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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단편] 나라도 괜찮겠어요? (上)
게시물ID : panic_891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못된야옹
추천 : 13
조회수 : 110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6/07/13 12:4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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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못된야옹의 다섯번째 단편 (2014)
「나라도 괜찮겠어요?」
 
 
 
 
 
 
 
24살의 진영은 태어나서 지금껏 이성과의 교제를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그가 원해서 그리된 건 아니었다. 자신이 마음에 드는 여성에게 수없이 고백도 해보았고 선물도 건네 봤지만 돌아오는 건 쓰디쓴 눈물만이 대부분이었다.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마음만 맞으면 된다고 누가 그랬던가.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못해 잔인했다. 그런 그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이야기는 되려 자신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데 까지는 그에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 겹으로 접힐 정도의 두툼한 뱃살, 턱까지 늘어나 보기 흉하게 출렁이는 볼 살. 거기에 소보로 빵처럼 거친 피부. 그 모든 것을 갖춘 진영에게 이성이란 그저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그렇게 여자라는 것에 대한 가상속의 환상만을 품고 오타쿠처럼 대학생활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동아리 활동은 나 몰라라 내팽개치고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하고 있는 진영에게로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건 같은 고등학교 동창이자 진영의 몇 안 되는 절친한 녀석 중 하나인 진규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진영은 컴퓨터 모니터 속 몬스터한테 심하게 두들겨 맞고 있는 자신의 날렵한 여 캐릭터를 응시한 채 쓴웃음을 지으며 책상위의 전화기를 귀로 가져갔다.
 
“아놔, 씻팔. 왜?”
“새끼야! 왜 받자마자 짜증이야!”
“아, 너한테 말한 거 아니다. 왜! 무슨 일이야?”
 
퉁명스럽게 중얼거린 진영은 어깨로 전화기를 받치며 분주하게 손을 움직였다.
 
“아, 거, 새끼 참.”
“뭔데? 말을 하라고. 어? 어라? 아이 싯팔!!”
“뭐?”
“너한테 한 말 아니다.”
 
진영은 순식간에 망연자실한 얼굴로 모니터 속 자신의 누워있는 캐릭터에게서 눈길을 때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아래 채팅창에 쓰여 있는 ‘437440의 경험치를 소실했다’는 문구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키보드로 애꿎은 짜증을 표출하려던 찰나, 수화기 너머로 다시 준규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기, 미안한테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냐?”
 
녀석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달리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진영은 그런 녀석의 분위기가 몹시 거슬리게 느껴졌다.
“뭐? 부탁? 뜬금없이.”
“나 여자 친구랑 여행가게 되서 그런데, 나대신 아르바이트 대타 좀 해주라.”
“엥?”
“진짜 부탁할게. 갑자기 정해진 거라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그래. 수업은 빼 먹는다 쳐도 아르바이트는 빼는 게 곤란하거든. 제발 도와주라. 응?”
 
잠시나마 녀석의 침울한 음성에 신경을 썼던 진영의 얼굴에 오만상이 찌푸려졌다. 기껏 생각해 준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모자라, 남의 공들여 키운 캐릭터를 처참하게 일그러트려 놓고 한다는 말이 고작 아르바이트 대타? 게다가 여자 친구랑 여행? 누구는 이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건전한 생활만을 하고 있는데 뭐? 이성과 단둘이 여행?? 진영은 울화통이 치밀었다. 그러나 그런 진영의 심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준규의 말문은 닫힐 줄을 몰랐다.
 
“내가 너 아니면 누구한테 부탁하겠냐. 여기 시급도 쌔고 진짜 일하는 건 손님도 없고 한가하다고. 좀 도와주라.”
“…….”
“진영아, 제발 도와줘!! 더도 말고 딱 5일만 해주면 돼.”
“…….”
“부탁한다….”
 
진영은 당장이라도 욕 짓거리를 내뱉고 싶었으나, 시급이 쌔다는 말에 약간 동요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피규어를 모으는 고상한 취미가 하나 더 생긴 관계로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으로는 솔직히 생활이 힘든 게 사실이었다. 그 탓에 안 그래도 며칠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한번 해볼까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구인공고 사이트를 뒤져본 결과 턱없이 부족한 최저임금도 맞춰주지 않는 노동력 착취에 버금가는 일거리가 대부분이었기에 막 포기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마음에 걸렸던 건 여자 친구랑 여행가는 이유로 부탁하는 주제에 녀석의 음성이 몹시도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이 새끼가 내가 고상한 취미를 영위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있었단 사실을 이미 꿰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진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생활에 대해선 제대로 이야기 해본 적이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준규가 자신의 고상한 취미를 어떻게 알아차린단 말인가. 내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지 않는 이상 그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
 
‘무슨 지가 ‘아무도 모르게...’의 주인공 ‘세영’이라도 된다는 거야?! 아니면 뭐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박수하(이종석)’ (이)라도 돼?‘
 
진영은 그저 단순히 타이밍이 절묘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목소리는 또 왜 이렇게 우울한 걸까? 무슨 죽을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말이다. 진영은 약간은 낮은 음성으로 진지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시급이 얼만데?”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고, 시급이 정말 쌔다면 2개월째 점찍어 둔 속옷마저 탈부착이 되는 신의 작품이라고 밖에 형용할 수 없는 한정판 피규어를 살 수 있을지도 몰랐기에, 진영은 약 1분간의 고심 끝에 입을 연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기다렸다는 듯 당당하게 말을 내뱉은 녀석의 한 마디에 진영은 수화기 너머로 순간이동이라도 해서 녀석의 입 꼬리를 찢어주고 싶은 생각에 진저리를 쳤다.
 
