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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번째단편] 버스
게시물ID : panic_892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못된야옹
추천 : 11
조회수 : 87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7/15 12: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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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된야옹의 아홉번째 단편 

<버스>
 

 

    
 
 

1.
‘쏴아아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인지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다. 창밖을 바라보던 민성은 떨떠름한 얼굴로 교실을 빠져나왔다.
 

‘촤악!’
 

무지개색의 알록달록한 장우산을 힘껏 펼치곤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는 민성의 바지는 어느 샌가 밑 부분이 전부 젖어버렸다. 워낙 빗줄기가 굵고 강해 우산 안으로 들이치는 빗물의 양이 많은 탓이다.
 

“독서실 가긴 글렀네. 찝찝해서 원….”
 

혼자 중얼거리며 그렇게 막 교문을 빠져나가는 민성은 불현듯 가뜩이나 좁은 우산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 녀석의 얼굴을 보곤 안 그래도 어두운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같은 반 친구인 진성이었다.
 

“우산 잃어버렸지 뭐냐, 네 덕에 살았다. 정류장까지만 씌워줘.”
“너도 독서실 안가냐?”
“찝찝해서 그냥 집에 가서 씻고 좀 쉬려고.”
“너무 긴장감이 없는데? 그러다 나한테 다시 모의고사 성적 영원히 밀린다?”
“걱정 마.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어차피 너도 집에 가는 거잖아. 그럼 형님도 페어플레이 해야지”
“미친. 자신감 쩐~다.”
 

민성은 장난스럽게 대꾸했지만 그의 속마음은 결코 장난스럽지 않았다. 진성의 실력을 알고 있던 민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지난 번 모의고사에서 굳건히 지켜왔던 전교 2등의 자리를 녀석에게 내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장 전교 1등을 꿰차도 모자랄 판에 저런 녀석까지 신경 써야 하다니.’
 

떨어지는 빗줄기를 음악 삼아 그렇게 영혼 없는 대화를 주고받던 둘은 어느덧 버스정류장 앞에 도착했다. 때마침 저만치 444번 버스가 빗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버스가 정차했고, 앞문이 열리기 무섭게 민성과 진성은 버스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민성은 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안을 쓱 훑어보고는 저 끝에 유일하게 비어있는 창가 쪽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헌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분명히 비어있던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성이 자리에 제법 가까워졌을 땐 어떤 여자가 앉아있었다. 분명 자리까지 걸어오는 내내 다른 곳에 시선한번 준적이 없던 민성이었기에 더욱 황당한 순간이었다. 긴 머리가 얼굴을 전부 덮고 있어서 제대로 확인할 순 없었지만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는 틀림없는 여자였다. 이 짧은 시간에 대체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무엇보다 하루 종일 억수같이 비가 내렸던 날임에도 물기 하나 없는 여성의 뽀송뽀송한 흰 원피스가 너무도 이질적이었다. 심지어 우산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왠지 모르게 민성은 이 여자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야! 멍하니 뭐해? 안 앉아? 네가 나 배려해주는 건 아닐 테고.”
 

뒤에서 어깨를 툭 치며 진성이 등장했다.
 

“어? 아, 아냐 아무것도.”
“싱겁긴. 그럼, 내가 앉는다.”
“뭐?”
 

진성은 씩 미소 짓고는 민성을 지나쳐 걸어갔다. 설마…? 황급히 고개를 돌린 민성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낯선 여자가 앉아있었건만 지금은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다.
 

“너 아까부터 왜 그래? 무슨 걱정 있냐?”
 

진성은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앉아서 민성의 얼굴 앞에 손을 휘휘 젓고 있었다.
“…진성아, 거기 누구 앉아있지 않았어?”
“뭔 소리야? 앉아있긴 누가 앉아있어. 너 오늘 좀 이상한데?”
“아, 아니다. 내가 잘못 봤나봐.”
“보약이라도 챙겨 먹어라. 그래가지고 공부가 되겠냐? 이거 내일 모의고사도 또 내가 이기겠네? 킥킥킥.”
 

어쩜 말을 해도 저따위로 싸가지 없이 하는 건지, 민성은 진심으로 진성의 뇌구조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 지금 귀신이든 아니든 그까짓 게 대수야?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지난번의 수모를 갚고 말겠어!’
 

