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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이름짓는 여자
게시물ID : panic_892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2222
추천 : 26
조회수 : 1817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6/07/14 10: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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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매력적인 여자와 단둘이 술을 마실 때 어떤 기대를 하시나. 반 쯤은 오늘 밤 같이 잘 기대를 하지 않나. 사소한 불씨를 찾아 한번쯤 뒤적거리지 않나. 실현 가능성이 너무 멀 때, 사소한 기대를 했다는 사실을 지워버리고  평온한 얼굴을 하는 이들도 있다. 찰나의 일이다. 나만 그래왔다 말하지 말길 바란다. 

기대가 현실로 다가오려면 침착해야 한다. 침착해. 맘먹고 달려들면 절대 안되는 일이다. 검은 마음은 2막으로 미루고, 굴러가는 대로 통통 튀어 목표에 가닿는 자연스러움이 필요하다. 지금 눈 앞의 여자와 나는 그렇게 술을 마신다. 오늘 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작정하지 말자. 맘 먹지 말자. 분위기 좋다.


“우리 솔직한 이야기 하나씩 해 봐요.”


여자가 말했다. 응?, 이러면 곤란하다. 초연한 가면이 벗겨졌을까. 얼마만큼 솔직해 질 것인가. 너의 솔직함에 달렸다. 나부터 할께요라고 여자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좋은 여자다. 어서 솔직한 이야기를 해 보세요.

“저는 이름을 지어요.”


뭔 소리래. 작명소를 운영하시나. 나도 의뢰인에게 작명을 해 준 적이 있다. 따분한 일이다. 뭐든지 하는 사무실에서는 곧잘 있는 일이다.

“할아버지처럼 느껴지네요. 무슨 이름을 짓나요?”

“사람뿐 아니라, 모든 것에 이름을 붙여요. 내가 이름을 정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불러요. 안 믿죠? 취했나 싶죠? 그런데 정말 그래요.”


그.래.요. 정.말. 그. 래. 요. 그녀는 단어 하나하나 끊어 읽었다. 나는 그녀가 취해서 한 소리이길 바랬다. 정신나간 사람들을 지난 주에도 실컷 만났다. 지금은 퇴근 후 업무외 시간이다. 야근 수당을 방는 것도 아닌데, 날 좀 괴롭히지 마시라.


“이를테면. 이름 지어 주는 사람을 이제부터 ‘세뇨리따’라고 명명합니다. 제가 뭐하는 사람이라구요?”

“당연히 세뇨리…따.”

내가 뭐라 말했나. 취했나. 그녀는 자기를 세뇨리따라고 소개했다. 유치한 작명 센스가 어쨌든, 그녀는 세뇨리따다. 그 외에 어떤 단어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이다. 그녀는 세뇨리따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세뇨리따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취했나 봐요. 정말 유치한 이름이었어. 그냥 사설 작명가라고 할께요. 어쨌든 믿으시겠죠?”

사설 작명가. 그랬다. 설득력이 최고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 그녀는 사설 작명가다. 조금 전에 세… 뭐라고 했던 기억이 흐려지고 있었다.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마티니를 한 잔 더 주문하고 나는 술 기운에 몸을 맡겼다. 얌체볼처럼 통통 순리에 흘려 보내자.


“언제부터 이름을 짓기 시작했나요. 아니, 언제부터 자기가 그럴 수 있다는 거,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나요.”


“처음부터요. 내 이름도 내가 지은 것 같아요. 기억도 안나지만, 내가 말하는 걸 보고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했다고 해요. 나도 안 믿는 이야기에요. 마음, 마음하는 걸 보고 이름을 지었대요. 내 이름은 최마음이에요. 내가 정하면 사람들이 부르는 것. 자연스러웠어요. 다른 사람들이 그런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놀랬어요. 저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거든요.”


사람은 두 발로 걷는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밥을 먹으면서 식욕을 의심하지 않는다. 똥을 누면서 배설욕을 의심하지 않는다.

“엄청난 권력자들이나 이름을 짓는다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저는 엄청난 권력자일 거에요. 제가 지은 이름들 많이 들어 보셨을 걸요. 음… “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드러난 목덜미가 이쁘다.

“사대강 사업. 어때요. 일부러 뻔한 이름을 골라 지었죠. 속이 뻔히 보이게 사업이라고 했죠. 대강 대강 지을려다 보니 사대강이 되었죠.”


나는 수 년 전 사대강 사업이 처음 언론에 실릴 때를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한반도 대운하라는 위대한 스케일에서 사대강 사업으로 이름을 바꾸다니 믿기 힘들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됐다.


“거주자 우선 주차구역은 어때요.”

그녀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도 안되는 이름이잖아요. 거주자가 무슨 말인지, 주차구역은 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거에요. 거주자라는 말, 그전에 들어 본 적 있어요? 다른데서 써 본 적 있나요. 우선은 또 뭐야. 우선이 없어도 뜻이 통하잖아요. 주민 주차지가 훨씬 간단 명료 하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뜻도 모르고 지은 거죠. 그때 한참 사춘기였나봐. 심각해 보이는게 좋았어요.”


역시. 생각해보니 그렇다. 우선 주차구역이라는게 우습다. 주민 주차지라고 해도 잘 통한다.

“가장 최근 지은 이름은 뭔가요.”


“저는 하루에도 수 백 개 지어요. 일부러 짓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말하다 보면 그렇게 되요. 그러니 말해놓고 내가 지은 건지 까먹어 버려요. 작정하고 짓는 경우가 드물죠. 아. 있다. 지하철 이동 상인이라는 말 들어 봤어요? 제가 지었죠. 그전엔 잡상인이라고 불렀다고 하죠. 잡상인이라 하려니 비하하는 것 같다 그러니 용어를 바꾸겠다. 그런데 그전부터 주욱 행상이라는 말을 쓰고 있었잖아요. 왠지 한번 꼬아주고 싶었죠. 오빠 이름이 최행상이거든요. 오빠 이름도 제가 지었죠. 학창시절 내내 놀림받는 오빠에게 왠지 미안해서, 이동 상인이라는 말 새로 만들었어요.”


미래 지향적이다. 상인들이 쉬지 않고 컨베이어 벨트 위를 지나며 무언가 쓸데 없고 싸구려지만 호기심으로 쳐다볼 수 밖에 없는 그런 상품을 파는 상상이 들었다. 잘 지은 이름이다.


“자. 이제 그쪽 차례에요. 솔직하게 지금 머리 속에 있는 걸 말해봐요.”


후회가 들었다. 차라리 내가 먼저 말할걸. 솔직하게, 오늘 같이 보내요라고 말할려고 했었는데. 그런 소리를 하면 ‘이웃집 강아지’로 내 이름이 바뀔 것 같았다. 기분 나쁘면 ‘발정난 놈’이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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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이번 글은 조금 무섭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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