“시간당 5천원!”
 
뭐가 이렇게 당당하지? 거기다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 마냥 침울했던 목소리는 살짝 활기마저 띠었다. 2014년 현재 최저임금이 5210원이거늘, 고작 5천원뿐인 주제에 시급이 쌔다고? 이게 쌘 거야? 이런 니미…. 진영 역시 기계적으로 녀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입술을 씰룩거렸다.
“안 해.”
“아, 왜?”
“아, 왜? 어? 아, 왜? 이런 시발아 누굴 호구로 보나. 최저임금도 안 되는 주제에 뭐? 시급이 쌔?”
“6천원!!”
“…….”
“아, 새끼. 알았다 알았어! 6500원!”
“끊어.”
“야! 야, 너 정말 이….”
 
더 이상 준규의 다급한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다시금 모니터 속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진영. 마을로 귀환하겠냐는 메시지가 한참 전부터 화면 정중앙에 떠 있었지만 무슨 일인지 그는 마우스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았을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순식간에 희열과 희망, 그리고 좌절과 고통의 기로에서 줄타기를 하다 내려온 기분이었다. 이미 준규의 대한 작은 걱정이란 감정 따위는 씻은 듯이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어여쁜 캐릭터의 사망소식으로 인해 마음은 착찹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다.
 
“내 40만 경험치….”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마우스를 움직이려는 찰나, 책상위에서 부르르 몸서리를 치는 휴대전화로 눈길을 돌린 진영의 입 꼬리가 미묘하게 들썩거렸다. 이내 무언가 만족한 듯 나름 앙칼진 음성을 내뱉는 진영.
 
“그렇게 나와야지! 내가 날린 경험치가 얼만데! 역시 이 자식은 다루기가 쉽다니까.”
 
울다가 웃는 어린아이처럼 갑자기 묘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린 진영은 몇 번인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는 다시 책상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곤 조금 전과 달리 약간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모니터를 응시한 채 마우스를 움직여 마을로 귀환 버튼을 클릭했다.
 
‘부르르’
 
얼마 안 있어 또 한 번의 진동음과 함께 진저리를 치는 휴대전화의 바탕화면에는 ‘따가워톡’ 대화창이 활짝 열려 불을 밝히고 있었는데 거기엔 이런 메시지들이 쓰여 있었다.
 
[알았어! 7천원! 그리고 여행 다녀와서 무조건 소개팅 시켜줄게!!]
[알았다. 돈 때문이 아니라, 네 부탁이라 들어주는 거니까 약속 꼭 지켜라 새끼야.]
[ㅇㅇ 고맙다!]
 
 
 
 
 
 
 
***
 
 
 
 
 
 
 
준규 대신에 하게 된 아르바이트는 다름 아닌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였다. 한 때는 진영 역시 해본 경험이 있는 일이었기에 처음 일을 배우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사장과 주 2교대로 이루어지는 매장의 특성 탓에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게 좀 못마땅하긴 했으나, 어차피 준규 대신에 일하는 날은 5일. 오히려 적은 시간을 하는 것 보다야 짧고 굵게 돈을 조금 더 가져갈 수 있는 터라 진영에게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렇게 근무가 시작되기 전 날.
사장과의 간단한 인사 후 마지막으로 약 1시간 정도 준규에게 포스 사용법과 바쁜 시간대, 혹은 한가한 시간대. 물건이 들어오는 시간, 정리하는 방법 등 몇 안 되는 숙지 사항을 재탕 듣는 것을 끝으로 진영은 다음 날인 일하기로 한 첫째 날부터 홀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근무시간은 오후 10시부터 오전 10시. 비록 이번 주 수업의 대부분이 공강이었고, 설사 아니었다 한들 애초에 수업 참석률이 저조했던 진영에게 수업을 빼먹는 일이란 게 그다지 문제 될 건 없었으나, 평소 같았음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을 시간에 일을 하러 나와야 한다는 사실은 그에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막상 가려니까 짜증나는 군. 누구는 아주 여행가서 재미지게 놀고 있을 텐데 말이야.”
 
투덜거리면서도 어느새 11월의 제법 싸늘한 가을 날씨에 맞춰 세탁소에서 찾아온 도톰한 패딩점퍼를 걸치고 있는 진영의 모습은 마치 전쟁터로 나가는 장수의 비범함마저 느껴졌다.
 
“웃샤! 그럼 한 번 가보실까? 기다려라 한정판 속옷탈부착 피규어야! 흐흐.”
 
음흉한 눈빛을 치켜세우고 문을 나서려는 그때 뒤에서 들려 온 기계음 소리에 진영은 화들짝 놀라며 빛과 같은 속도로 뒤를 돌아본다. 이내 시야에 잡히는 것은 책상위에 놓인 자신의 휴대전화. 진영은 손으로 이마를 탁 치며 자신의 칠칠맞음을 자책했다.
 
“메시지 알림음이 아니었으면 휴대전화를 두고 갈 뻔 했네. 쯧쯧.”
 
