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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단편] 선택에 따르는 고통
게시물ID : panic_891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못된야옹
추천 : 17
조회수 : 1464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16/07/11 12:5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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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베스트프렌드인 민석이 용의주도하게 주선한 덕분에 난 23살의 조금은 늦은 감이 없지 않은 나이에 처음으로 꿈에 그리던 커플이라는 칭호를 거머쥘 수 있었다. 상대는 나보다 한 살 연하의 김지연이라는 S대 무용과에 재학 중인 여성.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몸매와 얼굴을 가지고 있던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절대적으로 복학생 코스프레인 나 따위가 넘볼 수 없는 사람이라 여겼었다. 허나 신기하게도 우리는 첫 만남부터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소꿉친구처럼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거기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아 이 사람이다.’ 싶을 만큼 말도 잘 통했으며, 서로의 취향역시 너무나 비슷했다. 그 결과 소개팅 했던 날 번호를 주고받은 우리는 그 뒤로도 잦은 만남을 가졌고 끝내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사귄지 막 100일째 되는 날이었다. 난 처음으로 뭔가 색다른 이벤트를 준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드라마 같은데서 보면 촛불을 켜놓고 꽃다발을 준다던 가, 차 트렁크에 수소풍선을 가득 담아 한적한 곳에서 놀래 켜 주는 뭐 그런 흔한 거. 뻔해보여도 정말 오래전부터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나였기에, 난 오늘이야말로 그걸 행동에 옮길 수 있는 날이라 생각했다. 때마침 오늘은 토요일이다. 여자 친구와 만나기로 한 시간은 저녁 6시. 시간은 충분했다. 난 기숙사에서 벗어나 학교 앞 사거리에서 택시를 잡았다. 일단은 집에서 옷 몇 벌을 챙겨오기 위해서였다. 높고 푸른 청명한 가을하늘이 마치 오늘의 나를 축복해주는 것 같다는 오글거리는 생각을 한다. 겸연쩍게 씩 웃은 난 택시를 잡아 뒷좌석에 몸을 기대며 귀에 이어폰을 꼽았다. 오늘은 즐겨 듣던 우울한 발라드가 아닌 댄스곡이다. 들썩거리는 차체의 리듬에 맞춰 난 흥얼거리며 차창으로 시선을 던진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풍경마저 왠지 모르게 아름답게 보였다.
 

 

 

 

 

 

못된야옹의 두번째 단편   

<선택에 따르는 고통>
 

 

 

 

 

 

 

덜컹덜컹-
 

흔들리는 택시 안에서 난 눈을 떴다. 기분 나쁜 꿈을 꿨다. 민석이 교통사고 당하는 끔찍한 꿈.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로 나를 노려보는 민석의 표독스러운 눈빛이 잊혀 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깜박 잠들었던 모양이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에 이런 꿈을 꾸다니…. 이어폰에선 노래가 끝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탁탁. 타탁.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언제부턴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꽤 많은 양이다. 난 차창을 스쳐 지나가는 낯익은 건물 등으로 집에 거의 다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난 기사 아저씨께 저만치 삼거리 앞 편의점 앞에 세워달라고 말했다. 구깃구깃한 잔돈을 받기 무섭게 택시에서 내렸다. 구겨진 지폐만큼이나 마음도 구겨져 있었다. 기분 좋게 출발 했을 때와 달리 찝찝한 꿈에다 비까지 내리고 있으니 소심한 내가 충분히 상처 받을만했다. 야외에서 하는 이벤트는 물 건너갔다. 난 편의점에 들어가 싸구려 비닐우산 하나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거세게 몰아치는 빗줄기에 우산이 찢어질듯 비명을 지른다. 덕분에 나도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난 휴대폰을 꺼냈다.
 

[오전 10시 50분]
 

기숙사에서 집까지 오는데 대충 40분정도 걸린 것 같다. 넉넉잡아 1시간 반은 걸리는 거리를 40분 만에 오다니…. 기사아저씨의 드라이빙 테크닉에 경의를 표한다. 오랜만에 들어와 보는 집. 밥 먹고 가라는 어머니의 성화를 정중히 사양하며 옷 몇 벌을 가방에 쑤셔 담은 난 쏜살같이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빗줄기는 거세다. 기숙사에 도착하면 샤워부터 해야겠다. 난 조금 전 지나왔던 길을 되돌아 싸구려 비닐우산을 샀던 편의점 앞 삼거리에 도달했다. 신호를 기다리며 멍하니 서있을 무렵 때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민석이었다. 어, 그래 민석아! 하고 익숙하게 전화를 받았다. 헌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민석이 아닌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낯선 남자는 내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충격적인 소식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하마터면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 했다. 간신히 정신 줄을 부여잡은 난 통화를 마치기 무섭게 민석의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젠장. 받질 않는다. 난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지하철역을 향해 달렸다. 이런 빗길에 택시보단 지하철이 빠를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아까 같은 드라이빙 테크닉의 소유자를 다시 만난단 보장은 없다. 확실한 게 중요하다. 지금같이 긴급 상황에는….
 

