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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곤약을 만난 적 있으십니까?
게시물ID : panic_891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2222
추천 : 25
조회수 : 2895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6/07/12 02:2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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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그러니깐. 오뎅은 어묵이 아니라니깐.” 그녀가 미간에 주름을 세우며 말했다. 

 “오뎅은 일본식 다시 국물에 온갖 것을 다 넣어요. 냄비에 들어가는 거라면 다 넣을 걸? 무, 유부, 야채, 곤약 같은 물고기 아닌 것 까지, 국물에 빠져 있는 걸 오뎅이라 하는 거예요.”

나는 오뎅집에서 정종 댓병을 세워 놓고, 여자 친구와 입씨름을 하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입씨름은 아니다. 오뎅집 보다야 어묵집이 더 입맛 돋지 않느냐 한 마디 던졌다가, 10분 넘게 문화인류학과 식품영양학이 뒤섞인 훈계를 듣고 있는 것이다. 아닌 건 아니다.

“뭐야? 뭐라고? 곤약이 물고기가 아니라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곤약은 한천처럼 식물에서 나오는 거예요.” 실망스런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한천은 식물이던가.
“오뎅 따위 뭐가 들어 간대도 상관안해. 하지만 곤약은… 곤약을 어부들이 얼마나 힘들게 잡는데. 너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오빠.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실망이야. 곤약이 물고기면 버블티에 들어가는 타피오카는 물고기 알이겠네요.” 그녀는 정말 실망했는지, 한 옥타브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정말 실망한 것이다. 이런 멍청한 이야기로 데이트를 망치다니. 아무 말 없이 정종 잔을 집었다.

상관없다 말했지만, 오뎅에 들어가는 재료는 중요하다. 오뎅은 완전 식품이다. 저지방 고단백에 싼 가격까지. 오뎅. 이 울림있는 단어를 입속에 굴려 보자. 이응 초성으로 시작해 이응 종성으로 끝나는 말치고 나쁜 말이 없다. ‘안녕’부터 시작해 ‘아니에용’ 까지, 세상의 온도를 높이는 살가운 말. 시작과 끝이 원처럼 이어진 수미상관의 단어다. 

오뎅국에 들어가는 재료는 조화로워야 한다. 맑은 듯 탁한 국물을 내는 멸치와 디포리. 다시마. 시원한 국물을 만들기 위한 무. 흔하고 싸보이지만, 제대로 된 녀석들은 무시무시한 가격은 둘째치고 구하기도 어렵다. 멸치는 죽방 멸치라야 한다. 대나무 말뚝을 부채꼴로 만든 함정으로 몰아넣은 잡는 죽방 멸치는 육질이 단단하고, 기름기가 적어 비린내도 나지 않는다. 잡을 때 상처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선하게 말라야 한다. 묵은 멸치로 다시를 만들면 바로 건져도 비린내가 남지만, 갓 말린 멸치로 국물을 내면 졸일 수록  맛이 더 깊어진다.

MSG 세상이니, 국물 재료는 그렇다 치자. 들어가는 주조연 재료들은 오뎅의 격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정체모를 잡어를 갈아 신분을 숨기고 밀가루로 말아 거무튀튀한 기름에 튀겨 올리는 것도 오뎅이라 부르지만, 제대로 된 것들은 플러스 두개 붙은 한우 못지 않은 가격이다. 도미나 광어의 살을 바른 뒤 전분과 쌀가루, 밀가루를 넣어 집에서 간단히 만들 수 있다. 제대로 된 오뎅이 제대로 된 국물에 들어가면 천생연분의 마리아주를 이뤄낸다. 따끈한 히레 사케 한 잔이 머리 속에 그려지는 아름다운 자리가 된다. 중요한 것이 하나 빠졌다. 가장 고급 재료인 곤약이다.

곤약은 독이 독을 감싸고 있는 위험한 식품이다. 관찰력이 있는 사람은 발견했을 것이다. 젤리같이 반투명한 곤약 사이 사이의 까만 점들을. 바로 잿가루다. 곤약의 독성을 중화하기 위해 알칼리 성분을 가한 것이다. 쉽게 말해 양잿물에 담궈 만들어내는 것이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할 때의 그 양잿물. 원래의 곤약은 강한 산으로 이루어졌단 말이다.