민성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를 애써 차갑게 식히며 살짝 웃었다. 진성은 많이 피곤했던 모양인지 어느 샌가 이미 잠들어있었다. 민성은 문득 오늘이야말로 확실한 기회가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자의 대한 생각은 이미 날아간 지 오래였다. 민성은 다음 정류장에 버스가 정차했을 때 조심스럽게 버스에서 내렸다. 집까지는 7정거장이 더 남아있었지만 지금 민성에겐 집에 돌아가 찝찝한 몸을 씻어내고 쉬는 것보다 독서실로 돌아가 공부에 매진하는 편이 훨씬 실속 있는 선택이었다.
 

“그래. 어디 이번 모의고사 성적 나와 보고도 나한테 그렇게 입을 놀릴 수 있는 지 두고 보자 박진성!”
 

민성은 이를 악물고 빗길을 달려 나갔다. 흰 원피스를 입은 여성은 진성의 어깨에 매달린 채, 깔깔 웃으며 점점 멀어져가는 민성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2.
시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고, 조용하게 가라앉은 교실은 볼펜 굴리는 소리와 간간히 종잇장 넘기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평소와는 다른 엄숙한 분위기다. 민성 역시 시험지만을 뚫어지게 훑으며 펜을 굴리고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하다.
 

시험이 끝나자 어김없이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의 목소리로 교실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시험이 끝났다는 해방감에 젖어 귀가를 앞둔 종례를 기다리는 들 뜬 시간. 민성은 여전히 얼굴이 어둡다.
 

‘이렇게 이기는 걸 원한 게 아니라고.’
 

민성은 책상을 강하게 주먹으로 쳤다. 그럼에도 그의 분한 마음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저만치 비어있는 진성의 자리로 시선을 던진다. 지난번 진성에게 전교 2등의 자리를 빼앗긴 수모를 갚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던가? 게다가 어제는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치졸하게 녀석이 잠든 틈을 타 혼자만 다시 독서실로 돌아가 밤까지 새질 않았던가? 그런데 녀석의 결석으로 이렇게 허탈하게 이기게 될 줄이야. 민성은 이겨놓고도 오히려 진성에게 진 것 같은 수치심과 모멸감에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망할! 망할!!’
 

속으로 욕지거리를 남발하며 씩씩거리고 있는 민성을 뒤로하고, 교실 앞문이 스르륵 부드럽게 열렸다. 이내 민성 못지않은 어두운 얼굴의 담임교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 자! 조용. 너희들에게 알릴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담임교사가 교탁을 탁탁 치며 입을 열었다.
 

“일단 좋은 소식은, 시험 보느라 수고들 했다. 이번 주말은 자율학습 일정이 없으니 혹시라도 학교 나올 생각하지 말고, 개교기념일인 월요일까지 푹 쉬도록.”
“쌤! 정말요?”
“이얏호~!”
“아나, 난 학교 나와서 공부하고 싶었는데….”
 

담임교사의 말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오늘 역시 전교 꼴등 이기준의 되도 않는 개 드립이 이어졌다.
 

“그럼 기준이 너는 나와서 선생님이랑 같이 공부할까? 네 성적이면 선생님한테 특별지도 받는 것도 나쁘진 않아. 어때?”
“아, 생각해보니 가족모임이 있네요. 잊고 있었네. 아하하하. 하하….”
“자자! 조용. 이제 나쁜 소식이다. 원래 아침에 말해주려고 했는데, 시험을 앞둔 시점에 이런 소식을 전하는 것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담임교사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덩달아 교실안의 분위기도 낮게 내리깔렸다. 꼴통 이기준조차도 개 드립 시전을 뒤로하고 담임교사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민성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담임교사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공포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창가 쪽 자리에 앉은 전교 1등 ‘극현’은 묘한 눈으로 그런 민성을 응시했다. 이윽고 굳게 닫혔던 담임교사의 입이 열렸고,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얼음물을 끼얹은 듯 교실 안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진성이가 죽었다.”
 

