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했다. 많은 잘못된 일이 있었다. 300 여명이 배에 갇혀 차가운 바닷물에 잠겼다. 사건 처리는 간단하다. 배안에 있는 사람을 구조하면 되는 것이었다. 수단과 방법은 상관이 없다. 누군가 배안으로 들어가 생존자를 구출하면 되는 것이었다. 지금 일반인과 어린 학생이 배안에 있다. 에어 포겟이 있어 생존자가 있을 것이고, 그들을 꺼내와야 한다.
어찌 되었는가? 구조를 책임진 이들은 어디서 무엇을 했는가?
구조를 위해 배가 200 여척, 항공기가 수십대. 잠수 요원이 600 여명, 장비는 ......... 에어 포겟에 공기를 넣는다고 호들갑......... 지금 배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수 많은 구조 장비와 구조 인원, 목 놓아 울부짓는 가족들, 안타깝게 바라보는 국민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 배안의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어둠과 차가운 물, 답답해 오는 공기의 밀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얼마나 잠수를 했는가? 물쌀이 세서, 시야가 없어, 감압을 위한 잠수부의 건강을 위해 ........
이것이 필자가 보고 느낀 세월호이다. 모든 조건과 상황은 필요 없었다. 그냥 가서 생존자를 꺼내오면 되는 것이었다. 밀물과 썰물을 고려해 맞지도 않는 엉터리 시간에 잠수부를 보낸 그들이 한 일은 무엇인가?
재난 구조 메뉴얼이 있을 것이고, 그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고 책상에 앉아 모든 것을 결정한 그들이 한 일은?
그것이 무서운 것이다. 그래 배안에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았고, 하늘과 바다에 배와 비행기만 띄어 놓은 것이다. 그래 다이빙 벨이 무서운 것이다. 다이빙 벨이 성공이든 실패이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다이빙 벨로 그들의 행동이 정당화 되지 못하기 때문에 무서워 하는 것이다.
구조위 손을 놓고, 언론을 통제하고, 하늘과 바다에 가득 띄어 놓은 그들의 거짓이 다이빙 벨로 드러날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최소한 다이빙 벨은 배 밖에 있는 얼간이들보다는 배 안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을 위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이다. 하루에 몇 번 찾아오는 고요한 바다의 짭은 시간을 위해 기다리는 자들에게 거센 물쌀을 헤치고 배안에 갇힌 이들에게 다가가라는 보이지 않는 명령이고, 꾸지람이었기에 그들은 다이빙 벨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다이빙 벨 영화 상영이 유가가족을 두 번 울리는 것이라 상영 반대를 하는 유가족의 심정을 이해한다. 정치적 색깔을 띄고 있다는 것도 어느 정도는 동조를 한다. 그러나 막장인 야당의 작태로 보아 그들은 정치적 색깔이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다이빙 벨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그것은 살아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를 위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만은 배안에서 죽어가는 그들을 위한 그들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는 것이었다.
오해없기 바란다.
배안에 있는 아이들이 공기가 부족해 죽어간다며 배에 공기를 주입하라는 유가족의 절규가 오래 뇌리에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공기를 주입했다. 생존자가 있을 만한 곳에 성공적으로 주입했다는 구조 본부의 발표. 누구를 위한 공기 주입이었는가? 배안의 생존자는 누군가가 베품에 좀더 감격하여 고통과 허망한 꿈에 젓어 ....... 오해하지 않기를 .......
다이빙 벨은 최소한 산 자 살아갈 자를 위한 방편이 아니라 죽어가는 배안의 생존자를 위한 어느 지성인의 간절한 몸부림이었음을....... 모든 것이 거짓과 음모 속에 젓어 있을 때 양심의 금속성으로 우리를 일깨운 것이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