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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여섯살 많았던 그녀는, (글4개 리플 수십개 통합본 완결)
게시물ID : humorstory_4262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앨리스♥
추천 : 22
조회수 : 1612회
댓글수 : 59개
등록시간 : 2014/10/15 02:34:29

[님은먼곳에]님의


나보다 여섯살 많았던 그녀는, http://todayhumor.com/?humorstory_425757

나보다 여섯살 많았던 그녀는, (이어서) http://todayhumor.com/?humorstory_426108

나보다 여섯살 많았던 그녀는, (다음 이야기) http://todayhumor.com/?humorstory_426165

나보다 여섯살 많았던 그녀는, (그 다음 이야기) http://todayhumor.com/?humorstory_426244



그냥 써보는 옛날이야기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 무렵 나는 21살 이었다.

21살의 나는 곧 군대를 가야 한다는 생각에 돈이라도 벌어보자며 무장적 휴학계를 냈다.

 

야간 아르바이트의 장점은 손님이 별로 없다는 거였고 단점은 손님이 별로 없다는 거였다.

 

... 너무 한가해서 심심하고 졸리고 그랬다

휴학을 했으니 낮에는 더 할일이 없었고 자는거 외에는 정말 할게 없어서 게임을 해보기로 했다.

 

 

아직 오픈도 하지 않아던 N 게임사의 A 로 시작하는 게임은 플레이영상만 나돌아도 뭇 게임유저들의 마음을 흔들기 일쑤였고

나도 그 영상에 빠져 언제 해볼 수 있나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게임 홈페이지는 게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수다로 북적거렸고 나도 시덥잖은 댓글이나 달며 그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그 홈페이지는 특이하게 등급제도라는게 있었는데 어떤 이벤트라든가,

어떤 조건만 충족하면 게시판 내에서 등급이 올라가고 게임을 할 때 혜택을 주며

유저들이 게임을 하지 않음에도 떠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혜택이라봐야 아이템 이런게 아니라 게임 시작시 닉네임을 선점하는거라든가, 종족 선택 우선권이라던가.)

 

나는 그냥 미천한 계급이었다.

별로 관심도 없었고.

며칠을 그렇게 들락날락하고 댓글달아주고 놀다보니 안면이라는게 생겼는데

 

익숙한 사람도 보이고 흔히 말하는 '네임드' 급의 사람들과도 말을 틀 수 있었다.

참 신기한게 네임드 급의 사람들은 서로가 되게 친했다.

친하다보니 대화도 자주하고 알게모르게 친목적인 분위기도 있고 여론이 그렇다보니 더 우와- 하게 되는 그런게 있었다.

웃긴건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닌 계급이었는데 그들 중 한명과 친해지면서

"저 사람도 네임드인가봐."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쎄컨아이디인가?"

 

"뭔가 대단한거 같아. 다들 네임드인데 혼자 평민이라니 우와." 같은 말들이 오고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나도 네임드가 되어 있었다.

 

묘한게 그 전까지는 별 관심도 없었던 그 곳이 내게 무언의 책임(?) 또는 혜택 비스무리한 관심 같은 것들이 주어지자

 

폭풍같응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네임드로 불리는 사람들도 끕이 여러개로 나뉘었는데 그 중 독보적인 인지도를 뽑내는 몇명중 한명이 내게 쪽지를 보냈었다.

 

"자네, 우리 길드에 가입하지 않겠는가?"

 

굉장히 끌리는 제안이었지만 난 마다했다.

 

왜냐면 곧 군대에 갈거였으니까.

 

군대에 간다는 의견을 밝히자 그는 그랬다.

 

어차피 너 군대 다녀왔을쯤에나 게임이 시작할것 같다고. (아직 개발중인 게임이었다)

그냥 가입이나 해두고 친하게 지내며 시간 보내다가 군대 다녀와서 게임 시작하면 되지 않겠냐고 그랬다

듣다보니 맞는 말이고 내가 손해보는건 없었기에 그가 건네준 주소를 따라가 까페에 가입했다. ...

 

 

까페에 여자님들이 무수히 반갑다며 인사를 남겨주는데...!!

 

가입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길드 가입을 권유한 그 분은 최대한 홈페이지내의 네임드급들을 많이 섭외해서

 

까페를 꾸려나가고 게임이 시작되면 게임내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나가길 바라고 있었다

 

실제로 우리 까페 사람의 반 이상은 홈페이지 네임드급이었고 홈페이지에서 이리저리 댓글을 휘두르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소위 말하는 쩌는 길드 랄까.

