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희 처단 '정의봉'은 4천원짜리 홍두깨. 인간 쓰레기 치우는 청소부 심정으로 거사"
어제(23일) '살인자' 한 사람을 만나고 왔습니다. 사람을 죽였으니 그가 '살인자'인 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는 좀 '특별한' 살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한국인 절대 다수가 국부(國父)로 추앙하는 독립투쟁가 백범 김구(金九)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安斗熙)를 처단한 사람입니다. 23일은 그가 안두희를 처단한 지 꼭 15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날 서울 용산구 효창동 백범 묘소에서는 그의 15년 전 '의거'를 기리는 간단한 기념모임이 열렸습니다.
그 '살인자'의 이름은 박기서(朴琦緖). 올해 나이 61세, 직업은 개인택시 운전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199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그는 당시 인천시 중구 신흥동에 살고 있던 안두희를 찾아가 '정의봉(正義棒)'으로 현장에서 처단했습니다. "국부를 시해한 죄인이 천수를 다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습니다. 이 일로 그는 3년형을 선고 받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범행동기가 정상참작돼 1998년 3·1절 특사로 풀려났습니다.
앞서 지난 17일(월) 부천역에서 그를 만나 미리 인터뷰를 했습니다. 약속 시간인 오후 2시가 되자 그가 자신의 생계수단인 택시를 몰고 부천역 북부광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역사 2층에서 내려다 보니 160cm의 작은 키인 그가 더욱 작아 보였습니다. 우리는 역사 인근 설렁탕집으로 옮겨 늦은 점심을 함께하면서 한 시간여 식사를 겸해 대화를 나눴습니다. 15년 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 것은 그로선 유쾌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요, 아니 어쩌면 고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백범 시해한 '쓰레기' 안두희, 4000원짜리 정의봉에 맞아 죽었다
▲ 인터뷰를 위해 택시 영업 도중에 시간을 내 필자를 만나러 온 박기서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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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얘기부터 먼저 깨낼까 고민하다가 일단 15년 전 그날의 상황부터 풀어내 보기로 했습니다.
- 15년이 지난 오늘에서 감회라면.
"다시 생각해 봐도 그때가 다시 없는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그때 안두희를 처단하지 않았다면 안두희는 아마 자연사했을 것이라는 얘기임). 하늘이 도왔는지 그때 다행히도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사자(死者, 안두희)에게는 인간적으로는 미안하고 또 가슴 아픈 일입니다만, 저는 누군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 혹 겁을 주려고 했던 것인가요? 아니면 처음부터 죽일 작정을 하고 간 것인가요?
"사전에 철저한 계획 하에 처단할 작정을 하고 찾아갔었습니다."
- 안두희를 왜 처단하려고 했습니까?
"국부를 시해한 자가 세 치 혀를 놀리며 천수를 다하는 것을 그냥 놔둘 수 없었습니다. 인간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부의 심정으로 (안두희를) 처단했습니다."
- 언제부터 안두희를 처단할 생각을 하게 됐습니까?
"권중희 선생이 마포구청 앞에서 안두희를 구타한 사건을 접하고서 저렇게 때릴 게 아니라 처단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때부터 마음먹었습니다."
▲ 백범 시해범 안두희
안두희는 생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응징을 당했습니다. 1960년 4·19혁명 후 '김구 선생살해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하자 안두희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잠적했는데 그 무렵 길거리에서 몇 차례 테러를 당했습니다. 그러다가 1961년 4월 18일 진상규명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났습니다. 1965년에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납업을 하던 중 백범독서회장 곽태영(2008년 작고) 선생에게 발각돼 목을 찔렸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후 그는 20여 년간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숨어 살다가 1987년 3월 28일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민족정기구현회장 권중희(2007년 작고) 선생에게 붙잡혀 몽둥이 응징을 당하면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이후 그는 또다시 행방을 감춘 채 인천에서 숨어살다가 15년 전 박 선생의 '정의봉'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 정의봉은 언제, 어떻게 준비한 것입니까?
