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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3대 청백리 중 한 분인 박수량의 백비
게시물ID : history_183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즈
추천 : 1
조회수 : 176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10/10 20:50:17
조선시대에는 총 217명의 청백리가 있다고 하는데 감사원 선정 3대 청백리로는 황희 맹사성 박수량이다.
朴守良은 조선 11대 明宗 때의 문신으로                                                                                   
조정에 출사한지 38년이 돼도 변변한 집 한칸 제대로 갖지못했다.
그는 嫡庶를 가리지 않는 인재등용을 외치는 등 直言을 서슴지 않았고 부정척결엔
예외가 없었다. 평소 박수량이 지나칠 정도로 淸白하다는 것은 朝野가 다 아는 사실이건만 士禍로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재산을 탐한다는 모략이 있었다.
明宗은 그의 人品을 알면서도 암행어사를 보내 조사를 시킨 일이 있었다.
당연히 그의 초라한 생활상을 보고받게 되었다.
그런데도 모략이 계속되자 다른 어사를 보내 조사를 시켰다.
'判書의 직위에까지 오른 나라의 중신임에도 재산이라고는 초가삼칸뿐' 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되었다.
이에 감탄한 明宗은 그의 고향 전남 장성의 河南골에 큰 기와집을 지어주고 淸白堂이라는 堂號를 써서 내렸다.
이 청백당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지만 그의 유품들은 지금도 전해내려 온다.
그는 漢城判尹을 지낸 후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식들에게 내 무덤에 비석을 세우지 말도록 유언을 남겼다.
그의 상여를 고향으로 운구할 비용마저 없을 정도의 생활형편이라 임금은 비용을 국고에서 부담토록 조처했다.
그의 淸白은 墓碑의 일화가 말해준다.
明宗은 서해의 좋은 돌을 골라 그의 비석을 세우게 했으나 碑文은 새기지 말도록 했다.
"박수량의 청백은 세상이 다 아는데 새삼스레 행적을 미화하다 보면 오히려 그의 깨끗한 정신을 후세에 잘못 전할 수가
있으니 아예 그의 유언대로 비문을 안쓰는게 좋겠다" 며 백비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白碑의 유래이며 임금이 신하에게 내린 처음이자 마지막 白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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