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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도로서 밑에 말에 답하자면 밑에 글에 댓글에 앙굴라마 이야기가 있죠.
게시물ID : phil_99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카라빠돌이
추천 : 10
조회수 : 674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10/08 20:29:14
뭔가 큰 착각을 하는거 같아요.

살인자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강간범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외환.내환의 죄를 범한이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깨달음은 그런 현실의 무엇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 착각이 나오는것이 깨달음을 "면죄부"라고 생각하는것 같은데요.
깨달음을 얻으면 도덕적 완결성을 받을거란 생각 같습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죄사함을 이룰 수 있다는 그런 생각같네요.

아뇨.
부처되도 살인행위를 한 "인과"를 받습니다.
붓다가 되어도 "현세의 인과"를 벗어나지 못해요. 뭔가 초월적 존재라고 생각하시는겁니까?
물론 그의 인식은 초월적이지만 그의 육신은 현세에 있고 또한 그가 행한 행위에 따라 인과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깨달음은 도덕적 완결성이라던가. 그런게 아닙니다. 뭔가 완전한것. 완전히 이루어지는것. 그런게 아닙니다.
간단하게 하면 "아 그런게 없구나"를 아는게 깨달음입니다.
진실로 마음에서 아는거죠.

가령 석가모니가 생사고뇌와 존재의문을 해결하는 방법을 아주 갈망합니다.
그래서 많은 시도를 하죠.
깨달음은 여기서 뭐냐면 "아. 그런게 없구나"알아챈게 깨달음입니다.
그럼 이런말을 많이하죠.
아니 그러면 도대체 그게 뭐냐고 말이죠. 우리도 다 아는거 아니냐고 말이죠.

아뇨.
우린 거짓말합니다.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거에요. 모르면서 아는척 하는거죠.
사실은 몰라요. 존재의문도 생사고뇌도 모릅니다.
근데 생각하면 괴로우니까. 생각하길 포기하고 자신이 일정도 아는것이라고 생각하던가. 혹은 그것은 삶에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짓이죠. 나도 그렇고 다 이런 거짓말을 스스로에게 합니다.
답을 못 찾으니까요.
그럼 부처는 답을 찾았을까요? 석가모니는 답을 찾았을까요?
아뇨.

부처도 답을 못찾았습니다.
그럼 뭐가 다른가요?
이래서 부처와 중생은 하나다라고 합니다.
근데 아주 많이 다르죠.
도대체 둘이 똑같은 상태에 머무르는데 왜 다를가요?

석가모니가 아주 미친듯이 우주가 멸망하고 생겨나는것 만큼 갈망했습니다.
그렇게 갈망하고 갈망하고 더 갈망하고 죽는것이 사는것보다 쉬운 순간에도 그 갈망때문에 5제자가 자신을 모욕하며 버리고 떠날걸 알면서도
우유죽을 받아먹었습니다. 이것이 석가모니의 갈망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증거입니다.
그렇게 갈망이 어마어마해져서 어느순간에 갈망이 모든것을 돌파하여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모든것을 말이죠.

그 순간에 생각이 끊어집니다.
생각이 끊어지자 석가모니가 봤습니다.
뭘 봤을까요.
이게 우리는 모르고 부처는 아는겁니다.
중생과 부처가 같다고 하면서도 불교에선 부처는 아는자. 우리는 모르는자라고 합니다.
저 존재의문과 생사고뇌를 알게 된게 아닙니다.

부처가 알게된건 "아. 내가 왜 갈구하게 됬는지 알았아. 아 그래서였구나. 그래서였구나. 내가 갈망했던 이유를 지금 알았다"
이게 깨달음입니다.
우린 몰라요.

이것도 우린 거짓말을 하죠. 내가 이걸 하는거야. 자기가 하고 싶은게 있으면 그걸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거라고 말합니다.
근데 그럼 내가 묻겠습니다. "왜 하고 싶은데?"라고요.
여기서 저는 본능이니 갈망이니를 끌어들이는데 이건 "추상적 개념"에 불과합니다. 실제가 아니라 상상을 통해 만들어 낸거에요.
근데 붓다는 여기서 실제를 봅니다.
실제 왜 자기자신이 그를 갈망하게 되는지를 즉시 알았다는겁니다.

이렇게 비유하면 되요.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거나 왜 하고 싶은지 말하는건 물을 글로서 표현한겁니다.
물은 흐르고 물은 유동적이며 물은 형체가 없고 물은 차갑기도 뜨겁기도 하다. 뭐 이렇게 글로 규정한거에요. 추상적으로요.
붓다는 바로 느낀겁니다. "아 차갑다"라고요.

이러니 우린 모르는겁니다. 실제로 물을 만져본적도 본적도 없으면서 물을 규정하는것이니까요.
부처는 아는겁니다. 실제로 물을 만져보니까.

한마디로 사고의 공감각이 극한을 넘어서서 일정단계를 초월했을때에 그 사람은 붓다가 된다는겁니다.
그리고 이걸 이루기 위해선 "어마무시함을 넘어서 우주를 멸망시키고 탄생시킬만큼 강력하다 못해 미친듯한 희구와 열망. 욕망과 집착" 이게 필요합니다.
내가 규정하는 붓다는 말 그대로 미친듯한 사고를 겪어야 이루어지는 자에요.
머리속에서 현실에서 겪은 경험과 같은 수준에 사고 공감각을 활성화 되는겁니다. 그게 명상이죠.
그렇게 되어 오래간 수행하면 실제 "뉴런회로와 시냅스"가 변화한다는겁니다.

