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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선사들도 마흔넘어서 출가하면 깨닫기 조금 어렵다고 했습니다.
게시물ID : phil_993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카라빠돌이
추천 : 2
조회수 : 69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10/08 21:52:47
깨달음은 뇌의 회로배열변화이기 때문에 실제 육신영향도 받습니다.
40살 이후엔 뉴런자체도 줄기 시작하고 이건 마치 이미 키가 훌쩍커버린 나무를 옆으로 누워 자라게 만들겠단것과 비슷합니다.
결국 부처 데려다가 전전두엽 절제술을 해버리면 부처도 영향을 받는다는 겁니다.

깨달음은 무적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숙명도 아니고 우연도 아닙니다.

그저 현실에 나무심으면 날씨 영향받고 품종에 영향받아서 어떠한 모양으로 크는것과 같이 깨달음도 같습니다.
현실제약을 받는단 말이죠.

말 그대로 공감각이 뇌 전체를 아우르는것이죠.
그림과 수리영역 이렇게 두가지만 엮이는게 아니라 뇌의 모든 부분이 하나로 엮여서 공감각틀에 박힌다는겁니다.
이게 그냥 부처에요.
간단하게 뇌 회로배열이 바뀐 사람으로 보면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고 공감각이 현실수준에 올라서도 1년만에 깨닫지 못하는겁니다.
석가모니도 7년 걸렸어요. 절대적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단겁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듯이 말이에요.

깨달음을 신비롭거나 놀라운것으로 보면 안되요.
무슨 깨달음의 순간이라고 생각해서 그 순간에만 깨닫는것이 일어난다는것도 착각입니다.
이건 마치 영어 철자도 모르는 사람이 영어시험장 가서 만점받는다는 환상이랑 똑같아요.
천국의 구원이나 지옥의 업화도 아닙니다.
죄를 사해준다고 갑자기 죄가 사라지고 영적인 경험을 한 순간에 갑자기 사람이 변하는 그런게 아니란거에요.

게임 레벨업하고 똑같아요.
깨달음은 순간으로 보는것은 경험치 99.999%까지 올린 노력을 무시하는 처사이죠.
건물로 말하자면 건물 개장하기전엔 건물이 없었단 말과 다를게 없습니다.
조카한테 말하는걸론  "졸라 개 노가다"

이게 깨달음입니다. 아주 미친듯한 노가다요.
이러니 예수도 부처고 마하비라도 부처고 최제우도 부처고 모든 사람이 다 부처라는 말이 나오는겁니다.
이건 내가봐도 불교에 빠진이가 얼마나 무서워 보이는지 모르는 부분이에요.

사실 달라요.
예수랑 부처랑 마하비라랑 다릅니다.
예수는 구원하고 싶어서 모든 오욕을 절제하며 구원하다 죽임당했고
마하비라는 지성의 완전성을 위해서 그를 더 추구하여 완전성에 다가가다 죽게되었고
부처는 알고 싶어서 더 매진하다 모든힘을 잃고 앎을 얻고 살다 죽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같습니까.
다르지.
근데 부처계열에 사람들은 아주 무서운 특징이 황소개구리도 아니고 다 잡아먹어요.
말 그대로 다 포용한다는 겁니다. 뭔가 신생종교가 강하게 일어나면 불교종사자들 중엔 "어. 개도 부처임"이 나와요.
다 부처에요. 부처가 아닌게 없어요.
똥도 부처에요.

왜 그럴까요.
왜 불교에선 가장 존귀한 부처님과 똥을 같은거라고 말할까요.
사람들이 이게 불교도가 착해서 그런줄 안단 말이죠.
위에 말했듯이 깨달음은 일련의 자연적 과정에 불과합니다. 중력법칙을 발견하기전에 중력법칙이 없었습니까?
몰랐을뿐이지. 중력법칙은 당연히 있었고 중력법칙도 더 근원적 법칙에 일부분이며 불완전한 해석에 불과할뿐이죠.