성큼성큼 걸어가 우악스럽게 휴대전화를 쥐어 잡은 진영은 조금 전 알림음의 원인이 준규로부터의 메시지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 새끼는 뭐야 또. 염장 질이나 하려고 문자 보낸 거 아냐? 그도 아니면 뭐 일 열심히 하라는 둥 시덥잖은 잔소리나 하려 그러나.”
 
궁시렁거리며 준규로부터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진영. 얼마 안 있어 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내가 말한다는 걸 깜박 했는데, 너 거기서 일하면서 손님이 뭐든 간에 준다고 다 넙죽 넙죽 받으면 안 된다? 특히 먹을 건 절대 받아먹으면 안돼! 알겠지? 별건 아니고 예전에 그것 때문에 사장이랑 좀 트러블이 있어서 말이야. 그러니까 꼭 명심해! 그럼 수고~ 내가 돌아와서 진짜 네 취향에 맞는 여자 소개 시켜 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그럼 진짜 바이… ps: 진짜 받지 마.]
 
황당하다 못해 어이없는 문자 메시지 내용에 진영은 한동안 말없이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지 이건….”
 
 
 
 
 
 
 
***
 
 
 
 
 
 
 
생각처럼 편의점 일이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었다. 어릴 때 했었을 때의 감을 살려 하면 문제없을 거라 장담 했는데도 불구하고 지금 진영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싯팔!”
 
자연스럽다시피 욕 짓거리가 그의 입 주변을 멤 돌았다. 시간은 새벽 2시가 되어가는 시점. 전 근무자와 교대하고 4시간이 다 되어가는 상황이었음에도 매장 안은 그야말로 발 디딜 틈 없이 박스들로 가득했다.
 
“물건이 이렇게 많이 들어온다고는 말 안 했잖아!!”
 
준규 녀석의 말처럼 손님은 정말이지 가뭄에 콩 나듯 그 수를 전부 머릿속에 넣어둘 수 있을 만큼 적었다. 이렇게 손님이 없는데도 이 매장이 사라지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으니 뭐 말해 뭐하겠는가. 하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여기서 평생 일할 것도 아니고 자신은 어차피 잠시 동안만 머물다가 사라지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진영은 야간에 손님이 이렇게 없는 만큼 주간에 엄청나게 빡세겠거니 하며 이 상황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거기다 이렇게 많은 양의 물건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매장의 존재여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뭔 놈에 페페로를 이렇게나 많이… 읭? 페페로? 가만, 그리고 보니 오늘이 며칠이더라?”
 
진영은 빠르게 휴대전화를 꺼내 날짜를 확인한다.
전원 버튼을 한 번 누르자 바탕화면에는 11월 9일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뭐야? 조만간 페페로데이였어? 헐… 전혀 몰랐어….”
 
진영은 왠지 모를 배신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비록 페페로 따위 받을 사람도 줄 사람도 없었지만 하필이면 그런 날이 끼어있는 타이밍에 일을 시킨 준규가 괘씸했다.
 
“지는 여행을 가고 나한테는….”
 
하지만 말해서 무엇 하랴. 애초에 시간 개념도 없이 컴퓨터에 빠져 살아온 자신의 잘못인 것을. 진영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터덜터덜 매장 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옮겼다.
 
‘칙.’
 
익숙하게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이며 그는 저만치 텅 비어있는 큰 도로를 시작으로 맞은편에 크고 높은 불 꺼진 빌딩건물들로 시선을 넘긴다. 평소라면 즐비한 차들과 많은 인파로 북적거릴 거리가 초라할 정도로 고요하기만 하다. 마치 인적이 드문 산속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 혹은 아무도 모르는 다른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은 묘한 설렘마져 느끼며 진영은 일상으로부터의 작은 일탈 속에서 몸부림쳤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지금까지의 오타쿠같은 생활도, 취업준비의 대한 고민도, 그 밖에 여러 가지 쌓일 대로 쌓인 스트레스의 파편들도 모조리 날아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해방감. 비록 5분 남짓한 적은 시간이었지만 진영은 그걸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온통 불이 꺼진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 그나마 미약한 달빛에 몸을 맡긴 채 달에게 의존하는 지금껏 자신이 봐왔던 모습이 아닌 연약한 도시의 풍경을 곱씹으며 진영은 그래도 이렇게 한적한 일자리를 제공해 준 준규에게서 내심 고마움을 느꼈다. 비록 며칠 안 되는 시간이겠지만 그래도 하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까지 하며 그는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신다.
이내 꽉 찬 쓰레기통에 꽁초를 아슬아슬하게 걸쳐놓고는 기지개를 과하다 싶을 만큼 펴고 나서야 진영은 다시 매장 안으로 몸을 옮겼다.
 
“자, 이제 다시 정리를 시작해 볼까?”
 
 
 
 
 
 
 
***
 
 
 
 
 
 
 
역시 시작이 반이라 했던가? 어느 샌가 말끔하게 정돈되어있는 매장을 찬찬히 훑어보며 진영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 물건이 들어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그는 자신이 무척 대견스러운 모양이었다. 진영은 카운터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휴대전화를 꺼내 현재 시간을 확인 했다.
 