"(안두희를) 처단하기로 결심한 후 도구로 뭘 사용할까 고민하다가 부천시장 내 그릇가게에 가서 홍두깨 비슷한 몽둥이(40cm 크기) 하나를 4000원을 주고 샀습니다. 머리 부분에 매직으로 '정의봉'이라고 써서 거사 때 사용했습니다."
지난 23일 그는 15주년 기념모임 때 정의봉 실물을 가지고 왔었습니다. 만져 보았더니 나무 재질이 단단해 가격할 경우 치명적인 피해를 줄 만했습니다. 거사 후 현장에 두고 온 것을 경찰이 증거물로 수거했다가 재판 후 되돌려줘 현재는 그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 안두희를 응징한 '정의봉' 15년 전 안두희를 응징할 때 사용한 '정의봉'과 그 때 썼던 안중근 의사 글귀를 들고 있는 박기서씨
- 안두희를 처단할 때 두렵지 않았나요?
"처음엔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막상 안두희를 마주치게 되고 또 백범 선생 생각을 하게 되자 그 다음부터는 그런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 천주교 신자인데…, 인간적인 갈등 같은 건 없었나요?
"집안의 어린 아이들도 생각나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꼭 해야 할 일이고 또 기회는 이 때 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 곧바로 자수했다고 들었습니다.
"안두희가 절명한 것을 확인하자 성공했다는 생각도 하기 전에 제 자신이 한동안 공황 상태에 빠져 들었습니다. 잠시 멍하니 마루에 섰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집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삼정동성당으로 행했습니다.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할 요량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만나 뵙고 싶었던 신부님이 안 계셔서 다시 심곡동 본당 성당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한 신부님을 뵙고 고해성사를 하였으며 그 신부님이 경찰서로 연락하여 그날로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 사전에 거사를 상의하거나 또 도움을 받은 분이 있습니까?
"평소 다니던 성당에서 1년에 몇 차례씩 고해성사를 하곤 했는데, 하루는 신부님에게 '백범 시해범 안두희를 제 손으로 처단하고 싶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만일 그런 일이 실지로 일어난다면 그건 역사적인 사건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 신부님은 저를 잘 모르는 분이었지만 그 신부님의 말씀이 작은 위안이 되었습니다."
이 일로 그는 구속, 기소돼 1심에서 7년 구형에 5년 선고를 받았으며, 2심에서 5년 구형에 3년 선고를 받고 처음으로 감옥살이를 하였습니다. 이후 안양교도소에서 1년 남짓, 청주교도소에서 6개월가량 옥살이를 하다가 범행동기가 정상참작이 돼 1998년 3·1절 특사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 감옥살이는 어땠습니까? 일화 같은 건 없습니까?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기에 마음에 부담은 별로 없었던 데다 독립유공자 조문기(2008년 작고) 선생님, 저보다 앞서 안두희를 응징하신 곽태영 선생님, 권중희 선생님 등이 자주 면회를 와주셔서 큰 힘이 됐습니다. 우스개 같은 일화 하나를 소개해 드리자면, 그때 조폭 출신이 방장으로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제게 '얼마를 받기로 했느냐?'고 묻더군요. 아마 그들은 대가를 조건으로 그런 일도 하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제가 알고 있는 그의 감옥시절 일화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박 선생이 안양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어느 날 박 선생 앞으로 엽서가 한 통 배달됐습니다. 발신자는 '리영희'. 그런데 그때 박 선생은 리영희가 누군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래서 같은 감방에 있던 한총련 출신 청년에게 리영희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더니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알려 주더라는 겁니다. 그 엽서에서 리영희 선생은 박 선생을 '의기 남아(義氣男兒)'라고 칭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박 선생은 출감 후 연희동으로 리 선생을 찾아뵈었고, 지난해 말 리 선생 빈소에 조문을 오기도 했습니다.
▲ 작년 5월 리영희 선생이 입원해 있던 병실을 찾은 박기서씨
- 감옥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생활하면서 피해를 본 적은 없습니까?