수화기 너머의 낯선 남자에게 전해들은 소식은 민석의 교통사고 소식이었다. 그는 민석이 뺑소니를 당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라 말했고, 휴대폰에 저장돼있던 번호의 사람들 중 누구와도 연락이 닿질 않았는데, 내가 받아서 다행이라 말했다. 또 지금 OO병원이며 수술이 시급하다고, 그런데 보호자가 없어 걱정이었다고도 덧붙였다. 아무래도 교통사고를 목격한 사람 중 하나가 민석을 병원으로 데려간 모양이었다. 처음엔 보이스피싱이 아닐까도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비단 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 직감적으로 남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란 게 느껴졌다. 남자의 감이었다. OO병원이면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병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민석의 집이 학교와 가깝다는 것과 조금 전 민석의 어머니와 내가 통화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민석어머니는 잠깐 휴대폰을 두고 시장에 다녀오셨다고 했다. 민석의 사고 소식을 전해드렸을 때 떨리던 그녀의 음성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꿈에서 보았던 피투성이의 민석의 모습 역시 생생하다. 머리가 복잡하다. 과연 민석의 사고와 내가 꾼 꿈이 연관성이 있는 걸까? 아니, 단순한 우연일 뿐이다. 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뭔가 꺼림칙한 기분은 가시질 않는다. 열차의 검은 창으로 흠뻑 젖은 초췌한 몰골의 내가 보인다. 난 고개를 푹 숙인 채 두 눈을 감고 기도했다. 제발 민석이 무사하기를, 제발 죽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민석 어머니는 수술실 앞에 넋이 나간 얼굴로 앉아계셨다. 남자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난 자판기에서 따뜻한 커피를 뽑아 민석어머니께 건네곤 그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 아무 일 없을 거라고 걱정 말라고 그녀를 위로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던 그녀의 따뜻했던 커피 잔이 싸늘하게 식어버렸을 때, 견고했던 수술실 문이 열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던 민석어머니는 수술이 잘 되어서 이제 안심해도 된다는 담당의사의 말에 끝내 눈물을 흘리며 몇 번이고는 감사하다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나 역시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꿈에서처럼 민석이 죽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우연에 불과했을까? 하지만 웬일인지 난 민석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왜일까?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뒤로한 채 난 문득 여자 친구를 떠올렸다. 난 자연스럽게 가방 속에 아무렇게나 넣어둔 휴대전화를 찾기 시작했다. 여자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면 조금이나마 마음의 심란함을 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집에서 챙겨온 옷가지들과의 긴 씨름 끝에 난 휴대폰을 찾을 수 있었다.
 

[오후 1시 37분]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 10통과 신규문자메시지 1개라는 알림 메시지가 떠있었다. 7통은 여자 친구로부터 나머지 3통은 여자 친구의 단짝인 아현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문자를 제외하고는 대충 30분 점 쯤에 왔던 기록들이었다. 난 점차 심장 박동이 빨라짐을 느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뱀의 허물처럼 기분 나쁘게 전신을 훑고 지나간다. 난 바로 문자메시지부터 확인했다. 여자 친구가 보낸 메시지였다.
 

[지연으로부터의 메시지]
[오빠ㅏㄴ;ㅏ;칼ㅔㅉ,ㅣ;ㅣ]
[20151121 오후 12:09]
 

오타가 심하게 나있었지만 여자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 정도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부재중 전화만 보더라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난 빠르게 그녀의 번호를 입력했다. 제발. 제발. 제발. 아무 일도 없기를 간절히 바라며 언제나와 같이 밝은 여자 친구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길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수화기 너머론 여자 친구가 아닌 아현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 어떡해요 어떡해! 흐윽… 흑흑. 지연이가… 지연이가!! 흐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지연이는? 지연이는 어디에 있어!!”
“흐흑… 흐아아….”
“울지만 말고 말을 하란 말야! 아현아!! 너 거기 어디야!! 아현아!!”
“지연이가….”
 

난 아현의 말을 채 다 듣기도 전에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탁. 타닥. 요란한 소리를 내며 휴대폰이 차가운 바닥을 나뒹군다. 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참담함 그 자체였다. 지연이가… 지연이가 죽었단다. 그 것도 우리 학교 앞 카페 화장실에서 누군가의 칼에 찔려서… 죽었다는 것이었다.
눈앞이 캄캄하다. 도저히 이럴 수는 없었다. 신이란 게 있다면 절대 이래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하루아침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왜 내게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냔 말이다. 머리가 어지럽다. 이내 주체할 수 없는 강렬한 현기증이 일었다. 주변이, 사물이, 내가 빙빙 돈다. 몸이 들썩거린다. 마치 달리는 차안에 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흔들린다.
 

