아저씨의 장서관과 마을로 가는 갈림길에 선 다프넨과 오이지스는 각자의 길을 걸었다.
오이지스는 터덜터덜 걸어가는 다프넨의 뒷모습을 말 없이 바라보다 총총걸음으로 장서관을 향해 뛰어갔다.
 
마을에 다다른 다프넨에게 다시 한번 일말의 호의도 섞이지 않은 시선들이 꽂혀왔다. 유독 뒤통수가 간지러워 뒤를 돌아보니 헥토르를 중심으로 한 아이들의 무리가 다프넨을 향해 증오심 담긴 눈총을 쏘고 있었다. 헥토르만이 유일하게 아무 감정 없는 시선으로 다프넨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헥토르 무리의 시선은 곱지 않았을지언정 다프넨에게 시비를 걸거나 하진 않았다. 그렇기에 다프넨은 그들을 가벼이 무시한 채 나우플리온의 집에
당도했다.
 
"내 처신을 조심하라고 일렀을 텐데 어딜 그렇게 싸돌아 다니다 온 거냐"
 
나우플리온은 문 옆에 기댄 채로 다프넨을 맞이했다.
 
"바다에 다녀 왔어요"
 
"확실히 그 꼴을 보니 바다에 다녀왔단 건 알겠다만, 무슨 바람이 불었길래 제발로 바다까지 찾아간 게냐?"
 
"선약이 있었다는 걸 생각해냈거든요"
 
"너 자신과 약속이라도 했단 얘기로 들리는데"
 
"일단 들어가서 얘기할 수 없을까요? 여간 찝찝한 게 아니네요"
 
다프넨은 착 붙은 바지를 당겼다 놓았다. 나우플리온은 발목의 탄력으로 몸을 돌려 재빠르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프넨도 나우플리온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그 순간.
 
"넌 저기서 씻고 와라. 냄새나는 놈을 집에 들일 수는 없다"
 
라고 말하며 나우플리온은 문을 매몰차게 닫았다. 다프넨은 팔을 들어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았다. 짠내가 변질된, 형언할 수 없는 고린내가
풀풀 풍겨왔다. 다프넨은 후각이 반응하는 즉시 코를 틀어막으며 우물가로 향했다. 양동이에 물을 담은 다프넨은 양동이에 담긴 물을 주저 없이
자신의 머리 위로 끼얹었다. 날씨는 이미 식을 대로 식었지만 그와는 별개인 청량함이 온 몸을 휘감았다. 다프넨은 냄새를 확실히 씻어내기 위해
물을 두어번 더 끼얹었다.
 
몸을 씻은 다프넨은 문을 두드렸다.
 
"문 잠근 적 없다"
 
돌아온 건 나우플리온의 담담한 말이었다. 다프넨은 문을 여는 순간 씩 웃으며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동시에 부드러운 감촉이 얼굴을
강타했다.
 
"친절이 과도하신 걸요"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이 던진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비볐다.
 
"잘 닦기나 해. 물 떨어지지 않게"
 
그렇게 말은 했어도 이미 다프넨의 주위엔 물방울이 수도 없이 떨어져 있었다. 몸을 다 닦은 다프넨은 의자에 수건을 걸친 다음 옷을 갈아입었다.
나우플리온은 그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프넨의 맞은 편에 앉았다.
 
"자, 아까 하려고 했던 이야기나 한번 해봐라"
 
"그렇게 원하신다면야"
 
"넌 말할 의무가 있어. 날 안달난 놈으로 만들지 말란 말이다"
 
단어 자체는 강경했지만 어조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다프넨은 수건을 걸어놓은 자리에 앉아 나우플리온을 마주보았다. 이내 다프넨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나우플리온에게 낱낱이 말해주었다. 다프넨이 말하는 동안 나우플리온은 쉽사리 표정을 바꾸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된 거에요"
 
"..그렇단 말이냐"
 
다프넨이 말을 마쳤고 나우플리온이 적당히 응수했다.
 
"수영이라, 좋지. 언제 시간을 내서 가르칠 작정이었는데 어떻게든 터득했다니 그것 참 편하구나"
 
다프넨은 보았다. 나우플리온의 얼굴에 비친 씁쓸한 기색을, 그리고 그 이유 또한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다.
 
"오이지스 때문인가요?"
 
뜬금 없이 튀어나온 말일지도 몰랐지만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의 표정을 짐작해 보아 자신이 꺼낸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라고 직감했다.
 
"...."
 
"..당신은 제 앞에서 너무 솔직해지는 것 같아요"
 
"이젠 그런 것도 읽을 수 있단 말이냐"
 
"아무렴. 당신의 표정은 읽기가 쉬워요"
 
나우플리온은 헛웃음에 가까운 반토막의 숨을 내쉬었다. 다프넨도 의아하긴 했었다. 나우플리온은 분명 이 곳에 사는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고 있는 오이지스에 대해선 다프넨과 단 둘이 있을 때조차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었다.
오늘 다프넨이 오이지스를 직접 언급하고 나서야 이런 미적지근한 반응이라도 보이고 있었다.
 
"보리스, 넌 오이지스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알고 있냐"
 
"아픔을 뜻한다고 들었어요"
 
"그렇지.."
 
나우플리온의 말끝이 자취를 남겼다.
 
"너도 아마 봤을 거다. 그 녀석이 다른 놈들에게 짓밟히고 있던 모습을"
 
"그 덕분에 곤란에 처하기도 했었죠"
 
다프넨은 오이지스와의 첫만남을 회상했다.
 