그러니 나에겐 불법을 멸하겠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없에겠다는 말이 어처구니 없을 지경이죠.
왜 석가모니가 갈망했다고 봅니까.
바로 지성+생존의 만남이에요. 왜 인간이 존재의문을 품는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바로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기 때문이죠. 짐승은 못해요. 다른 개체나 동족의 죽음은 인지해도 자신의 끝은 모릅니다.
강력한 생존력으로 살아갈뿐 지성이 자신의 죽음까지 도달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알죠. 자기 자신이 죽을것을. 그래서 생존이 삶을 추구한게 바로 존재의문입니다.
생존이 지성을 만났을때에 살아남는 탈출구를 추구하기 시작하여 만들어진게 존재의문이에요.
그러니 얼마나 어처구니 없습니까?

불교를 없에겠단 말을 들으면 전 이런 말을 합니다.
"인류를 멸망시켜라"라고요.
지성과 생존을 동시에 품은 인간중에 몇개체가 석가.예수.마하비라처럼 추구하게 됩니다. 왜냐 생존이 그렇게 하라고 시키니까요.
지성이 그걸에 의문을 품으니까요. 그러나 생존에도 타협하지 못하고 지성에도 타협하지 못하는 자가 나옵니다.
마하비라는 생존에 타협하지 않았고 지성에 부합하길 원했습니다.

대다수 종교지도자가 저런것에서 두가지중에 자신이 마음에 드는 부분을 합쳐서 세상에 내놓습니다.
그러나 아주 소수가 거기에 만족을 못하죠.
지성도 만족하지 못하고 생존도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것. 그 모든것에 답을 줄 수 있는것"을 갈구 할때에
바로 부처가 나옵니다.


불법을 멸하는 방법은 간단하죠.
인간의 지성을 원숭이 수준으로 퇴화시키던가.
인간을 전부 전멸을 시켜버리던가.

생존을 빼고 지성만 남기는것은 두번째 인간 전멸과 같습니다. 설령 지성을 컴퓨터에 옴겨도 컴퓨터는 스스로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보수를 해야 할테고 생존이란 향상성을 유지하고자 하는것이니 향상성을 유지 못하는것은 살아있는게 아닙니다. 이미 죽은것이죠.
 
그래서 종교를 없에겠다는 말도 어처구니 없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종교가 마음에 안들 순 있겠죠. 왜냐하면 생존과 지성중에 교조가 취사선택을 했으니까요.
자신이 생존중에 남기고 싶은부분과 지성중에 남기고 싶은 부분이 안 맞으면 싫을순있습니다.
근데 멸은 못해요. 왜냐하면 어떤 종교가 싫다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자기자신이 그 종교의 교조처럼 생존과 지성중에 무엇들을 취사선택했단 뜻이니까
거기서 부처는 뭘하겠습니까. 각 종교에 교조들 사이에서 부처가 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너는 이러 이러해서 요런 부분을 취사선택했구나. 그건 여기선 강점이 되고 여런대선 약점이 될거다" 이렇게 카운슬링 해주겠죠.
부처는 아는자고 보는자고 조율하는자입니다.
그것만 할줄 알아요. 다른건 할줄도 모르고 할수도 없고 힘도 없어요.

그래서 힘을 잃었다고 하는거에요.
예수는 구원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마하비라는 모든것을 분쇄하는 지성의 끝을 보여줍니다.
부처는 "이거 해서 세상을 바꾸자" 이런걸 하지 못하게 되어버렸어요.

말 그대로 알기 위해서 추구하다보니 모든 부분이 떨어져 나가버린겁니다. 자기자신도 모르게 말이죠.
앎을 얻고 나머지 전부를 잃어버린거죠.
대신에 각 종교에 교조들도 왜 자신이 그걸 추구했는지는 완전히 알진 못합니다. 어느 수준까진 알아도 말이죠.
그래서 부처가 알려주는 역활이에요.

해서 불교는 가장 매력이 없습니다. 사실 불교는 종교집단이나 지성집단이나 이익집단도 아니고
실제로 임시모임 같은거에요. 붓다 배출하려는 임시모임회요. 정기적인게 아닌겁니다. 근원적으로 말이죠.
그래서 인도에서 불교가 망한거에요.