덜컹 덜컹-
 

 

 

 

 

 

 

***
 

 

 

 

 

 

 

“학생! 학생!!”
 

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헛바람을 들이키며 눈을 떴다. 언제부턴가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는 차창에 부딪치며 주르륵 흘러내린다. 꿈…이었단 말인가? 이렇게 생생한 게 꿈이었다고?
 

“이봐!! 학생!! 저 앞에서 세워 달라며?! 안 내릴 거야?!”
 

순간 다시 한 번 들려온 걸걸한 음성에 난 그제 서야 정신을 차리고 백미러로 비친 기사아저씨 험악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머쓱해진 난 죄송하다 말씀드린 후 조심스럽게 차에서 내렸다. 덕분에 거센 빗줄기는 온 몸으로 받아야 했다. 난 익숙한 편의점의 처마 밑으로 몸을 숨겼다. 난 주변을 쓱 훑어본다. 틀림없는 집 근처 삼거리 앞이었다. 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0시 50분]
 

꿈이랑 똑같다. 꿈에서와 마찬가지로 난 정확히 10시 50분에 차에서 내렸다.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를 50분 만에 도착했다. 기사 아저씨의 드라이빙 테크닉 역시 꿈과 다르지 않았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설마 모든 일이 꿈대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아냐! 아직 단정 짓긴 이르다. 그저 단순한 우연일 수도 있다. 난 심란한 얼굴로 편의점에 들어가 만 오천 원을 내고 검은색 장우산을 꺼내 들었다. 괜스레 비닐우산을 집었다간 정말 꿈과 똑같은 일이 벌어질까봐 두려웠다. 난 속으로 주문을 외우 듯 ‘아닐 거야’라며 중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괜한 걱정으로 지연에게 해줄 이벤트를 망치기는 싫었다. 야외에서 하는 이벤트는 물 건너갔지만 구지 야외에서 할 필요가 있던가? 실내에서도 충분히 로맨틱함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난 그녀가 내 이벤트에 감동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나도 모르게 씩 웃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대충 옷가지를 골라 가방에 넣은 나는 막 방을 나와 현관 앞에 섰다.
 

“밥이라도 먹고 가!”
 

젠장! 난 무작정 집을 뛰쳐나왔다. 어머니가 밥 먹고 가라는 말을 하는 것까지 꿈과 똑같다. 억양마저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똑같다.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까지만. 딱 이번까지만 넘어가자.
 

‘그래. 어머니가 자식한테 밥 먹고 나가라는 건, 정부가 세금 걷어 국고 채우려고 담배 값 인상하는 것과 같은… 당연한 이치잖아?’
 

침착하자 침착해. 이런 당연한 걸 가지고 데자뷰네 예지몽이네 불길하네 마네 생각하지 말자고. 난 크게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얼마 안 있어 우산을 샀던 편의점 삼거리가 보였다. 난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고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이번에야말로 제발. 제발 전화 하지 마! 제발 전화 오지 마! 제발. 제발. 제발. 제발. 제발….
허나 이번 역시 내 바람과는 반대로 주머니 속 휴대폰은 물 만난 고기처럼 미친 듯이 펄떡거리기 시작했다. 젠장!! 이걸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어째서 내가 이런 경험을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꿈에서 일어난 순서대로 모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귀로 가져갔다. 수화기너머로 역시나 낯선 남자, 그러나 한 번은 들었던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난 전화를 끊자마자 민석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받지 않는다. 그래 꿈대로라면 시장에 가셨을 시간이다. 난 일단 침착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이 개 같은 상황을 최대한 슬기롭게 헤쳐 나가서 날 엿 먹인 놈의 일그러진 얼굴을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려면 일단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 난 때마침 지나치는 택시로 손을 뻗었다. 이내 뒷좌석 등받이에 몸을 구겨 넣으며 말했다.
 

“K대요. 빨리요!”
 

 

 

 

 

 

 

***
 

 

 

 

 

 

 

