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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가들-프롤로그
게시물ID : readers_89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총균쇠
추천 : 1
조회수 : 21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9/15 18:31:12
파란 하늘 아래로 푸른 초원이 끝 없이 펼쳐져 있다. 물론이다. 시작은 언제나 초원이다. 파란 하늘에는 솜사탕을 찢어서 던져 놓은 것 같은 구름 조각들이 둥둥 떠 있다. 마치 윈도우 XP 디폴트 바탕화면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다. 아마 어느 각도에선가 바라보면 XP 바탕화면과 똑같은 장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럴 것이라고, 나는 얼마간 확신했다. 눈 앞에 있는 초록빛 구릉 너머를 목표로 나는 걷기 시작했다. 발 밑의 풀들이 사박거리며 밟혔다. 풀의 쿠션감이 무척 좋아서 다리에 충격이 거의 전달되지 않았다. 난 걷고 있는 발을 내려다보고, 감탄하고, 그 이후에야 내가 운동화를 신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보는 운동화였다. 하지만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구릉의 꼭대기에 서서 완만한 경사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구릉과 그 다음 구릉 사이의 일종의 골짜기에 해당하는 곳에 하얀색 테이블이 마련된 것이 보였다. 사각 테이블 위에는 노란 꽃을 담은 유리 꽃병이 놓여 있었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흰 색 의자가 놓여 있었다. 한 쪽 의자에는 이미 누군가 앉아 있었다. 꽤나 거리가 있는 데다 밀짚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나는 그녀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베트남 치파오를 연상시키는 하얀색 원피를 입고, 산들거리는 바람에 모자가 뒤짚히지 않도록 모자를 누르고 있었다. 바람에 따라 그녀의 원피스가 하늘거렸다. 나는 다소 빠른 걸음으로 완만한 경사의 구릉을 성큼성큰 내려갔다. 그녀가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가 보이도록 활짝 미소를 지었다. 나도 마주 미소지어 보였다. 아니, 최소한 시도는 했는데 솔직히 어떻게 보였을런지는 모르겠다. "안녕?" 나는 의자에 앉으면서 인사를 건냈다. 괜히 어색한 마음에 심혈을 기울여 의자를 끌어당기고 엉덩이가 닿을 부분을 확인해 보는 등 시선을 회피했다. "안녕." 그녀가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짓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안 돼.'나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진정하자.' "차라도 마실래? 커피?" 난 이미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물었다. "응. 난 따듯한 아메리카노가 좋아." 대답은 늘 같았다. 하지만 난 매번 물어봤다. 일종의 역할극같은 것이다. 이렇게 반복되는 대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진정할 수 있다. 그녀의 얼굴로부터 테이블로 시선을 끌어내리자 그곳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따듯한 커피 두 잔이 머그잔에 담겨 있었다. 뻔뻔하다면 뻔뻔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나는 (그리고 아마 그녀도) 이런 장면에는 이미 익숙했다. 고소한 커피향이 금새 주변에 퍼졌다. 이따금 부는 바람에 따라 피어오르는 김이 흩날렸다. 나는 그 중 한 잔을 그녀에게 건냈다. "고마워." 그녀는 머그잔을 양손으로 거머쥐고 홀짝거리며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하네." 그녀는 손바닥이 위로 보이는 방향으로 오른손을 테이블에 올렸다. 나는 왼손으로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 커피의 온기가 남아있는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벅차올랐다. "너와 이렇게 마주보고 이야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말에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이렇게 손을 잡고 얼굴을 마주 보면서...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에 가슴 한 구석이 쓰렸다. 그녀는 내 손을 놓더니 의자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고 그녀는 나를 내려다 봤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머니같이 자애로운 미소가 어렸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내 볼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럼 말해. 내게 말을 걸어. 내일 당장." 그녀는 단호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나는 시선을 떨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안다. 이 모든 대화가, 그녀의 행동이, 이 상황이, 오직 내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내가 원하는 대로, 내심 바라는 대로 연기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녀는 부드럽게, 하지만 거스를 수 없는 엄격한 태도로 내 고개를 들어올려 다시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내일 교양 수업이 끝나면 난 점심을 먹을 거야. 혼자서. 아는 사람 없이 혼자 듣는 수업이거든."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런 적은 없었다. 이렇게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화는 여태까지 없었다. "1시까지 학교 카페테리아로 와. 난 아마 창가 쪽 테이블 어딘가에 앉아 있을 거야. 내게 말을 걸고, 같이 밥을 먹자고 해."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이 내게 다가왔다. 그녀가 내 턱을 단단히 잡고 있어서 고개를 움직일 수도 없었다. 난 당황해서 그녀를 바라봤다. 가슴이 미친듯이 쿵쾅거렸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내 볼에 닿는 순간... ### 난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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