불교는 매력이 하나도 없거든요. 힘이 없고 신자에게도 힘을 주지못하고 지고의 위치에 도달해도 힘이 생겨나지 않는것인데
왜 믿겠습니까.
불교는 갈구하는자들만 모여요. 뭘 갈구하냐면 절대적인 답을 환경에 휩쓸리지 않는 절대적 자신을 무엇이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신의 힘을
갈구하는자들만이 불교에 모여서 석가.석가하면서 수행하는것이죠.
왜냐하면 해탈하지 못한자에게 있어서 해탈한자는 절대적 답을 얻어 환경에 휩쓸리지 않고 신의 힘을 행사하는자처럼 보이거든요.
다른 그 어떤 종교보다 더 화려하게 보이기 때문이죠.

그건 마치 이거랑 똑같아요.
누군가 자신의 음식비법을 알려준다고 하면 사람들은 좋다고 하겠죠.
근데 의심이 많고 더 좋은 음식비법을 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죠. 그래서 그 사람들이 비법을 알려줘요. 근데 만족을 못합니다. 의심과 탐욕이 많으니까.

근데 어느날 불교식당을 갔어요. 불교식당에 가서 "여기에 비법이 뭡니까?"라고 묻죠.
그러자 석가모니가 답해요
"없어. 그런거"
그럼 의심과 탐욕이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감추는구나. 나한테 감추는구나. 뭔가 있구나. 뭔가 모든 음식점을 압도하는 위대한 비법을 알고 있구나!"이렇게 생각하죠.
보통 사람은 없다고 그러면 없나보다 하고 떠나는데 갈구하여 미친 사람들은 없다고 하면 더 안달나서 달라붙습니다.
불교에 빠진 사람들은 대다수 이래요.

석가모니의 낚시대에는 걸리는 고기만 걸립니다.
특별히 걸리는 종자들이있죠. 낚시바늘이 그 종자만 물수가 있거든요. 나머진 못 물죠. 매력적이지도 않고 말이죠.
평범한 사람에겐 불교식당은 허름하고 간판도 쓰러져가고 맛도 없고 서비스도 개판인 곳이죠.
요런 종자들이 모여있으니 부처=똥이란 이야기도 나오는겁니다.
각 종교와 철학과 집단에서 포용하지 못하는 인간들만 불교식당으로 오니까요.

아주 특이한 인간은 다 오는겁니다.

생각해보니 재밌네요.
각 군대에서 포용하지 못한 인간들이 모든것을 포용하려고 한단 말이죠.
어찌보면 은혜이기도 하고 복수이기도 하고 세계관의 통합이기도 하겠죠.
타인에 대한 배척과 불만족을 포용과 만족으로 돌려주는것이라면 은혜고
상대보다 상위에 이르러서 자신을 포용하지 못한것 자체를 감싸 먹으려는것이면 복수이고
자신이 경험해본 세계와 현재의 얻은것을 맞추기 위해서라면 세계관이 통합이기도 합니다.

근데 확실한건 불교가 아주 도움이 된다는거죠.
뭐냐면 불교가 있으면 각 교단에 이단과 분파가 일어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런 특별한 인간들은 거기서 나와서 불교로 오니까요. 마치 사리자와 목건련이 수행자들 몇백명을 대리고 석가모니밑으로 합류했듯이말이죠
불교는 어찌된게 다 다르면서 서로 분규되었다고 말하진 않는단 말이죠.

재미있는거에요. 조계종 수행자와 위빠사나 수행자가 서로 다름이 여호와의 증인과 천주교의 차이보다 더 심하면서 같다고 말하니까요.
같은 뜻을 이어간다고 생각하니까요. 서로 동료라고 말이죠.
이러니 각 종교에 교조들은 석가모니에게 감사해야되요
석가모니 없었어봐요. 그 특이한 인간들이 전부 종교를 분파시켜서 천주교에서 개신교 나오는건 애교 수준에 일이 벌어졌겄죠.
지금의 종교가 3배는 많아졌을거 같고 말이죠.

우리나라에 이단이 많은 이유도 이거 같아요. 불교식에서 저런 특이한 행동을 가져가면서 기독교에서 수 없는 교조들이 나오기 시작한거죠
마치 선종에서 임제종.조동종처럼 말이에요. 그럴거면 불교로 오지 말이죠.
사실 저들은 "갈구"하지 못한거에요. 진실로 갈구하게된자는 만족할 수 없는데 말이죠. 자기자신에 대해서 만족을 못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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