"그 녀석이 약해서 그런 이름을 부여 받았는지, 약한 이름을 부여 받았기에 그 녀석이 약해졌는지는 몰라도 그 아이는 자신의 이름이 무얼 뜻하는지
알게된 순간 부터 이름의 뜻을 실천 받아왔지"
 
'받아왔다'는 것은 오이지스 스스로가 행한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강제성을 부여했다는 의미가 된다. 다프넨은 오이지스에게 강제성을 부여한
이들을 어림짐작 할 수 있었다.
 
"당신은 그 사실을 묵인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는 건가요?"
 
다프넨은 핵심을 골랐다.
 
"아마 아닌 쪽이 더 높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우플리온이 그렇게 말한 이상 다프넨도 더 이상 나우플리온의 말을 굽이려 들지 않았다. 그 대신 새로운 주장을 제시했다.
 
"오이지스 같이 약한 아이는 섬 뿐만이 아니라 대륙같은 곳에서도 핍박을 받을 수 있어요. 굳이 이 곳이 특별한 곳이기에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네 말이 옳다. 같은 또래들이 자기 보다 약한 아이 하나를 괴롭히는 건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 하지만 말이다... 대륙에는 위선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약자를 배려하는 미덕이 있다. 그 아이에게 손을 내밀어줄 사람 또한 있다는 얘기지. 하지만 섬은 다르다. 이 곳에 있는 것이라곤
살아남기 위한 규칙이 전부다. 약한 자가 살아남지 못 하는 것은 당연한 얘기가 되어 버리는 거지. 비록 그 종이 인간이라 할지라도"
 
다프넨은 오이지스와의 첫만남에서 부터 알 수 있었다. 강제로 눕혀져 온 몸을 짓밟히던 오이지스를 바라보던 시선들 중엔 동정의 눈길이 없었다는 걸. 나우플리온의 말 처럼 이 섬에서 약한 자는 당연히 공격 받아야만 했다.
 
"약한 것은 곧 죄..란 건가요"
 
어디서나 통용될 만한 관용어구였지만 다프넨이 있는 곳은 그 관용어구가 나름 처절하게 적용되는 장소였다.
 
"섬의 씌울 수 있는 가장 큰 누명이지. 스스로가 바뀌지 않는 이상 절대로 벗을 수 없는.."
 
"당신도 그 누명을 씌운 사람들 중 한명일 수도 있어요"
 
다프넨은 돌연 비난조로 나우플리온을 다그쳤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사제, 그것도 힘을 관장하는 검의 사제다. 너에겐 변명으로 들릴 소리일 테지만"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이 어떤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했다. 검의 사제는 힘을 관장하는 사제, 이 섬에서 약한 것은 죄이기에 힘은 곧 정의를 상징했다.
하지만 정의가 힘을 상징하지는 못 했다. 그렇기에 나우플리온이 오이지스의 일에 참견하게 되는 것은 암묵적으로 깔린 섬의 정의를 어기는 것이
되어버렸다.
 
"..이 얘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제가 외람된 주제를 끌어낸 것 같군요. 미안해요"
 
이야기의 구조는 어느새 다프넨이 나우플리온을 문책하는 것 같은 구조가 되어 있었고 다프넨은 이 사실을 느끼자마자 대화를 끊어버렸다.
나우플리온은 별 다른 말 없이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색한 기류가 둘의 사이를 휘 맴돌았다.
 
다프넨은 어째서 나우폴리온에게 까지 순간적으로 냉담해 졌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침대에 누워서 가만히 생각해 봤지만 오이지스에게서 자신의 과거의 단편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과거의 다프넨은 현재의 오이지스 보다 강했다. 하지만 절대적인
관점과 다프넨 스스로의 시점에서 과거의 자신은 현재의 오이지스와 다를 바 없이 약했다. 하지만 예프넨은 자신의 나약함을 감춰 주고 보듬어 주었다.
 
아주 잠시일 뿐이었지만 그가 있었기에 지금의 다프넨이 있을 수 있었다.
 
다프넨은 깨달았다. 내심 오이지스를 동정하다고 있었다는 것을. 오이지스에겐 잠깐의 버팀목이 될 만한 사람 조차도 주위에 없었던 것이다.
 
"불 끈다"
 
의식의 흐름은 시간의 흐름 또한 가져다 주었다. 창 밖은 달여왕이 자그맣게 빛나고 있는 신하들을 거느린 채 그 서늘한 위용을 조용히 내뿜고 있었다.
나우플리온은 양초를 불어서 꺼버렸다.
 
감각에 의지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곤 창밖으로 쏟아지는 빛 그리고 풀벌레들 소리와 깊이가 있는 나우플리온의 숨소리, 가장 가까이 있는 자신의
숨소리였다.
 
"..오늘은 되도록이면 꿈 같은 거 꾸지 마라"
 
"낮에도 말했잖아요. 꿈을 가려 꿀 수는 없다고"
 
"노력, 아니.. 기원이라도 해봐라"
 
굳이 기원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건 다프넨이 한창 배우고 있는 신성 찬트 때문이었다. 사실 배운 건 거의 없었다. 현재로선 이솔렛과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배운 것도 몇마디 노랫말이 전부였다. 기원같은 걸 연습한 적은 없었다. 연습한다고 기원같은 추상적인 것의
숙련도가 늘어날 일이 없기도 하고 말이다.
 
"노력은 해보도록 하죠"
 
"기원을 하라니까 이 녀석아"
 
"기원하도록 노력한다는 얘기에요"
 
언뜻 이상하게 들리는 말,나우플리온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내 다프넨의 입에서도 나우플리온과 톤만 다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고요하기만 했던 달여왕의 밤에 약간의 익살스러움이 곁들어진 절호의 순간이었다.
 
"잘 자라"
 
"당신도요"
 
-------------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