나도 직접 곤약을 보기 전까진 와사비처럼 일본 토종의 식물이라 생각했었다. 곤약은 곤야쿠가 아니다. 곤약은 일본인이 할 수 없는 발음이다. 영어로는 konjac이라 쓴다. 그 이름보다는 “Devil’s tongue”으로 부르는게 더 친숙하지만.

살아있는 오징어를 본 적이 있는 지 모르겠다. 바다 수영을 하다 보면 오징어와 툭툭 부딪히기도 한다. 해가 지면 오징어는 형광등처럼 화려한 빛을 번쩍이며 물살을 탄다. 곤약은 오징어와도  다르다. 해파리와도 다르다. 비닐봉투처럼 흐늘흐늘 미끌거리는 해파리가 독촉수를 잔뜩 숨기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해파리는 고통을 참고 해변으로 기어갈  여지는 남긴다.

그때 곤약은 적개심 가득한 눈빛으로 날 쳐다 봤다. 찬 기운이 꿰뚫고 지나갔고 여름 바다에서 부르르 떨었다. 오징어처럼 단단한 부리를 열자 갈라진 보랏빛 혀가 나와 낼름거렸다. 악마의 혀다. 만용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고깃배 선장이 하는 횟집에서 저녁을 게걸스레 먹고, 포식의 죄책감과 술기운에 수영을 한다는게 이안류를 타고 해변에서 수 킬로는 밀려 나왔다. 그래도 양수에 떠도는 듯 마냥 좋았다. 이안류에는 맞서는게 아니다. 체력을 아껴 물살에 리듬을 맞춘다. 새까만 물밑으로 흐느적흐느적 잠영을 하다 잠시 떠오르면 모슬포의 불빛이 아련하게 보였다. 옛사랑을 하나하나 떠올리다 민망한 실수가 떠오를 때 마다 영법을 바꿨다. 결정적인 기억이 떠오르자, 눈을 꼭 감아 버렸다. 눈을 떴을 때 곤약과 눈이 마주쳤다.

곤약의 긴 혀는 피부를 태우는 독을 품고 있다. 수영장 상급 레인의 근육질 아저씨가 등에 맺힌 채찍 자국이 성적 취향 때문이 아니라 곤약 때문이라고 할 때는 믿지 않았다. 애써 변명할 필요 없는데, 다 이해하는데 내 눈은 말했고, 그는 다급하게 설명했다. 아련한 눈빛으로 곤약의 혓바닥에 대해 소곤소곤 이야기했었지. 끝내 믿진 않았지만. 

심호흡을 했다. 돌핀킥으로 파도를 바꿔 타고 물밑으로 들어가 있는 힘껏 발을 저었다. 악의를 띈 보랏빛 형광체의 그림자가 다가 왔다. 눈 앞에 보이는 것도 끔찍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때 더 근질거린다. 코 앞에 다가와 아차 하는 순간 손에 해초 더미가 잡혔다. 해초를 장갑삼아 곤약을 잡았다. 곤약의 혀가 손목을 휘어 감았다. 힘껏 집어 던지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을 차린 곳은 낚시배 위였다. 밤낚시 배를 띄우고 한숨 자던 강태공들이 물거품을 보고 나를 건져 올린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에 없다. 담요 속에서 쇼크 상태로 덜덜 떨었을 뿐이다. 진한 라면 국물을 들이키자 급한 일이 생각났다. 숙소로 돌아오니 여자 친구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었다. 혼자 놀려고 남쪽 끝으로 끌고 왔냐며 쏘아 붙이는 차에, 차마 곤약과의 사투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화내는 목소리에 뭉클해져서 무턱대고 안아 버렸다.

계절은 지나 겨울이 되고, 우리는 오뎅집에 나란히 앉아 있다. 
“그래 식물이라 치자.” 
“치자?”
“치자는 노란색 식물이고. 곤약도 식물. 당연하지.”
그리고 한 마디를 보탰다.
“오늘 밤에 곤약 꿈 같은 거 안꿨으면 좋겠어.” 나는 오른손의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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