실제적인 뇌가 변한게 붓다라고요.
그래서 석가모니에게 7년수행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이걸 뭐라고 말하느냐면 차라리 죽는게 편안한 극한의 괴로움이라고 말합니다.
왜냐면 실제로 뉴런시냅스가 변화할만큼 미친듯이 갈구해야 하고 그런 상황에서 뉴런시냅스가 변화하는것 자체가 엄청난 괴로움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죠. 죽는건 봄 산들바람에 불과할 정도에 괴로움을 머리속에서 겪어야 됩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는게 아니라 머리속에서 실제로 삶을 사는것마냥. 죽고 다시 살고 하는것처럼 말이죠.

윤회라는게 실제론 공감각이 활성화된 자가 극한의 사고속에서 자신의 생각이 생겼다 부셔짐을 수 없이 반복하는 행위입니다.
못버티죠. 우린 절대로 못버팁니다. 우리가 스스로 그걸 못버티는걸 알기에 존재의문과 생사고뇌를 덮어놓는거에요. 본능적으로 아는거죠. 못버티는걸.
그렇기에 붓다가 출가할때에 굉장히 순수해야 합니다. 즉 순수하여 진짜로 자신이 존재의문을 찾을거란 정말로 우주를 초월하는 멍청함이 없으면 절대로 안합니다. 절대로요. 이걸 원시불교에서 순수한 마음이라고 하고 대승불교에선 불성이라고 합니다.
이게 안되면 안해요. 누구도 존재의문을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법을 처음에 접하면 "참 멍청하네"라고 속으로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저런걸 가지고 왜 왕국을 버리고 나갔을까. 이런 생각이요.
그것이 순수함입니다. 초월할 수준에 순수함이죠. 이게 없으면 미쳐도 존재의문과 생사고뇌를 공감각에 의해 실제 현실에 비견될만한 사고를 할리가 없죠.


그럼 부처는 뭐냐.
"모든 인과를 보는자"라고 합니다.
이 세상에 어떤 종교지도자도 부처처럼 인과를 볼 수 없습니다. 완전한 실상의 인과를 보죠.
제가 조카에게 재미로 이야기할때 부처는 이런것이라고 합니다.
"알았심. 내가 왜 이러는지. 너가 왜 그러는지 다 알았심." 부처의 육신과 과거행위들은 인과에 묶이지만 부처가 된 이후에 부처는 자신에 의해 인과에 묶이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우리가 그렇게도 열망하는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자. 환경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자"가 됩니다.
즉 우리가 그리고 갈망하던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자"가 된다는거에요.

근데 그 자기마음대로 행하는자란것을 갈망하는 우리는 환경에 빌어처먹게 영향을 무지막지하게 받습니다.
왜냐하면 환경에 영향받는자만이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그걸 갈망하거든요.
부처는 실제로 환경에 영향을 받지를 않아서 그런 갈망조차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벽지불과 부처가 나뉘는데 벽지불은 깨닫고 사람들을 구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 아니까요. 전해줄 수 없다는것. 알아듣지 못한다는것을 아니 그대로 해탈속에서 살다가 죽습니다.
부처는 다른데요.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바로 대비에요. 큰 슬픔.
중생의 모습을 보고 크게 슬프지 않는자는 절대로 전해 줄 수 없고 스스로 얻어야된다는것을 알기에 상대에 인과를 조율해줄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처는 뭐랄까요. 소귀에 경을 읽는다고 해야겠죠.
전해줄 수 없는데 어떻게 하면 전할 수 없을까. 그러면서 자신이 살아있을때엔 상대방의 인과를 조율하게 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의 교조들이나 비슷한데 부처도 죽으면 사람들이 괴로워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혼자선 인과를 조율못하거든요. 모르니까요. 자기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모르고 남이 왜 그리 행동하는지도 모르니까.


그러니 깨달음=부처가 아닙니다.
깨달음이 곧 부처가 아니에요. 깨달음+큰슬픔=부처죠.
깨달음은 뭔 도덕적이거나 혹은 성스럽거나 그런거 아니에요. 인지가 끊겨서 인지에서 벗어나 인지를 조율하는 단계가 깨달음입니다.
이거랑 왜 도덕과 성스러움과 완전성을 결부시킵니까. 그런게 아닌데요.

깨달음은 무색무취하게 아무런 가치판단이 존재할 수 없는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은하중심에 거대블랙홀이나 매일 뜨는 태앙이나 저기 옆에 있는 소나무같은겁니다.
깨달음은 중력같은거에요. 중력에게 "참 중력이 있어서 고맙다" 혹은 "중력이 있어서 성스럽다"이럽니까?
중력은 법칙일 뿐이에요.

깨달음도 그저 위에 일년의 과정을 거치면 도달하게 되는 단계라고 보면 됩니다.
그건 마치 아이가 크면 어른된다 같은거랑 똑같애요. 가치판단이 들어갈수가 없어요.
깨달음에 어떠한 감정도 어떠한 판단도 어떠한 느낌도 받아선 안됩니다. 그럼 불교를 시작부터 잘못안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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