‘2시 59분’
 
막상 일을 다 끝내고 보니 정리를 마치는 데 까지 그리 오래 걸린 건 아닌 것 같았다. 물론 그 와중에 손님이 단 2명뿐이 오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지만 말이다.
덕분에 진영은 왠지 모를 뿌듯함에서 인지 입술을 들썩이며 이제 할 일도 다 했으니 미리 준비해 온 노트북으로 퇴근 시간까지 게임이나 하며 시간을 때울 요량이었다.
그렇게 카운터 위에 늘어져 있던 상품들을 한 곳으로 밀어버리며 노트북을 꺼내 전원 버튼을 누르는 순간이었다.
 
‘딸랑’
 
불현듯 들린 종소리에 진영은 자연스럽게 단시간에 몸에 베인 영혼 없는 ‘어서 오세요.’ 란 인사말을 끄집어내며 매장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네 안녕하세요.”
 
진영의 영혼 없는 인사말이 끝나기 무섭게 환하게 웃으며 화답하는 여성. 대충 20대 초반정도 되었을까 싶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가냘 퍼 보여 보호본능을 극한으로 자극 하는 그 여성은 자신의 외모로 인해 상대방이 어떤 심정일거라는 생각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밤 새느라 피곤하시죠?”
“아…네…?”
“저 같으면 꾸벅꾸벅 졸고 있을게 뻔한데, 대단 하세요 호호.”
 
이렇게 눈웃음을 지으며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긴 갈색 웨이브가 부드럽게 들어가 있는 컬이 좋은 머릿결에 긴 속눈썹, 동그랗고 큰 눈, 작으면서도 야무지게 오똑한 콧날과 새침해 보이는 여린 분홍빛 입술. 전체적으로 누구나 선호하는 갸름한 턱 선에 과하지 않은 아슬아슬할 정도로 요염한 바디라인.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와 그 창백한 피부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와인색 야상 코트에 짧은 블랙 미니스커트, 그리고 레드 와인의 하이힐까지 전체적으로 완벽한 일체감을 자아내는 그 모습에 진영은 그야말로 요즘 한창인 여자 아이돌 혹은, 자신이 현재 빠져있는 게임 속 미소녀 캐릭터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그녀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여자 경험이 한 번도 없던 진영이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 네….”
 
대답도 하는 둥 마는 둥 넋을 잃은 채 자신에게만 꽃 혀 있는 진영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할 텐데 여자는 일부러 모른 척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것 따위는 지겨울 만큼 겪어온 터라 신경을 안 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묘한 웃음만을 흘리며 진영을 지나쳐 저만치 온장고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략 한 30초? 1분? 여자는 온장고에서 아메리카노라 적힌 커피 캔 두 개를 꺼내 유유히 진영이 있는 카운터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진영은 넋이 나간 상태로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다.
 
“얼마에요?”
“…….”
“저기….”
“…….”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면….”
“…네”
“저….”
“네…. 네?”
 
양 볼에 홍조를 띄며 약간은 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살짝 돌리는 여자의 모습에 진영은 그제 서야 자신이 멍하니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일부러 그런 건 저, 절대 아니….”
“풉!”
“저… 지, 진짜인데….”
 
고개를 푹 숙이며 연신 죄송하단 말을 내뱉는 진영의 모습에 여자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덕분에 진영의 얼굴엔 한층 더 깊은 당혹스러움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저, 정말 나쁜 뜻은….”
“후훗. 죄송하긴요, 그럴 수도 있죠!”
“네…?”
“괜찮다구요. 것보다 이것 좀 계산해 주실래요?”
“뭐가…계산해요. 오? 네? 아! 네, 죄송합니다.”
 
횡설수설하던 진영은 그제 서야 여자가 가져온 커피 두 캔을 알아차리곤 황급히 포스를 두드리며 스캔했다. 이내 바코드를 읽는 리더기에서 삐익 소리가 연거푸 두 차례 흘러나온다. 그 무미건조한 소리에 두근거리던 진영의 마음이 잠시나마 안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이, 이 천 원이세요.”
“여기요!”
“네, 감, 가, 가, 감사합니다.”
 
답답함의 극을 달리는 말더듬기 스킬을 구사하며 그녀에게서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받는 진영의 손이 무한한 속도로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허나 이번에도 역시 그녀는 그런 진영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이 살며시 입을 열고는 쏜살같이 자리를 벗어났다.
 
“이거 하나 드시면서 하세요!”
“네?”
“그럼, 수고 하세요!!”
“저…. 저기!!”
 
‘딸랑’
 
작은 요정의 날갯짓과도 같은 청명한 소리를 끝으로 진영은 멍하니 아무도 없는, 여자가 떠나고 텅 빈 자리만을 바라보며 천천히 벌어졌던 입술을 지그시 오므렸다. 그런 그의 앞에는 아직 그녀의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따뜻한 커피 한 캔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
 
 
 
 
 
 
 
“진짜라니까.”
“아, 그러셨어요?”
“새끼야 장난 아니고 진짜라고!”
“그래, 네 눈에 안 예쁜 여자가 어디 있겠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네 말 대로면 ‘전지현’이 우연히 들어간 편의점에서 처음 본 ‘옥동자’한테 호감이 생겼다는 말인데. 시발 말이 된다고 생각 하냐? 그렇게 까지 하면서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고 싶어!?”
“싯팔 거기서 옥동자가 왜 나오는데!”
“새끼, 곧 죽어도 지가 옥동자랑 동급이라고는 인정 안하네.”
“뭐 인마!?”
 