달리는 차안에 몸을 맡긴 난 꿈에서 경험했던 기억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일단 민석은 걱정 없다. 다행히 조금 전 민석어머니와 전화통화가 가능했다. 꿈에서 내가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그녀가 도착해 있었고 민석은 수술을 받고 있었다. 내가 병원에 가서 한 일이라고는 그저 자판기 커피를 뽑은 것과 민석어머니를 위로해 드리며 수술이 끝날 때까지 옆에 앉아있던 게 전부였다. 즉, 내가 구지 병원에 가지 않아도 민석은 죽지 않는다. 일단 민석인 클리어. 이제 남은 건 여자 친구다.
자. 생각하자. 생각해. 여자 친구는 우리 학교 앞 카페에서 살해당했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라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일단 학교 앞 카페는 언제나 학생들로 붐비는 곳이다. 게다가 오늘은 주말. 더군다나 갑자기 폭우까지 쏟아졌다. 비를 피하려 들어온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붐비는 곳의 화장실이라면 사람들이 수시로 들락거릴 터. 여자 친구가 발견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아무리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라고 해도 그 많은 눈들이 있는 곳에서 범행을 저지르는 모험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계획적인 범행이라 보기는 어렵다. 단순한 우발적 범행이라 보는 게 맞다. 즉, 범인은 카페 안에 있던 사람 중 하나다. 여자 친구가 카페에 들어오기 전부터 있던 사람, 혹은 그 이후에 들어온 사람. 우발적인 범행 치고 상대를 미행하다 죽이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말이다. 여자 친구가 카페만 가지 않는다면 아니, 화장실만 가지 않는다면 죽을 일은 없다. 난 손목시계로 시선을 던졌다.
 

[11시 45분]
 

여자 친구가 살해당하는 시간은 12시 정도. 그렇다는 건 여자 친구는 이미 우리 학교 근처이거나 카페 안일 것이다. 내가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다. 젠장!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난 황급히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두어 번의 통화 연결 음 만에 여자 친구의 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오빠!”
“지연아 지금 어디야?”
“어? 왜? 음… 나 그냥 집에 있는데.”
“정말 집이야? 혹시 우리 학교 근처 아니야?? 솔직히 말해!!”
“헐. 오빠 귀신이다. 어떻게 알았어? 뭐야! 놀래 켜 주려고 몰래 온 건데….”
“지연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일단 아무것도 묻지 말고 당장 거기서 나와! 나와서 근처 지하철역 안에 들어가 있어!! 되도록 사람 많은 곳에!!”
“무슨 말 하는 거야? 뭐라는 지 하나도 모르겠다.”
“나중에 다 설명할 테니까 일단은 거기서 나와 있어! 오빠가 금방 그리로 갈게!!”
“잉? 오빠 무슨 일 있어? 왜 그래 무섭게… 아, 알았어. 나가 있을게. 대신 꼭 해명해야 된다!? 나중에 막 양다리였고… 그러면 알지?”
“어? 어, 어… 그래.”
 

전화를 끊은 난 낮은 한 숨을 뱉어냈다. 일단 한시름 놓았다. 민석도, 지연이도 둘 다 일단은 무사하다. 다행이다. 정말이지 내가 지금 뭐하는 것인지…. 백미러로 기사 아저씨가 날 이상한 눈초리로 흘긴다. 난 슬그머니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주륵 주륵 차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꼭 녹아내리는 내 마음을 보는 것만 같다. 조금이나마 긴장감이 풀려버린 탓인 지 나른하다. 왠지 또 잠이 들 것 같은 몽환적인 기분이 든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잠이 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으며 여자 친구와 쉴 새 없이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던 난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풍경에 어느덧 K대 근처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난 기사 아저씨께 저만치 보이는 지하철역 앞에 세워달라고 말한 뒤 주머니에서 구깃구깃한 지폐 한 장을 꺼내드렸다. 이내 차에서 내린 난 여자 친구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이미 여자 친구가 살해되는 시각은 훌쩍 넘어있었고, 조금 전까지 문자를 주고받았음에도 불안했던 탓이었다. 얼마 안 있어 수화기 너머로 여자 친구의 살짝 토라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행이었다. 여자 친구는 K대 입구 4번 출구 앞에 있다고 했다.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내 저만치 도로 건너편에 노란 우산을 쓰고 있는 여자 친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휴. 그제 서야 안도의 한 숨을 내쉰 나는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여자 친구 역시 날 확인하고는 살며시 우산을 흔들었다. 전화를 끊은 난 홀가분한 마음으로 횡단보도 앞에 섰다. 여자 친구역시 맞은편에 나와 마주보고 섰다. 그때였다. 손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휴대폰을 들어보았다. 민석의 어머니로부터의 전화였다. 예상외로 수술이 빨리 끝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민석의 생명의 지장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울먹이고 있었다. 난 알겠다고 곧 병원으로 가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아니, 끊으려 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이어지는 민석 어머니의 말에 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올 필요는 없단다.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다 살면 매우 재미없잖니.”
“네? 무슨….”
“하나가 살았으면 하나는 죽어야지. 그렇지 않니? 깔깔깔.”
 

도통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말보다 어느새 도저히 인간의 음성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차갑고 소름끼치게 변해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끼이익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내 두 눈에 들어온 것은, 공중에 붕 뜬 붉게 물든 우산과… 팔다리가 꺾어져 볼품없이 도로 위를 나뒹구는, 피로 물든 여자 친구의 모습이었다.
 

