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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이클 윈터바텀의 영화를 좋아했다. 그 중에서도 나인송즈를좋아했다. 꽤 아름다운 영화였는데, 난 그 영화에 삽입된마이클 나이먼의 피아노곡이 마음에 들었다. Debbie라는 연주곡이었다. 그 음악이 흘러나온 씬은 꽤나 아름답고 따뜻하며 또한 충만함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상당히 인상 깊게 봤고 그 후에도 가끔 그 노래를 듣곤 했다.나이먼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피아노의 건반소리는 한적한 강가에서 느리게 흐르는 강물의움직임을 연상케 한다. 파문을 일으키는 잔물결들이 누워있는 나의 몸을 조금씩 그리고 꾸준하게 흘러가며따뜻하게 감싼다. 깨끗한 물이 쉴 새 없이 나의 몸의 얼룩들을 씻어 내린다. 물 속에서는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고요하다. 늦은 오후의 햇빛이 수면 위에서 파편이 되어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으로 부서진다. 눈을 감는다. 피아노 소리는 언제나 나에게 물을 연상시킨다. 때로는 얕은 개천을 연상케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주 깊은, 그래서위를 올려다보아도 한줄기 빛도 보이지 않는 바닷속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그것이 돌멩이 사이로 부서지는경쾌하고 얕은 흐름이든 묵직하게 출렁거리며 해류를 만드는 깊은 흐름이든 각자 자신 고유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에너지의 흐름이다. 피아노는 그 자체로 완전하다. 나는 피아노소리를 들으면 항상 한 소녀를 생각한다.
나는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거나 책을 읽거나 혹은 둘 다를 동시에 할 때 가끔 나이먼의 음악을 듣곤 했다. 그날 저녁도 나는 침대에 반쯤 누워 술을 마시며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Debbie의 멜로디가-조심스럽게, 하지만 분명한 흐름으로-흘러나왔다. 알코올이 텅 빈 뱃속을 천천히 덥혀줬다. 나는 술이 올라 조금 몽롱한상태가 되었다. 머릿속에서 알코올의 흐름이 피아노의 흐름과 맞물려 그 기운이 나를 감싸는 듯해 기분이좋았다. 음악이 끝났다. 다시 듣고 싶었다. 책을 덮고 일어나려다가 그냥 다음 곡이 재생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노트북이놓여있는 책상 위에서 핸드폰의 진동소리가 울렸다. 몸을 일으켜 전화를 확인했다. 수지였다. 오랜만이었다. 그녀와가끔 안부를 한두 마디 주고받곤 했지만 –항상 그녀에게 안부대신 지금도 피아노를 치냐고 물어보곤 했다.-전화를 걸어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몇 달 전에 한번 전화가온 적이 있었다. 새벽이었다. 나는 자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의기소침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울먹였던 것 같고 -그저 나에게 그 목소리가 우울하게 들렸을 수도 있다.- 내 잠을깨운 것에 대해 사과했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나서 정신을 차리려고 해봤다. 잠에서 깨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나서 그녀를 위로했다. 수지는 다시 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겠지만, 나는잠시 잠에서 깬 것뿐이니까. 괜찮아.")
수지는 인사 대신 대뜸나에게 재워달라고 부탁했다. (어째선지 내가 서울에서 자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 나는 조금 의아했지만 섣불리 묻지 않기로 하고 일단 승낙했다. 6호선의한 지하철 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옷을 갈아입고, 후드티를걸쳤다. 턱과 목의 중간쯤에 향수를 뿌렸다. 폴 스미스였다. 평소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는 탓에 서둘러 집을 나왔다. 시간이늦어 밤이 되어있었다. 날씨는 꽤 쌀쌀했다. 하늘은 흐릿하고공기가 조금 습했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에서 빠져 나오는 길에 낡은 전신주가 있었다. 그 밑에 때가 탄 곰 인형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었다. 처음에는새하얗고 보드라운 인형이었을 것이다. 난 그걸 들어서 털고 전신주에 가지런히 앉혀놨다. 골목에서 큰길로 걸어 나왔다.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면서 수지에대해 생각했다. 나는 열 일곱 살 여름에 그녀를 처음 알았다. 그녀는내 첫사랑이었다. 만일 그것이 사랑이었다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