둘째 날 밤 11시가 거의 다 되가는 시간. 진영은 매장에서 준규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어제 있었던 일을 일이 끝나자마자 전화해서 알리고 싶었던 진영이었지만 준규의 휴대전화가 꺼져있던 덕분에 그로부터 거의 하루의 반 이상이 지난 이 시점에서야 알리고 있는 것이었다.
 
“기분나빠하지 말고 잘 생각해봐. 네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연애 경험이 없어서 그래 임마. 말 몇 마디 나눈 것 갖고 너한테 관심이 있는지 어떻게 아냐? 게다가 처음 보는 사이잖아. 무슨 여자가 남자처럼 한 눈에 뿅 가는 현상이 흔한 줄 알아? 그렇다고 네가 무슨 ‘강동원’ 정도 되는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고….”
“됐어. 새끼야! 그래 너 잘났다. 여자 친구 하나 제대로 사귀어보지 못한 내가 감히 너한테 무슨 말을 하겠냐! 여자 친구랑 아주 재미지게 쳐 놀기나 해라! 시발. 끊어!”
“야, 다 널 위해서 하는 소….”
 
더 이상 준규의 음성은 수화기 너머로 들리지 않았다. 진영은 신경질적으로 휴대전화를 카운터 구석에 던지다시피 처박아놓으며 중얼거렸다. 터무니없이 마치 자신을 노골적으로 비꼬는듯한 녀석의 말투가 짜증스럽기 그지없었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녀석을 알고지낸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렇게 자신을 노골적으로 몰아붙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덕분에 오늘 녀석의 모습은 진영에게 그야말로 낯설기 까지 했다.
 
“시발! 이 새끼 왜이래? 음료수도 하나 먹으라고 주고 갔는데, 그게 호감이 없다면 가당키나 한 일이야?”
 
아무도 없는 매장의 빈 공간을 응시한 채 삿대질을 하는 진영의 눈빛에 불꽃이 일렁거렸다.
솔직히 그도 자신이 연애경험이 한 번도 없기에 자신이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반면에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친구라는 녀석인 준규만큼은 자신의 말에 긍정적인 반응을 해주길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돌아오는 말이라는 게 현실을 직시하고 네 주제를 알라는 듯 한 어투의 짜증나는 말이라니. 거기다 마치 그 말을 반증하듯 나라는 주제는 녀석의 대타로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고 녀석은 내가 일하는 동안 여자 친구랑 단 둘이 여행을 가서 재미나 보고 있으니, 진영으로써는 그야말로 짜증이 솟구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싯팔 너 잘났다! 하지만 두고 봐라! 반드시 내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말테니까!”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에게 때를 쓰며 억지를 부리는 모습처럼 진영은 비장한 얼굴로 의기양양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새벽 2시가 넘은 시각.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그의 움직임은 한눈에 봐도 너무나 느릿느릿 해서 무슨 굼벵이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물론 그의 투실투실한 외모가 그렇게 보이는 데 적잖이 도움을 주고 있는 건 명확한 사실이었지만.
 
매장의 특성상 새벽시간에 대부분의 상품이 들어오는 관계로 삼각 김밥을 비롯한 우유 등, FF상품의 검수와 진열 역시 진영의 몫이었는데, 오늘은 어제와 달리 하루걸러 격일로 들어오는 음료 및 주류, 담배 및 생필품 등의 물류에 포함되는 상품들이 들어오지 않는 날이었기에 그의 표정은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움직임이 어제와 비교해서 확연히 느려진 이유가 이것이었음이리라.
그래도 일은 제대로 하려는 모양인지 전표를 들고 왔다 갔다 하는 그의 손은 몸과는 달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이트메어의 기준이도 좋아하는 준석 김밥’이 48개.”
“‘속죄의 방에서 먹는 6찬 양식’ 도시락이 5개.”
“그리고 또 어디보자… ‘이거 먹고 밖.에.나.가.지.마.시.오’ 도시락이 2개… 어라 3개여야 하는데, 이것만 2개 들어왔네? 그나저나 요즘 편의점 도시락 이름들은 왜 이렇게 유니크 해? 겁나 읽고 먹고 싶어지네. 언제 다 먹고 읽어볼지는 모르겠지만.”
 
진영은 마지막으로 전표 맨 끝자락에 있는 ‘환상괴담의 공포씨앗 김밥’ 을 끝으로 모든 검수를 마치고 카운터 구석진 자리에 마련되어 있는 수납공간 속으로 전표를 밀어 넣었다.
 
“후. 이제 정리는 다 했고, 이따 아침에 청소만 하면 되는 건가. 뭐, 청소는 아침에 몰아서 하면 되겠고… 그동안 컴퓨터나 해야겠군.”
 
오늘 근무 시간동안 해야 할 일들을 대충 곱씹어 보던 진영은 창고로 들어가 가지고 온 노트북을 들고 카운터로 돌아왔다. 카운터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펼쳐 놓고 의자에 앉아 마우스를 연결하기 무섭게 전원 버튼을 눌러보던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처참히 일그러졌다.
 
“염병. 배터리가 없네… 충전기 안 가져 왔는데….”
 
울며 겨자 먹는 표정이 딱 이런 표정일까?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듯 촉촉하게 젖어가는 눈가를 누가 볼 새라 황급히 소매로 훔친 진영은 신경질적으로 노트북 뚜껑을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라이!!”
 