“…아, 아, 아! 안돼에에에에에!!!!!!!!!!!!!!!!”
 

 

 

 

 

 

 

***
 

 

 

 

 

 

 

“안돼!!!”
 

난 비명 같은 고함과 함께 눈을 떴다. 익숙한 감각. 익숙한 냄새. 설마…. 역시나 난 택시 안에 있었다. 또 꿈이었던 걸까?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훔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가 기숙사에서 막 나왔을 때와 달리 역시나 거센 빗줄기가 창을 두드리고 있었다. 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0시 50분]
 

내가 시간을 확인하기 무섭게 덜컹거리던 차안이 고요해졌다. 대신 기사아저씨의 걸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학생 여기서….”
“아뇨. 죄송한데 다시 K대로 돌아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난 기사아저씨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기사 아저씨는 뭔가 아리송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는 알았다는 말과 함께 다시금 차를 몰기 시작했다. 벌써 3번째다.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하다. 난 잽싸게 민석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삼거리에서 집까진 걸어서 10분도 안 걸린다. 옷가지라 봐야 옷장에 있는 걸 그냥 주워 넣으면 되는 일. 이 역시 10분도 안 걸렸다. 그럼 내가 택시에서 내려 집에 들렀다가 다시 삼거리로 돌아오는데 까지 걸린 시간은 길어야 30분이다. 즉, 민석의 사고 전화를 받는 건 11시 20분 이후라는 말이 된다. 지금이 10시 53분.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무렵 익숙한 민석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 나야.”
“민석아 너 지금 어디야?!”
“나? 겜방 갔다가 담배 좀 사러 잠깐 나왔지. 왜?”
“혹시 사거리 앞 횡단보도냐?”
“어. 짜증나게 겜방 앞 편의점에 내가 피는 담배가 없더라고. 그래서 역 앞 편의점까지 걸어가고 있던 중이야.”
“민석아! 거기서 움직 이지마! 아니 최대한 거기서 멀리 떨어져!!”
“무슨 소리야? 갑자기 움직이지 말라니….”
“제발!! 거기서 벗어나라고! 민석아 제발!!”
“너 왜 그래, 무섭게…. 아, 신호 켜졌다.”
“멈춰어!!!!”
 

택시 안이 울릴 정도로 수화기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순간 차가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탕 하고 부딪히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왔다.
 

“민석아!! 민석아!!!!!”
“…어, 어….”
 

다행히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에 섞여 민석의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야 이 새끼야! 괜찮아?! 괜찮은 거 맞냐고!”
“누, 눈앞에서 사, 사람이… 너, 알 고 있던 거냐…?”
 

민석의 목소리는 꽤나 얼이 빠져있었다. 난 그런 민석에게 금방 다시 전화 준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고 바로 지연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 지연이 살해될 시간은 멀었지만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이전의 꿈처럼 되게 하진 않을 것이다. 얼마간의 연결 음 끝에 지연이 전화를 받았다.
 

“어. 오빠.”
“집이야? 아니면 벌써 우리 학교로 출발했어?”
“어라? 내가 오빠네 학교 가는 거 어떻게 알았어? 몰래 놀래 켜주려고 한 건데…. 아현이한테 들은 거야?”
“아니, 그러니까 지금 어디냐고!!”
“어…?”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러버렸다. 덕분에 여자 친구의 놀란 음성이 흘러나왔다.
 

“미안해, 지연아. 지금 오빠가 많이 급해서 그래! 지금 어디야?”
“어? 으, 응…. 나 지금 막 오빠네 학교 방향 지하철 탔어.”
“그래? 알았어. 그럼 도착하면 밖으로 나오지 말고 4번 아니, 6번 출구 안에서 기다릴래? 오빠가 그리로 갈게. 도착하면 바로 문자하고!”
 

4번 출구 앞 도로에서 죽었던 여자 친구의 모습이 떠올라 4번이라고 나오려던 말을 황급히 6번으로 고쳐 말했다.
 

“…알겠어.”
 

살짝 토라진 여자 친구의 음성을 뒤로하고 난 전화를 끊었다. 갑작스럽게 당황스럽겠지만 난 벌써 이게 3번째다. 이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둘 다 구해야만 한다. 난 서둘러 다시금 민석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 민석의 사고 시간 범위 내에 있다. 11시 20분이 지나기 전까진 민석 또한 안심할 수 없다. 이전 꿈에서 여자 친구는 사고 시각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잃었다. 하물며 사고 시각 범위 내라면 오죽하겠는가? 등골에서 식은땀이 차창을 부딪치는 빗줄기처럼 흘러내렸다. 이내 수화기 너머로 민석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석현아.”
“민석아. 이런 말하기 뭐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어. 일단은 얼마 안 있어서 지연이가 그쪽에 도착할 거야. 그때까지 K대 입구 역 6번 출구 안에서 기다려. 나도 지금 그리로 가고 있으니까 그때까지 최대한 사람이 많은 쪽에서 숨죽이고 있어!”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 같지만 나중에 물을게. 알았다.”
“제발 무사해야 한다. 민석아….”
 

