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공감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내가 감성팔이따위의 단어를 사용하며 감성이라는 인간의 성질 자체를 무시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공감의 가치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어떤 사람을 평가할때 가장 우위에 두는 가치가 이성과 감성이 골고루 발달된 사람인지이다.
내가 주로하는 말하는 방식이란 어떤 사안에 대하여 직관과 분석을 통한 비판 추론 예측하기이다. 내가 상대방에게 기대하는 답변 역시 나의 의견에 대한 비판이나 동의를 바란다. 그런데 공감한다는 대답을 들어버리면 나는 여태 무얼 위해 대화를 했나하는 회의가 들어버린다.
(공감이나 동의나 거기서 거긴데 단어하나 가지고 지나치게 민감한 꼰대적 선민의식이 아니냐며 가르치려든다는 말을 하려는 참이면, 당신은 좀 배워야하는게 맞다고 말하고 싶다)
공감을 구하는 사람과 동의를 구하는 사람의 말하기의 목적은 아주 달라보인다. 공감을 바라는 말하기의 최우선의 목적은 피아식별이다. 이 사람이 나랑 같은 감정을 느끼는지, 같은 감정이면 우리편 다른감정이면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극히 '주관적' 목적이 내재되어있다.
반면 동의를 구하는 사람은 나의 의견에 대한 '객관성'을 확보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가장 강하다. 그렇기때문에 합리적비판이라는 전제하에 동의보다는 지적을 받을때가 더 기쁠때가 많다.
인간의 시야는 항상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어떤 판단을 하더라도 개인적 호불호가 개입되지 않을수 없으며 논리적 옳고 그름과는 별개의 문제다. 논리는 사실자체를 아우를수 없다. 논리는 사실의 요소만을 취하여 전개되며 논리에 빠질수록 편향적이게 되고 결국에 선택의 문제는 참과 거짓간의 문제가 아니라 한쪽이 말하는 참과 정반대의 의견이 말하는 참의, 참과 참의 대결이며 진실은 또 별개의 문제로 결과만이 말해줄 뿐이다.
사실 객관적이고자 하는 욕망은 쾌락을 지양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맥락과도 같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때문에 영원성이 담보된것에 대한 동경과 추구를 한다. 같은 즐거움이라도 일시적이고 한시적인 것에 대해서는 쾌락 방탕과 같은 수식어를 붙이고 영원하고 지속적인 것에 대해서는 행복 사랑 진리같은 표현을 한다.
지금 나의 생각이 많은사람에게 공감을 받을지도 배척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공감이란 상대적인 것이고 시대적이며 지엽적이다. 나는 나의 생각이 다음세대에도 다른지역에서도 다른문화에서도 역시 틀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래서 이것이 쾌락이 아닌 행복과 관련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의 어떤 의견에 대하여 공감한다는 대답을 들었을 때, 내가 풀어놓은 수학문제에 O표나 X표가 아니라 '공감함'이라는 채점을 해놓은것처럼 보인다.
진리가 없는 다원화된 사회이니 공감만으로도 O X표를 대신할 수 있을까? 법이나 도덕을 논하는데는 문제없을지도 모른다. 법의 기준은 법전에 있고 도덕의 기준은 역지사지나 사회적 공감대에 있으니까. 그렇지만 공감만으로 윤리를 논할 수는 없다. 윤리의 기준은 인간성 내부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한결같은 원리이다.
윤리에 대해서 논할 능력이 안되면서 도덕과 법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수박껍질만을 보고 수박맛을 논하는것이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