 
 
 
 
***
 
 
 
 
 
 
 
어제와 같은 텅 빈 도로와 건물들의 감상을 안주삼아 맛깔나게 담배를 꼬나물고 작은 일탈을 꿈꾸며 차가운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던 진영은 문득 어제의 일을 떠올려 봤다.
 
십대 시절 자신의 외모로 비롯된 여성의 대한 공포심으로 가득했던 일상에 작은 변화를 가져다 준 그녀. 24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이성이라는 존재에게서 무언가를 받았다는 신비한 경험과, 이런 외모의 자신에게도 아무 거리낌 없이 웃어주고 말을 거는 이성이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과연 이건 그저 그냥 스쳐 지나가 버리는 수많은 사소한 일 중 하나에 불과 했을까? 아니면 준규 녀석의 말처럼 단순한 우연 혹은 나 혼자만의 망상이 만들어 낸 착각의 산물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난 이런 설렘에 빠질 필요 없이 그저 이 일을 하기 전으로, 원래의 나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만인 건가?
진영은 약간은 씁쓸한 얼굴로 허름한 자신의 외투 안주머니에서 어제 그녀에게 받았던 캔 커피를 꺼내 지그시 바라보았다.
 
십대 시절 이후 처음으로 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에 빠져있는 자신의 모습에 진영은 스스로도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없던 일로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머리로는 자제할 수 있다 한들 마음까지 자제하는 것은 불가능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일까? 남들에게는 너무도 사소할 수도 있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진영에게는 너무도 가슴에 와 닿는 따뜻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진영은 도저히 갈피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식어 차가워져 버린 캔의 감촉이 손끝에서부터 그의 마음 한켠으로 전해져 온다. 뜨거웠던 어제와 따뜻한 온기가 미미하게나마 남아있던 아까와 달리 이제는 확연히 차갑게 느껴지는 차가운 캔.
 
진영은 캔에서 시선을 옮겨 다시 저만치 솟아있는 시커먼 고층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자신도 저런 높은 건물을 매일 들락거리는 회사원이 될 수 있을까? 별거 아닌 건물 하나하나에 그는 불현듯 다시금 찾아온 취업에 대한 미래의 고민들로 머리가 복잡해져 가고 있었다.
 
“후.”
 
그런 진영의 마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뽀얀 안개와도 같은 연기가 그의 시야를 잠시 동안 어지럽히다 흩어졌다. 그래서 인지 미적지근한 공기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되돌아 나오는 감각이 오늘따라 묘하게 가슴을 진정시켜주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진영은 다 타들어간 꽁초를 손가락으로 아무렇게나 튕겨버리곤 반쯤 열려있던 매장 문 틈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아니, 들이밀려고 했다. 그러나 불현듯 뒤에서 들려온 누군가의 음성에 그는 문에 몸이 끼인 채 고개만 뒤로 돌리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순간 그의 사고는 이미 정지되어 몸속에서 뜨거운 전류가 흐르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에 몸을 맡긴 채 그저 멍하니 눈만 깜박일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양 볼에 홍조를 띄운 채 환한 웃음으로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 그건 다름 아닌 진영의 마음을 하루아침에 헤집어놓은 장본인인 ‘그녀’였다.
 
 
 
 
 
 
 
***
 
 
 
 
 
 
 
“날씨가 많이 추워 졌네요. 후후.”
“…….”
“그 쪽은 별로 안 추운가 봐요? 아니면 어디 아파요? 얼굴이 왜 그렇게 새빨갛죠? 열이라도 나는 거 아니 예요?”
 
카운터 앞에 서 있던 여자는 걱정 어린 눈망울로 진영의 이마로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진영은 반사적으로 막으려다 그녀의 손을 잡았고, 동시에 찾아온 약 2초정도의 짤막한 정적. 진영은 황급히 그녀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아!! 아, 괘, 괘괘, 괜찮아요!”
“아…! 네….”
 
진영 같은 연애경험이 없는 초짜가 보기에도 그녀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달리 심각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저, 그게… 그러니까….”
“저는 그저 그쪽이 걱정이 돼서….”
“아, 그, 그러니까 그게….”
 
금방이라도 새하얀 백옥 같은 볼을 타고 그녀의 큼지막한 눈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진영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안절부절 못하며 말을 더듬는 게 고작이었다. 낮선 사람, 그것도 이성을 울리게 된다는 사실에 그는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었다. 자신이 울어 본 적은 있어도 누군가 자신의 앞에서 자신 때문에 눈물을 흘리게 되는 일은 죽었다 깨어날지언정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예상해보지 못했었다. 그런 그였기에 진영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결국 또다시 어제와 마찬가지로 죄송하다는 말을 내 뱉는 진영. 그의 머리로써는 도무지 이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제가 이, 이런 경험이 처음이다 보니 그만….”
“네?”
“그러니까, 사실은 제가… 지금까지 한 번도 여자… 아, 아니… 아무튼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풉!”
“에?”
“풉 푸후훗!”
“아니, 왜….”
 
진영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그녀의 모습에 더욱 더 당황했다. 나름 자신이 생각했던 여러 루트 중에서 가장 신빙성 있어 보이는 루트를 선택한 것이었는데, 그녀의 반응을 본다면 그게 아무래도 계산 착오였던 모양이었다. 물론 여자의 대한 지식이 전무 하다시피 한 진영의 계산이 맞는 다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것이겠지만, 아무튼 진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 저, 저기 제가 무슨 시, 실수라도….”
“깔깔깔깔!!”
 