난 전화를 끊고 깊은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두 눈을 감고 기도했다. 제발 이번만큼은, 이번에야 말로 둘 다 구할 수 있게 해달라고. 차창을 두드리는 빗줄기처럼 이번엔 내 기도가 제발 신의 귓가를 두드릴 수 있기를 바라며….
 

 

 

 

 

 

 

***
 

 

 

 

 

 

 

익숙한 거리, 오늘만 벌써 3번이나 돌아온 학교 앞 사거리에서 내린 난 서둘러 시각을 확인했다.
 

[오전 11시40분]
 

민석의 사고 예정 시간은 지났고, 여자 친구의 사고 시간 범위에 들어선 시각이다. 난 마음을 다잡고 빠르게 역의 6번 출구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난 민석에게 전화를 걸며 주변을 훑어본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파속에서 민석을 찾는 두 눈이 빠르게 돌아간다. 이내 얼마 안 있어 저만치 츄리닝 차림의 민석을 찾을 수 있었다.
 

“민석아!”
 

내 목소리에 민석은 이쪽을 힐끔 쳐다보고는 주변을 경계하면서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다.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녀석의 손이 떨린다. 하루 사이에 10년은 더 늙어 보이는 초췌한 얼굴이다. 그럴 만도 하다. 눈앞에서 사람이 치여 죽는 걸 지켜봤으니…. 난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으며 살짝 웃어주었다.
 

“이런 건 여자 친구한테나 해. 징그럽게….”
 

겉으론 이리 말해도 내심 조금이나마 안심한 모양이다. 미묘한 떨림이 멈춘 것을 보면. 난 그런 녀석에 어깨를 살며시 두드리며 침착할 수 있도록 진정시켰다.
 

“지연이는 아직 안 왔어?”
“어. 여기 계속 있었는데, 아직 못 봤어.”
 

민석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난 여자 친구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응, 오빠.”
“어디쯤이야? 오빠 도착했어.”
“아, 나 지금 거의 다와가. 5분이면 도착할 거 같아. 네, 아저씨 저어기 앞에 사거리에서 세워주시면 되요.”
“아저씨? 사거리? 너 지하철 타지 않았어?”
“그랬는데, 자리가 너무 안 나서 말이야. 오빠 나, 오래 서있으면 다리 굵어져서 안 되잖아. 그래서 중간에 내려서 택시 탔어. 택시가 더 빠를 것 같기도 하고, 오빠를 1분 1초라도 더 빨리 보고 싶기도 했거든. 생각해보니까 아까 오빠가 소리친 게 다 날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구나 싶더라구. 나 참 기특하지? 화도 안내고. 후후.”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전화를 끊고는 현재 시각을 확인했다.
 

[오전 11시 46분]
 

난 민석과 함께 빠르게 역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횡단보도 앞에서 초초하게 신호를 기다렸다. 여자 친구의 집 방향과 도로 특성상 차로 올 경우 백 프로 4번 출구 쪽 방향에서 내릴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내 불안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하필이면 이전 꿈에서 자기가 죽은 곳에서…. 난 여자 친구가 오기 전에 서둘러 반대편으로 내가 먼저 건너가 상황을 바꿔보려 마음먹었다. 순간 저만치 택시 한 대가 이쪽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난 여자 친구가 타고 있는 택시라 확신했다. 때마침 신호가 바뀌었다. 충분히 승산이 있다. 민석과 나는 서둘러 도로를 건너기 시작했다.
 

‘탁 타탁’
 

막 달려 나가는 와중에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다. 민석이 떨어진 휴대폰을 주우러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민석에게로 오토바이 한 대가 매우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난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려가 민석의 팔을 낚아챔과 동시에 끌어당겼다. 일촉일발의 순간이었다.
 

“민석아!!!!”
‘부아아아앙!!!!’
 

오토바이는 민석의 옷깃만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만 무게 중심이 내 쪽으로 강하게 쏠린 탓에 우리는 젖은 도로 위를 보기 좋게 나뒹굴었다. 우리는 미약한 신음을 뱉으며 일어나 서로를 보고 살짝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라니 어처구니가 없었었다. 허나 그건 매우 짧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옷에 묻은 물기를 털고 있는 준석을 새하얀 헤드라이트 불빛이 감싸고 지나갔다.
 

‘텅. 털썩.’
 