"있습니다. 우선 취직이 잘 안 됐습니다. 15년 전 거사 당시 부천에서 버스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출감 후 복직은 바로 됐습니다. 그런데 사정이 있어서 거길 그만두게 되었는데 이후로 취직이 안되더라구요. 이유는 제가 '살인'을 했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서울로 가서 한동안 버스 운전을 하다가 개인택시 자격을 따서 지금의 택시를 하고 있습니다."
안두희 처단자는 160cm의 단신... "배운 사람이 잘못해서"
어떤 이는 박 선생이 안두희를 처단했다고 하니 덩치도 크고 힘깨나 쓰는 사람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그는 160cm의 크지 않은 키에 몸집도 왜소한 편입니다. 또 60대 초반의 육체노동자치고는 얼굴도 맑으며 곱상한 편입니다. 게다가 그는 무슨 '학습' 같은 걸 통해 이념이나 주의주장에 매몰된 사람도 아닙니다. 집안 사정으로 학교도 초등학교밖에 다니질 못 했다고 합니다. 대체 그런 그가 어떻게 범인(凡人)이 하기 쉽지 않은 일을 하게 됐을까요?
- 성장기와 집안사정이 궁금합니다.
"전북 정읍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못했습니다. 스물한 살 때 서울로 올라 왔는데, 셋째 형이 먼저 올라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서당에 나가 한문을 배웠습니다. 부족한 공부를 보강하기 위해 틈나는 대로 이런저런 책을 읽었습니다. 그때 느낀 생각 중 하나는 많이 배운 사람들이 학식에 걸맞은 바른 행동을 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 구체적으로 예를 하나 들자면요?
"안두희가 썼다는 <시역(弑逆)의 고민>이라는 책의 복사본을 우연히 하나 구해서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백범 선생을 시해할 당시 안두희는 장교였으니 엘리트라면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런 자가 돈과 권력에 취해 이승만의 하수인을 자처하며 주구 노릇을 했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근대 이후 우리 역사를 보면 저 같이 못 배운 사람들보다는 배운 사람들이 못된 짓을 한 경우가 더 많았다고 생각됩니다."
그의 입에서 돌연 '이승만' 석 자가 튀어 나오길래 최근 이승만을 둘러싼 몇몇 논란에 대해 몇 마디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KBS의 '이승만 특집방송'과 자유총연맹에서 남산에 이승만 동상을 세운 일 등 말입니다.
- 최근 이승만 대통령을 둘러싼 이런저런 논란에 대해서도 알고 계신가요?
"네, KBS가 '이승만 특집방송'을 한다고 할 때 다른 동지들과 함께 KBS 앞에서 열린 농성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4·19혁명으로 이미 역사적 평가가 내려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인물에 대해 공영방송에서 미화작업을 하는 것은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최근 뉴라이트 진영의 역사교과서 왜곡 작업도 알고 있습니까?
"언론보도를 통해 들어서 조금은 압니다.
차마 입에 담기도 뭣한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주장은 도무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국선열들의 항일투쟁사를 조금이라도 배운 자들이라면 그런 주장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백선엽-이승만에 이어 머잖아 박정희 미화 작업이 뒤따를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는 보수세력의 정권 재창출을 위한 음모라는 것도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종로1가 한일관에서 열린 박기서씨 석방 환영 모임(1998. 3. 24). 오른쪽부터 박기서씨 부인, 곽태영 선생, 박씨, 진채호 선생
그는 요즘 작은 '감투'를 하나 쓰고 있습니다. '효사모 대표'가 그것입니다. '효사모'는 '효창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약칭인데요, 효창원에는 백범 선생을 비롯해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3의사, 그리고 임정 요인 세 분(이동녕, 조성환, 차이석)의 묘소가 있습니다. '효사모'는 효창원 성역화작업 등 효창원 묘역의 제자리 찾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백범 묘소에는 자주 가십니까?