웃음을 멈추기는커녕 되려 더 과하다 싶을 만큼 웃는 그녀의 모습에 진영은 그저 삐질삐질 식은땀만을 흘리며 어쩔 줄을 모르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여자는 간신히 웃음을 멈추려 애를 쓰며 입을 열었다.
 
“푸후후… 장난 이예요 장난! 푸풉!”
“네?”
“장난 친거라구요, 장난! 나도 모르게 그만! 푸후훗.”
“아….”
“미안해요, 미안해. 근데 그 쪽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고 싶어지는 걸.”
“에? 아, 아니에요. 괘, 괜찮습니다.”
“그래서 일단 어디 아픈 거는 아닌 거죠?”
“그, 그럼요. 보시다시피….”
“그럼 다행이구요 호호.”
 
진영은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말에 양 팔을 하늘위로 뻗치며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고 어필했다. 그 모습이 마치 누가 본다면 별 정신 나간 미친사람 다 보겠다고 혀를 찰 것만 같은 비호감적인 모습이었으나, 적어도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오늘도 밤새 일하시느라 피곤하시겠어요.”
“벼, 별말씀을요.”
“근데 혹시 원래 일하시던 분은 그만두신건가요?”
“아, 그게. 좀 사정이 있어서 제가 하게 되었어요.”
“아… 그렇게 된 거군요. 어쩐지 어제부터 안보이더라니 그 개 새….”
 
순간적으로 차갑다 못해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녀의 얼굴. 그러나 금 새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새침하고 도도한 얼굴로 돌아온 그녀는 다시 여리여리한 음성으로 말문을 열었다.
 
“흠흠, 사실 제가 여기 단골이거든요. 근데 어제부터 다른 분이 계시 길래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거예요. 호호.”
“아, 네….”
“앞으로 자주 봐요! 뭐, 자주 보기 싫어도 자주 보게 될 테지만! 그리고 제 이름은 ‘최지현’이랍니다. 그 쪽은요?”
“네?”
“계속 그쪽 그쪽 그럴 수는 없잖아요. 이름이 뭐냐고요.”
“아, 저는 이, 이 진영이라고 해요….”
“진영 씨구나! 자, 악수!”
“네…네?”
 
진영은 손을 내밀고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지현을 보며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이내 지현은 덥썩 그의 손을 꽈 악 움켜잡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이걸로 우리 친구 하는 거예요? 알겠죠?”
“네 뭐, 저야… 상관 없….”
“OK! 그럼, 진영씨 수고하고요. 내일 또 봐요? 파이팅! 아자 아자!!”
“네… 네?”
 
진영은 어느새 매장을 벗어나 저만치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던 조금 전의 상황들이 아직까지 그의 머리로는 제대로 정리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느덧 저만치 작은 점이되어 흩어져 버린 그녀의 잔상에 진영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여 약 두 번이나 그녀의 손을 잡았던 자신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투박하고 거칠기 그지없는 커다란 손. 그 볼품없는 손에서 진영은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그녀의 작은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무언가 소중한 것이라도 담겨 있는 양, 조심스럽게 양 손을 포개어 자신의 가슴팍에 갖다 대며, 진영은 묘한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정말 나를….”
 
 
 
 
 
 
 
***
 
 
 
 
 
 
 
녀석의 언행에 몹시 언짢았던 진영이었기에 두 번 다시 이런 일로 녀석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야 말로 제아무리 여자 경험이 꽤 되는 준규 녀석이라 할지라도 자신에 말에 토를 달 수 없을 거라, 진영은 생각했다.
 
“정말이야. 이번엔 내 이마까지 짚어보면서 걱정하더라니까. 이 정도면 내 착각이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년… 아니, ‘전지현’이라고 치고 그 ‘전지현’이 옥동자… 아니, 네 이마를 짚어보는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시도했다 이거지?”
“방금 뭔가 좀 딴지 걸고 싶은 단어가 들렸다만 넘어가기로 하고, 그래. 진짜라고.”
“흠….”
“근데 그 사람 너도 아는 사람 같던데? 전에 일하던 사람 그만뒀냐고도 묻더라. 너 그 사람이랑 친했냐?”
“…….”
“왜 말이 없어. 그 사람 말론 단골이라던데, 너 그럼 알거 아냐.”
“모, 몰라. 자식아! 하루에 오는 손님이 몇 명인데 내가 일일이 얼굴을 다, 다 기억 하겠냐!”
“미친? 이틀 해보니까 대충 봐도 손님 20명도 안 되겠고만.”
“몰라! 아무튼, 너 아무리 여자가 궁하다고 해도 아무한테나 그렇게 마음 주지 마 새끼야! 내가 여행 다녀와서 소개팅 시켜준다고 했잖아! 갑자기 뭐 그리 호들갑인데?”
“호들갑은 무슨, 그래서 니가 보기엔 어떤데? 이래도 내 단순한 망상이야? 착각이냐고?”
“어. 그러니까 괜히 가까이 하지 마!”
“미친, 내가 아무리 연애경험이 없다고 해도 이 정도는 나도 알 수 있어 임마! 이건 분명 나한테 관심 있는 거라고!”
“그건 절대 아니라니까!”
 