 

 

3.
민성은 학교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불과 어제까지 그렇게 내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녀석의 갑작스런 죽음. 허탈감으로 인한 분노로 가득 찼던 그의 마음에 이젠 속절없는 안타까움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좋아하던, 싫어하던, 증오하던, 가깝던, 멀던 간에 인간의 죽음이란 것은 이렇듯 언제나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것도 자신이 아는 얼굴이라면 더욱이. 설마 못마땅한 진성 때문에 자신이 눈물을 흘리는 날이 올 거라 예상이나 했을까? 민성은 버스 정류장 앞에 앉아 멍하니 차들만을 바라보며 감성에 젖어있었다. 그렇게 집으로 가는 방향의 버스를 그냥 보내버리기를 수차례. 어느덧 어둑어둑해진 하늘 위에는 태양대신 초라한 달이 걸려있었다.
 

‘위이잉.’
 

문득 허벅지가 부르르 떨리는 느낌에 민성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어 휴대폰을 끄집어냈다.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어.”
“아들. 오늘 모의고사는 잘 봤어?”
“글쎄….”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시험 망쳤어? 무슨 일이야?”
“아냐, 아무것도.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 했어?”
“오늘 우리 아들이 왜 이렇게 저기압일까? 그건 아니고. 여기 비가 너무 내려서, 엄마랑 아빠 아무래도 내일 아침에나 도착할 것 같아. 기다리지 말고 그냥 자라고.”
“알았어.”
“냉장고에 반찬 있고 밥솥에 밥 있으니까 알아서 차려먹고. 알았지? 그럼 아침에 봐 아들!”
 

민성은 휴대폰을 도로 주머니에 찔러 넣고 작게 중얼거렸다.
 

“나 참, 내가 앤가….”
 

그리고 보니 어느덧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민성은 애써 진성의 죽음으로 씁쓸해진 감정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우산도 안 가져왔는데 이대로 더 앉아있다간 쫄딱 비에 젖을 판이었다. 때마침 저만치 늘 타던 444번 버스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일단은 집에 돌아가 눕고 싶다고 생각하는 민성이었다.
 

 

 

4.
손목시계는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류장에서 너무 오랜 시간동안 넋을 놓고 앉아있었던 모양이다. 민성은 익숙하게 교통카드가 들어있는 지갑을 리더기에 갖다 대고는 버스에 올라탔다.
 

‘어디보자….’
 

민성은 저만치 맨 뒷좌석에 자리가 하나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문득 전날 진성과 함께 버스에 올라탔던 순간이 떠올랐다. 분명 어제도 자리 하나가 비어있었지…. 혼자 중얼거리며 민성은 가방을 앞으로 둘러매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버스 문이 닫히며, 버스 특유의 거친 엔진소리가 내부에 울려 퍼졌다. 웬일인지 안정감 하나 없는 덜컹거리는 좌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성은 점차 속력이 빨라지는 버스 안에서 몹시 졸음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무래도 머리가 복잡하고 생각이 많았던 하루였던 탓에 제법 지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민성은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으며 차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신의 맞은편 옆자리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왠지 낯이 익은 여성의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밖에 무슨 재밌는 거라도 있나?’
 

몹시 졸음이 쏟아지던 와중에도 민성은 차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속으로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런 민성의 속도 모르고 여전히 여성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어쩐지 그 모습에 기분이 나빠진 민성은 질끈 눈을 감았다. 이내 차가운 바람이 들이치며 민성의 머리칼을 기분 좋게 어루만졌다.
 

‘가만, 근데 저 자리에서 차창을 보고 있으면 뒤통수가 보여야 되는 거 아닌가? 아, 내 쪽 차창으로 고개를 돌린 건가? 뭔가 기분 나쁘네….’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민성은 투덜거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역시나 그 여자는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성은 더욱 기분이 나빠져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민성의 얼굴에 제법 강해진 빗줄기가 바람과 함께 들이쳤다. 아무래도 창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한 민성은 짜증스럽게 눈을 뜨고는 차창으로 손을 가져갔다. 순간 민성은 온 몸이 굳어져 버렸다.
 

‘차창이 열려 있는데 어째서 여자가 비치는 거야?!’
 