눈앞에 멈춘 찌그러진 택시 한 대. 택시 안 앞좌석에 앉아 머리에 피를 흘리며 늘어져 있는 여자 친구의 모습. 그 앞으로 저만치 튕겨져 나가 바닥을 붉게 적셔가는 민석의 꺾인 몸뚱이…. 난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이번에도 난 구할 수 없었다. 이번엔 둘 중 하나도 아닌 둘 모두를 구하지 못했다. 마치 내가 막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그의 배로 방해하겠다는 경고와도 같은 이런 상황을, 운명이란 놈은 계속해서 만들어낼 모양이었다.
 

“안돼에!!!!!!!!!!!!!!!!!!!!!!!”
 

 

 

 

 

 

 

***
 

 

 

 

 

 

 

역시나 다시 돌아왔다. 벌써 49번째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도 민석과 지연은 목숨을 잃었다. 하나라도 구하는 것에 치중했던 5번째 이후부턴 운명이란 놈이 게임의 룰을 바꾼 것인지 둘 중 하나도 구할 수 없어져 버렸다. 그렇게 매일 같이 같은 꿈속의 상황을 마주해오던 난 오늘에서야 비로소 둘 모두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떠올려 낼 수 있었다. 나란 놈도 정말이지 참 머리가 나쁜 모양이다. 이 쉬운 방법을 놔두고 지금껏 둘을 구하기 위해 발버둥 쳤다니…. 난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택시안의 10시 50분에 멈춰서, 닳도록 눌렀던 민석의 번호를 눌렀다.
 

“민석아….”
“어. 무슨일이야? 석현아.”
“그냥 네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했다.”
“오글거려 자식아! 무슨 일 있냐?”
“일은 무슨….”
“나 지금 겜방인데, 이따가 술이나 한 잔 할까? 아! 오늘 너랑 지연이 100일 이랬지? 아주 깨가 쏟아지겠고만.”
“응. 아주 깨가 쏟아진다. 쏟아져. 됐냐? 하하.”
“웬일이래? 이렇게 담담하게.”
“민석아.”
“어, 왜?”
“나중에 만나서 제대로 한 잔 하자.”
“너 무슨 일 있냐? 목소리에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어이? 석현….”
 

걱정이 묻어나는 민석의 음성에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난 이내 지연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응 오빠.”
“지연아. 지금 뭐해?”
“음, 나갈 준비? 농담이고 집에 그냥 있어. 오늘 우리 100일이니 좀 쉬어둬야지.”
 

지연의 목소리에 차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살짝 섞여 흘러들어온다. 네가 날 생각하는 마음은 늘 한결같구나. 난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훔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오늘 우리 100일이지…. 정말 고마워.”
“응? 뭐가 고마워?”
“100일 동안 내 옆에 있어줘서….”
“뭐어시라아~? 오빠 원래 이렇게 오글거렸어? 후후 그럼 나도 한 번 오글 거려봐? 나도 고마워! 100일 동안 날 사랑해 줘서! 하지만 앞으로는 내가 더 많이 사랑할 거다! 메롱.”
“그래. 꼭 그렇게 해줘.”
“뭐야! 싱겁게….”
“지연아.”
“응?”
“…사랑해.”
“아! 지하철 왔… 아니, 으응. 응! 나두 사랑해! 오빠 내가 조금 있다 톡 할께!”
“그래….”
 

볼을 타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창밖의 저 빗줄기처럼 그칠 줄 모르고. 기사 아저씨는 아무런 말도 없이 등을 보인 채 앞만 바라보고 있다. 내가 마지막이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 난 죄송합니다란 한 마디를 작은 목소리로 꺼내 놓고 차에서 내렸다. 순식간에 빗물에 몸이 젖는다. 눈물이 빗물인지 빗물이 눈물인지 분간하지 못할 만큼 차갑고 그러나 따뜻하게 나를 감싸 안았다.
 

‘지연아, 민석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행선지는 정해 졌다. 난 두 눈을 감은 채 천천히 그리고 묵묵히 어두운 빗속을 걸어 나갔다.
 

 

 

 

 

 

 

*****
 

 

 

 

 

 

 

