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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 네임펜을 들어 달력에 X표시를 한다.
오늘로 딱 49일째다.
내 방에 검은 구멍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네, 걱정 마세요.”
나는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소파 위로 힘없이 던졌다.
배꼽 아래에서부터 깊은 한숨이 올라왔다.
검은 양복 재킷을 벗고 힘없는 몸을 소파에 뉘었다.
아버지의 장례식 내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아버지는 당신의 목숨을 스스로 저버리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징조가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가족들 모두가 애써 그것을 무시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문득 어릴 적 나와 놀아주던 아버지 생각이 났다.
그는 건강했고 단단했다.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낸 후 부터였을까.
내가 엇나가기 시작한 때 부터였을까.
그의 딸 선우가 먼저 떠난 후 부터였을까.
아버지의 눈은 생기를 잃어갔다.
그는 회색이 된 것 같았다.
40년 넘도록 무지개 빛으로 색칠해 온 그의 인생이 회색빛에 물드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그 후 20년 동안 아버지의 등은 늘 회색이었다.
회색은 검은색보다도 어둠에 가까운 색이다. 회색은 세상에서 존재감 없이 흐느끼다 여차하면 어둠에 잡아먹히고 만다.
나는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어쩌면 내 가족의 미래를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이의 입으로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나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저주받은 가족이야.”
몇 년에 한 번 볼까말까 한 육촌 어른이 작게 속삭이는 한 마디가 내 귀에 들어오고 말았다.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나조차 알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주받은 가족의 마지막 생존자인 나는 거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들어갔다.
왠지 옷이 몸에 달라붙어 벗어지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샤워를 하는 내내 등에 손바닥만 한 무언가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다섯 번이고 여섯 번이고 비누칠을 하고 거울을 확인한 후에야 몸을 닦고 나왔다.
거실, 주방, 방 두 개, 화장실이 있는 집이다.
혼자 살기에 꽤 넓은 집인 듯하다.
오늘따라 더 넓게 느껴졌다.
현관 옆 방에서 내 집에 들르면 으레 하룻밤을 자고 가던 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와서 물을 찾을 것만 같았다.
물밀 듯 떠오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애써 지우며 내 방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여기저기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켜 앉아 눈을 비볐다.
“......?”
맞은편 벽에 손바닥만 한 검은색 구멍이 있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티셔츠를 걷어올리고 등을 만져봤다.
어젯밤 나를 괴롭혔던 손바닥만 한 무언가가 더 이상 만져지지 않았다.
저주받은 가족의 일원답게 나는 검은 구멍을 무시해 버렸다.
죽음의 저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게 벽에 난 조그만 구멍 하나가 무서울 리 없었다.
그렇지만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손바닥 두 개 만하게 커져버린 구멍에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구멍은 내 머릿속의 한 쪽 구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보다 커다란 생각이 구멍에 대한 생각을 막아버렸다.
과거의 망령은 그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이었다.
열다섯 살, 방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어머니를 발견했을 때가 떠올랐다.
스무 살, 선우를 발견했을 때가 떠올랐다.
며칠 전, 아버지를 발견했을 때가 떠올랐다.
내 가족은 무엇이 그리 힘들어 세상을 그리도 빨리 등져버린 것일까.
한 번 나를 사로잡은 생각은 그 때부터 내내 놓아주질 않았다.
‘나도 똑같이 되겠지.’
막연한 두려움도 비뚤어진 조소도 아니었다.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었다. 언제인가가 중요할 뿐이었다.
저주 받은 가족 이야기의 마지막은 나의 죽음이다.
그리고 지금, 구멍이 생긴 지 49일 째 되는 날, 검은 구멍은 내 방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웠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도대체 뭘까.
손을 뻗어 벽에 대어보았다.
벽에 닿지 않고 점점 더 들어간 내 손바닥은 허공을 어루만졌다.
나는 이끌리듯 벽 속으로 들어갔다.
그 곳엔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회색빛 공간에 주저앉아 회색 어깨를 움츠리고 흐느끼고 있었다.
어머니가 서투르게 깎아준 뒷머리가 삐죽 나온 소년은 엄마를 부르고 있었다.
소년에게는 위로가 필요했다. 아무도 손 내밀어주지 않았던 그 때의 소년에게 이제 내가 손을 내밀 차례인 것 같았다.
소년의 등 뒤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소년의 등에 올려놓자 그는 뒤돌아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물에 젖은 소년의 눈동자가 점점 커져갔다.
몇 초나 지났을까. 소년은 내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 냅다 달려가기 시작했다.
“진우야!”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필사적인 뒷모습이 꼭 내게서 도망치는 모양새 같았다.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회색 몸을 돌려 구멍을 빠져나갔다.
회색 다리는 나를 조그만 베란다로 이끌고 갔다.
나는 이제 안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었다는 것을.
한 쪽 다리를 난간 위로 올리며 나는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