여전히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민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5.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아침 조회가 시작되자 학생들은 일사분란하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담임교사의 얼굴을 바라본다. 하지만 어째선지 담임교사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다. 그는 저만치 두 개의 빈 책상. 정확히 말하면 국화꽃이 놓여있는 빈 책상으로 시선을 던지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연달아 이렇게 안타까운 소식을 알리게 되어 선생님은 가슴이 아프다. 진성에 이어 민성이까지….나쁜 자식들….”
 

그는 말을 채 다 잇지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평소 아끼던 제자들이었기에 찢어지는 고통은 더욱 컸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었으며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었는지 황급히 교실을 빠져나갔다. 삽시간에 숙연해진 교실. 저마다 떨떠름한 얼굴로 넋이 나간 듯 멍 해 있는 와중에 유독 전교1등 ‘극현’만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이를 악물고 간신히 참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 정도로는 안 되겠다 판단한 모양인지 끝내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빠르게 교실을 빠져나가는 극현. 아이들은 그런 극현을 바라보며 저마다 한마디씩 안쓰럽다는 듯 위로의 말을 던졌다.
 

“진성이랑 민성이 그렇게 싫어하더니, 아니었나보네.”
“그러게. 극현이 저렇게 우는 거 처음 본다. 이따가 위로 좀 해줘야겠네.”
“그러자. 가뜩이나 쌤도 저런 마당에 반장인 극현이라도 멀쩡해야지.”
 

학교 옥상에 올라온 극현은 키득거리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 5초간의 짧다면 짧고 길 다면 긴 통화 연결 음이 수그러들며 수화기 너머로 누군가의 음침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지?”
“킥킥. 정말 일처리 하나는 끝내주는데? 덕분에 이제 더 이상 성적가지고 고민할 필요는 없겠어.”
“일이 잘 풀렸다니 다행이군.”
“잔금은 방금 입금 됐을 거야. 확인해 보라고.”
“확인했다.”
“그럼 일도 해결됐겠다, 이걸로 계약 해지할게. 이제 더 이상 얽히지 말자고!”
“그래? 알았다.”
 

더 무슨 말을 할 틈도 없이 끊어진 전화를 보며 극현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극현은 바닥에 드러눕고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옥죄었던 족쇄가 풀린 기분이랄까? 자신의 근본적인 스트레스의 원흉인 민성과 진성이 사라졌다는 것에 극현은 정말, 미친 사람처럼 실성한 듯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6.
모의고사가 내일 앞으로 훌쩍 다가왔고, 극현은 그 어느 시험 때보다 나태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유일한 자신의 경쟁 상대였던 민성과 진성이 사라진 뒤로는 늘 이런 식인 극현이었다. 그나마 요즘 준수가 좀 치고 올라오는 것 같기는 하나 극현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민성과 진성 때문에 숨 막히는 부담감으로 시달리던 때와 비교하면 새 발의 피다. 신경 쓸 필요성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덕분에 그는 요즘 공부보다는 취미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럼 내일봐. 아, 시험 잘보고!”
“시험 그까짓 거 뭐 별거 있나요? 하하.”
“너 볼수록 은근 재수 없네….”
“…….”
 

큰맘 먹고 시작한 복싱은 생각보다 체질에 맞는 운동이었다. 힘든 만큼 재미있는 것이 공부와는 살짝 다른 성취감이 느껴졌으며, 무엇보다 이름난 명문체육관이라 관장님의 세세한 지도는 말할 것도 없었고 여자 관원들이 많았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드는 극현이었다.
 

“은근 재수 없다고? 우리 학교 선배만 아니면, 아주 그냥! 이렇게… 잽! 원투!! 저렇게… 잽잽! 슉! 슈슉!”
 

입으로 소리를 내며 어설픈 몸놀림을 선보이는 극현, 몇몇 사람들은 그를 모기 보듯 쳐다보며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덧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극현은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고는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시간은 오후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어둠이 내리깔린 한산한 거리를 음미하며 오늘 배운 동작을 다시금 되 뇌이고 있을 때 저만치 익숙한 404번 버스가 들어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극현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져 움직일 수 없었다.
 

버스 안에는 죽은 진성과 민성이 일그러져버린 기괴한 얼굴로 차창에 바짝 달라붙은 채, 그를 향해 빠른 속도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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