시립도록 차가운 하얀 병실 안에 한 남자가 누워있었다. 남자의 머리에는 뇌파 측정기로 보이는 장치가 씌워져 있었는데 그 덕분에 남자의 머리맡에 있는 정사각형의 모니터로는 쉴 새 없이 지그재그로 왔다 갔다 하는 그래프가 띄워지고 있었다. 그래프의 변화무쌍함에 따라 남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인상을 썼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고 또 그러다가도 어느 순간 얼굴을 찌푸리는 둥 시시각각 변했는데, 그 모습이 꼭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리고 지금 남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프는 그 순간을 기점으로 위 아래로 움직이지 않고 일정한 자리에 멈춰서 있다. 남자를 지켜보던 온화한 표정의 흰 가운을 입은 남자는 이제 슬슬 지겹다는 얼굴로 남자에게서 돌아서 방을 벗어났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남자는 책상위에 놓인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거기엔 환자들의 진료기록부들이 포개져 있었는데, 남자는 무심한 얼굴로 기록부를 한 장 한 장 넘기기 시작 했다. 이내 특정 페이지에서 남자의 분주했던 손이 멈췄다. 남자가 멈춘 지점의 서류에는 박석현이라는 이름과 함께 외상 후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질환 및 그에 따른 처방이 세세하게 적혀있었는데, 의사 소견을 쓰는 란은 웬일인지 공백으로 비어있었다. 남자는 ‘아차차’ 입으로 소리 내고는 가운 앞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빠르게 공백을 채워나갔다. 그리고는 펜을 도로 주머니에 넣으며 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내 수화기 너머로 간드러지는 중년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아. 김 박사님? 안 그래도 전화 하려던 참이었는데, 역시 박사님은 저보다 항상 한 발 빠르시군요. 호호.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이번 주 ‘그 놈’의 상태도 의사로써의 소견을 담아 전해 주시겠어요?”
“하하. 사모님 그 멘트 질리지도 않으십니까? 뭐 그렇다면 저도! 이번 주 역시 딱히 소견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저 과거의 트라우마를 다시 끄집어내기만 하면 그 뒤론 제 맘대로 컨트롤이 되는 건 잘 아시겠고. 석현이 같은 경우는 책임감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쉬웠습니다. 뭐 끄집어 낼 것도 없더라고요. 아직도 여자 친구나 친구 모두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우연한 사고였던 걸 말이에요. 아, 우연은 아니었던가요? 하하. 아무튼 점점 죄책감으로 자아가 무너져 가고 있으니, 깨어나더라도 백 프로 자살을 선택할 겁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속죄라 생각하거든요. 석현군은.”
“이거 역시 ‘멘탈해킹’의 능력자이신 김 박사님을 병원장으로 추천한 보람이 있네요. 김박사님 아니, 김원장님? 깔깔. 소견 잘 들었어요. 언제 식사 한 번 같이 하셔야죠?”
“물론입니다. 그럼.”
 

원장은 휴대폰을 품속에 넣고는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었다. 허나 편하게 기댄 몸과 달리 표정은 뭔가 찝찝해 보인다. 그는 다시금 책상위에 놓인 서류로 시선을 던지며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나야 원장 되고 돈 벌어서 좋지만, 저 친구는 참 딱하기 그지없군. 조강지처한테 어머니가 살해당한 것도 모자라 애인에, 친구까지 살해당하고 끝내 본인까지…. 쯧쯧. 첩 자식으로 태어난 것도 서러웠을 텐데 말이지. 그나저나 사모님도 참, 5년간 참 많이도 처 죽이셨군요. 뭐, 나야 보험 하나 갖는 셈이니 손해 볼 것 없지만. 깔깔.”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며 비릿한 웃음을 흘리던 원장은 갑작스럽게 뛰어 들어온 간호사에 의해 표독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야? 노크도 없이!”
“원장님! 박석현씨가…박석현씨가 깨어났어요!”
“깨어났으면 깨어난 것이지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그게, 옥상에, 옥상에….”
 

간호사의 입에서 나온 옥상이라는 말에 원장은 아까 석현의 병실에서 석현이 눈물을 흘렸던 것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빨리 정했네, 석현군? 크큭.”
“네? 무슨… 아, 아니 그보다 빨리 같이 가보셔야!”
“자네는 가서 아무도 그 환자한테 관여하지 말라고 전해. 내가 가볼 테니까.”
“하지만 혼자 괜찮으….”
“난 괜찮으니까 어서 가봐.”
“그래도….”
“아 글쎄 일 보라고! 내가 간다잖아! 앙?!”
“…네에.”
 

잔뜩 기가 죽은 얼굴의 간호사가 슬며시 나가자, 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린 자신의 두꺼운 겉옷을 집어 들었다. 이내 저만치 책상 옆에 세워둔 긴 장우산마저 챙긴 그는 그제 서야 만족한 듯 천천히 방을 나선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라 탄 원장은 옥상이 아닌 1층 버튼을 눌렀다. 순식간에 미세한 진동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1층에 도착한 원장은 병원 로비를 걸으며 이따 저녁은 무얼 먹을지 등의 사소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옥상에 올라간 석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모양이다. 그저 사형을 집행하는 집행관처럼 무심한 얼굴로 로비를 걷는 원장. 하지만 막 병원 밖으로 나와 우산을 쓴 채로 저 멀리 옥상을 올려다보는 그의 입가엔 언제부턴가 옅은 조소가 걸려있었다. 마치 자신의 작품인 석현이 어떤 표정으로, 어떤 모습으로 떨어져 죽을 지 매우 기대된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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