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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을 찾아주었습니다
게시물ID : boast_118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活人
추천 : 2
조회수 : 70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10/03 15:33:46
어제는 너무 기분이 안 좋았습니다.

작년 열심히 일했던 직장에서 잘리고, 좌절감에 빠져 허우적 대다가 다시 이력서를 마구잡이로 넣는데 면접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어요. 
어디서 부터 잘못된 건가, 나는 어떻게 살아왔나, 나는 얼마나 쓰레기 같은 삶을 살고 있나, 이런 생각들을 계속 곱씹고 있습니다. 답답해서 없는 돈을 털어 술을 마시고, 숙취에 시달리고 빚이 생기고 다시 취업 포털을 보고 자기소개서를 쓰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제는 간만에 면접이 있었어요. 조그만 기업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면접을 봤습니다. 일하고 싶은 분야에서 일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겠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면접 본 그 회사에 갈 수 없었습니다. 근속년수가 짧고, 경영난 때문에 사람을 대거 퇴사시켰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여기도 아니다'라고 단번에 마음을 접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아쉬워도 말이죠. 건물을 나오면서 무수한 욕지거리들을 내밷고 한숨을 몰아쉬고 담배를 펴댔습니다. 
집에 가기가 너무 싫었습니다. 낮짝을 들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없는 돈을 털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취해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습니다.

택시에서 내릴 때 지갑을 하나 주웠습니다. 술김에 저는 제가 제 지갑을 놓고 내릴 뻔한걸로 착각을 하고 지갑을 주운 거지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지갑이 아닌 정품 루이비통 반지갑이 손에 들려있었습니다. 안 쪽에는 메이드 인 프랑스라는 활자가 찍혀있었습니다. 신용카드가 두 장, 만원 2장과 천원 2장, 명함 2장, 메모 몇 장. 그리고 전화번호들이 적혀있는 접혀진 종이 한 장. 

새벽 두 시. 우선 카드회사에 전화를 해서 습득신고를 했습니다. 분실신고가 들어온 것이 없다고 하길래 신고가 들어오면 내일 연락을 달라고 했습니다. 전화번호가 적혀진 종이에 있는 모든 전화번호를 수신인에 넣고 문자를 적었습니다. '택시 안에서 지갑을 습득했습니다. 신분증이 없어 누구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용카드와 돈 몇장이 있고 지인분들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가 있어 문자를 드립니다. 주위에 지갑을 잃어버리신 분이 계시면 연락주세요' 
라는 요지의 글이었습니다.

아침이 되고 눈을 떴을 때 몇 통의 문자가 와있었습니다. 누구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문자가 한 통. 가까운 지구대나 파출소에 갖다 놓으라는 문자가 한 통.그리고 요즘 같은 세상에 너무 감사합니다,라는 요지의 장문의 문자가 한 통이 있었습니다. 그냥 경찰서에 갖다 줄까 하다가 귀찮아서 지갑 안 신용카드에 양각으로 찍혀있는 이름을 보고 적어 다시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 분들의 지인이신 분들은 연락바랍니다, 라고 말이죠. 

다시 한 번 문자를 보내니 감사하다고 문자를 보내신 분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50대의 아버지뻘 어르신이었습니다. 아침부터 이런 좋은 소식을 듣게되어 너무 기분이 좋고, 아직 세상은 살만한 것 같다며 자기 지인이 지갑을 분실한 듯하니 알리겠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식사를 대접할테니 이름과 살고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하시길래 극구 사양했습니다. 어르신은 자신이 꼭 식사를 대접해야겠다며 연락처에 저장해 놓을테니 근처에 가면 꼭 연락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기분이 묘했습니다. 이런 일은 지금껏 살면서 없었거든요. 뭔가 심장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마구 들었습니다. 곧 주인에게서 연락이 올 것이라는 이상한 확신과 함께 말이죠.
이윽고 주인의 자식분들이 문자를 보냈습니다. 어머니가 분실하셨고, 감사하다고 말이죠. 얼마 뒤 주인분이 전화를 하셨습니다. 으레 분실물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으면 어디서 찾았냐, 몇시에 찾았냐, 연락은 어떻게 하셨냐, 습득하신 분은 어디 계시냐, 물건을 전달받을 수 있냐라는 질문 공세를 받기 마련입니다.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의 중년 여자분. 우편으로 부쳐줄 수 있냐는 말에 조금 귀찮아졌습니다. 하지만 별 수 없으니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여자분은 남편과 상의해서 오늘 중으로 받으러 갈 수도 있으니 연락하겠다고 했습니다.

몇 분 안 지나서 남편분에게 전화가 옵니다. 어느 지역에 있는지를 묻고, 어떻게 지갑을 받아야 하는지를 묻길래 아내분께서 우편으로 받거나 직접 오시겠다는 이야기를 하셨다고 하니 오늘 중으로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왜 이다지도 안 오는가, 할 때쯤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급한대로 후드티를 입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슬리퍼를 신고 나갔습니다. 제 자신이 봐도 정말 추레하더군요. 집 밖으로 나가보니 고급 검정 세단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중년의 부부. 하염없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기다리는 모습에 저 사람들인가 보다, 하고 직감했습니다.

'지갑 찾으러 오신 분인가요?'라고 크게 말하니 급하게 뒤돌아서며 반색합니다. 지갑을 건네드리고 인사하고 돌아서는 찰나 잠깐만 있어보라며 차 안에서 포도 박스를 꺼내려고 하는 것을 말렸습니다. 집에 먹을 사람이 없다, 괜찮다하니 부부 두 분다 가져가라고 재촉합니다. 도망치듯 손사래를 치며 인사하고 뒷짐을 지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또 얼마 후 문자가 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직 세상은 살만합니다. 꿈을 이루시고 행복하세요'

누구나 모두 무언가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아찔했고 안도했으며 더러는 아쉬웠던 기억들. 가끔씩 행운의 여신이 손길을 내밀어 잃어버린 것을 찾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하지요. 이렇게 우리가 예상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그 어떤 계기가 있기에 행운은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그 지갑을 잃어버릴뻔한 분에게, 저는 행운이었을까요.

비단 물건만이 아니라 잃어버린 목표, 꿈, 사랑, 인연...우리에게 소중하지만 잃어버린채로 있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그렇게 불안하게 또 애타게 찾아 헤메고 있나봅니다. 그리고 간절하게, 열심히 찾다가 어찌할 줄 모를 때가 오고는 합니다. 그럴 때 아주 가끔은, 정말 아주 가끔은 '사람'이라는 행운의 힘을 믿고 싶습니다. 사람이 가진 선한 마음들이 수호천사의 날개를 달고 날아와주기를 기대하고 기다리고 싶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의 마음이 모여서 누군가에게 가닿는다면 이 세상의 행운은 더욱 빛을 크게 발할 것이라 믿습니다.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있었던 일을 천천히 곱씹으며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소설가 이외수 선생님이 쓰신 글귀가 문득 생각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천사가 그대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대 자신이 천사가 되어 불행한 자들에게 손을 내밀어라'

저는 비록 천사같은 심성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천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행운이라는 이름으로 또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잃어버린 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얼마나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가요. 행운이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또 누군가에게행운이라는 이름의 수호천사가 되어주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p.s: 스스로 행운이니, 천사라니 이야기하니 너무 생색이 심한 걸까요. 지갑을 찾아주려 했던 건 조금의 감정이입과 이타심, 그리고 생색과 겉치레, '착한일을 했다'는 허영심도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p.s2: 게시판 성격에 맞지 않는 듯하여 고민게에서 자랑게로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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