"요즘은 택시일 하느라고 수요일, 일요일밖에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가기는 어렵습니다만, 그래도 더러 짬을 내서 찾기도 합니다. 백범 관련 무슨 행사가 있으면 그때는 가능하면 참석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 효사모 일은 잘 되고 있습니까?
"뜻있는 분들 몇 분이 모여서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만, 무얼 실행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효창원 선열 묘역의 역사성과 의미를 널리 알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관계당국에 촉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효창원 성역화는 단순히 묘역 세 군데를 정비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우선 묘역 앞에 있는 효창운동장을 이전하고 이 일대를 백지에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묘역 정비와 함께 후세 교육의 장으로 삼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시일이 걸리더라도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일본 장교 스치다 처단한 백범... 그를 따랐다
▲ 박기서씨 의거 15주년을 맞아 23일 낮 효창원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열린 기념모임
그의 의거 15주년인 23일 오전 11시. 애국선열후손인 차영조, 유종하, 신창우, 황의형 선생, 4월혁명회 정동익 회장,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효사모 회원, 청년백범 회원 등 남녀노소 20여 명이 백범 묘소 앞에 모였습니다. '청년백범'의 조선동 회장 사회로 간단한 기념행사가 열렸습니다. 국민의례에 이어 사회자의 요청으로 김삼웅 전 관장이 박 선생 의거의 의의에 대해 간단히 언급했습니다.
"백범 선생이 치하포에서 일본군 장교 스치다를 처단할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국모(명성황후)를 살해한 원수가 버젓이 활보하는데도 이를 보고 그냥 놔두는 것은 조선 백성으로서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래서 맨손으로 백주에 스치다를 처단하고는 떳떳하게 황해도에 사는 김창수(백범의 아명)가 이런 이유로 죽였노라고 써서 붙였습니다.
그런 백범 선생이 이승만 권력의 사주로 암살되고 암살범 안두희는 한동안 살아 있었습니다. 안두희가 우리와 같은 공간에 살고 있는 것을 분노하면서도 그 누구도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전에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한 바 있는데 행동하지 않고서는 작은 돌멩이 하나도 옮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박기서 선생이 15년 전에 안두희를 처단한 것은 스치다를 처단한 백범의 정신을 이은 것으로, 수많은 애국청년과 지사를 대신해 결행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 이날 참가들을 대표해 임시정부 비서장 차이석 선생의 자제 차영조 선생이 박기서 선생에게 작은 기념패 하나를 전달했습니다. 기념패엔 세로로 쓴 '유방백세(遺芳百世)' 한자 네 글자 아래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遺芳百世
꽃다운 향기여 영원하라
박기서 선생님의 의거 15주년을 기념하여 백정범부들이 드립니다.
2011년 10월 23일
▲ 꽃다운 향기여, 영원하라! 안두희 응징 15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기념패
* 참고로, '유방백세(遺芳百世)'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의사의 애국정신이 영원히 겨레의 가슴 속에 이어지길 바란다는 뜻입니다. 이 네 글자는 백범이 해방 이듬해 일본에서 3의사의 유해를 봉환해와 이곳 효창원에 묘역을 조성한 후 손수 써서 묘역 계단석에 새긴 글자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당시 유해를 발굴하지 못해 나중에 유해를 봉환해 올 것에 대비해 허묘(빈 무덤)을 조성했습니다. 그때 이후 안 의사 묘소는 여태 유해를 모시지 못한 상태입니다.
정운현 기자
박기서씨는 인간쓰레기 안두희를 응징하고
범행동기가 정상참작되어 3년형을 받고 교도소에 복역하던중,
1년6개월 만에 3.1절 특사로 풀려났다
후일담으로 체포당시 형사는 그런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수고하셨다" 라고 하며
수갑과 줄을 매려는 부하들을 제지하며 당당하게 호송될 수 있게 예우를 다해줬다고 한다.
▲효창공원 김구선생 묘앞에서 선 박기서 의사
"나는 비록 배운것은 없으나 최소한 민족을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인간쓰레기 하나를 처단하는 것 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의 심판에 시효란 없다"
-의인 박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