이번에야말로 녀석도 인정할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진영이었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준규의 반응은 이상하리만큼 시큰둥했다. 마치 일부러 아닌 척하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되려 시큰둥함을 넘어 격분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확실히 딱 뭐다라고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진영은 그런 것 보다 연애 경험 좀 자신보다 많다고 (좀 많이 많았지만.)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의 태도가 더욱 성가시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진영의 마음도 모르고 수화기너머의 준규는 다시 입을 열었다.
 
“됐고, 너. 내가 한 가지 만 말하겠는데, 그 여자 가까이 하지 마.”
“뭐?”
“네 말대로 그렇게 노골적으로 접근하는 여자치고 좋은 여자 못 봤다. 조심해라. 칠칠맞게 살지 말고!”
“니가 그 사람이랑 무슨 일 있던 건 아니고?!”
“아무튼 난 분명히 얘기했다. 친구로 써 이 정도면 내가 마지막으로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한다. 그럼 형님 바쁘니까 끊자!”
“야! 여보세요? 여보세요?? 야야!! 김준규!!!”
 
진영은 끊어져버린 수화기를 들고 악을 쓰듯 소리쳤다. 하지만 더 이상 수화기 너머로 준규의 얄미운 음성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뭐? 마지막? 시발! 이런 새끼를 친구라고! 뭐? 그런 여자 치고 좋은 여자 못 봤다? 얼씨구 그러셔? 아주 연애박사 나셨네 그려 시발!!”
 
진영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허공에 대고 신경질을 부렸다. 아무리 그래봐야 별 수 없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멈출 줄을 몰랐다. 마치 한 마리 발정 난 오크와도 같은 모습. 하지만 도저히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선 분한 마음이 가시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문득 책상위에 놓인 시계를 바라보던 진영은 순간 뭔가 굳은 결심이라도 한 듯 눈을 빛내며 의미심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기필코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고 말겠어.”
 
마치 스스로에게 최면이라도 걸듯이 말이다.
 
 
 
 
 
 
 
***
 
 
 
 
 
 
 
진영에게 있어 오늘은 그야말로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았다. 고작 덥수룩하던 머리를 깔끔하게 잘라 왁스로 나름 맛깔나게 멋을 내고 그 동안 입지 않던 옷들을 이용해 컬러풀한 코디를 했다고 한들 그의 토실토실하다 못해 투실투실한 외모가 한 순간에 소위 말하는 꽃미남의 반열로 올라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일단 시도를 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덕분에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매장에 도착한 그의 표정엔 작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감이라는 액세서리가 장착되어 있었다. 또한 그 액세서리는 그 어떤 온라인 게임에 등장하는 신급 아이탬의 위용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라 진영은 자부했다. 그래서일까? 웬일로 매장의 사장이라는 작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어서 와요 진영씨. 오늘은 무척이나 일찍 왔네요? 킥킥.”
“네, 좀 눈이 빨리 떠져서요.”
 
왠지 가뜩이나 얍삽해 보이는 사장의 인상이 오늘따라 더욱더 얍삽해보이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진영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자, 그럼 오늘 하루도 수고! 킥킥”
“네, 들어가십쇼.”
 
매장 문을 열고 나서는 그 순간까지 입가에 핀 웃음꽃을 지우지 않는 사장의 모습에 진영은 의아함이 들었지만 그는 그냥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보다 하고 아무렇지 않게 포스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삑삑 삐리릭 위이잉’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기계음과 정산용지가 빠져나오는 걸리적거리는 소리. 그렇게 몇 분 지나지 않아 진영은 활짝 열려있는 포스기의 돈 통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시제도 맞고, 정산도 끝냈고… 이제 지현씨만 기다리면 되는 건가?”
 
청소 및 정리정돈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는 듯 그는 홀가분하면서도 긴장어린 표정을 지으며 카운터 의자에 쓰러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톱만을 물어뜯으며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녀의 등장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이미 진영의 사고에는 오늘 역시 그녀가 등장할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오전 중에 준규 녀석과 통화했던 내용을 곱씹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친구로써의 도리니 뭐니 시덥잖은 소리까지 끄집어내며 나를 무시하던 녀석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진영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분명 녀석에 비하면야 자신은 그저 초식남의 반열에조차 오르지 못하는 허접 나부랭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예전부터 촉 하나만큼은 자신 있던 진영이었다. 언제나 그가 ‘이렇게 되지 않을까?’ 혹은 ‘이렇게 될 것 같다.’ 라고 생각했던 일들은 거의 그렇게 되거나 하다못해 비스무리 하게라도 이루어졌었다. 물론 그 촉의 대부분은 항상 짝사랑하던 이성에게 고백하면 100% 실패하는 등의 부정적인 촉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촉에 대해 때로는 경이롭게까지 생각했다. 일단은 맞았다는 게 중요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의 장기와도 같은 그 촉은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진영이 준규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아무리 자신보다 연애경험이 많은 준규라 할지라도 이번만큼은 결국 자신의 말이 맞음으로 판명나 자신에게 경솔했다고 쓴웃음을 지을 거라 자신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준규야. 네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내가 그녀와 함께 네 앞에서 아주 열렬히 코웃음을 쳐줄 테니까 말이다!”
 
진영은 상상만으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上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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