 

타게임에서부터 친분을 유지했다는 그들은 이번 게임은 더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세력을 넓히리라 생각하고 있었고 그 첫번째 계획은 미인계였다.

 

예쁜 여자님들이 많은 길드에 실력 있는 남자가 꼬이는건 당연한 정설,

비공개 까페였던 까페의 대문에는

 

<우리 길드의 예쁘니들~>

 

여자님들의 큐티, 섹시, 하앜 한 사진이 여러개 걸려있었고

그 사진들을 보고 가입 신청이 세네배는 늘었다며 까페지기 형은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예쁜 여자 사진이 진짜 많았다.

대부분 와 진짜 예쁘다! 라는 분위기였는데 딱 한명 친근하게 예쁜 사람이 있었다.

 

친근하게 예쁘다는게 뭐냐면 음...

섹시하게 예쁘거나 굉장히 예쁜 그런 느낌이 아닌 보면 되게 편한 느낌으로 "예쁘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그런 예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여섯살이 많았다.

 

그녀는 조용조용한 성격이었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활동도 많지는 않았다.

 

애교있고 활동이 많은 사람들이 까페내에서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고

 

나는 그런거에 끼어들 틈 없이 그냥 가끔 얼굴이나 내밀고 수다나 떨며 곧 입대할 그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간 편의점은 참 심심했고 그날도 그냥 심심하고 할거 없으니까 편의점 창고에 위치한 컴퓨터를 통해 몰래 까페를 드나들며 시간을 떼우고 있었다.

 

시간은 3, 4시를 지나는터라 까페에 방문중인 사람은 있을리 없었다.

그런데 그때 쪽지가 날아왔다. 어라 뭐지?

 

"ㅇㅇ, 안자고 뭐해요?" 그녀였다.

 

나보다 여섯살이 많은.

 

"... 아르바이트중인데요? 야간 편의점 일해요." "그래요? 힘들겠어요."

 

그녀랑 댓글로 가끔 예뻐요! 어머 감사해요! 같은 시시껄렁한 얘기만 주고 받았는데 느닷없이 쪽지라니.

 

새벽에 설리설리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일 끝나고 회식도 있고 했는데, 기분이 별로더라구요. 까페 구경이나 하고 자야지 하고 들어왔는데 ㅇㅇ님 보여서 말 걸어봤어요."

"저 야간이라 이 시간엔 늘 있어요. 야간은 심심해서 까페도 자주 오구요."

"나 가끔 잠 안오면 까페 들락날락 자주 하는데. 새벽은 사람이 없더라구요. ㅇㅇ님 계시니까 가끔 쪽지로 수다 떨면 되겠어요 ㅎㅎ"

"저야 그러면 고맙죠! 정말 심심하거든요."

 

그녀랑 몇번 쪽지를 주고 받고 그녀는 곧 자러갔다. 별거 아닌, 진짜 아무것도 아닌 쪽지였는데 기분이 되게 좋았다

 

오늘은 일을 더 열심히 잘 할 수 있겠어!! 라는 생각과 함께 폐기로 찍힌 삼각김밥과 우유를 먹으며 새벽을 그렇게 보냈다.

 

그녀는 가끔 새벽에 쪽지를 보내왔다.

잠이 잘 오지 않는다며 늦게 잠드는 날이 많다고 그랬다.

얘기 할 사람이 필요한데 없어서 그간 심심했었다고

내가 야간에 일하는게 참 다행이라고 그랬다.

 

나도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별거아니지만 이렇게 대화라도 할 수 있으니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둘만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그런게 그냥 마냥 좋았다.

게다가 예쁘기까지 하고.

 

막 이 누나가 되게 좋아!! 이런건 아니고

그냥저냥 예쁘고 착하고 그런 누나인데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좋았던거 같다.

사는 곳도 가깝지 않았었고. (가까우면 뭐? 어쩔건데 ㅋㅋㅋ)

 

그렇게 군대가기전의 지옥같던 날들이

점점 재미들려가고 군대를 미룰까 라는 생각이 들 무렵

 

어느날과 마찬가지로 그녀와 쪽지를 주고 받는데

그녀의 반응이 여타랑 달랐다.

무슨 일이 있는건가...?

 

"...오늘 누나가 술도 좀 먹었고.

너니까 되게 맘편하게 뭔가 말하고 싶다."

 

", 누나 뭔데? 왜 무슨 일 있어?"

 

"... .... 그게 있잖아. 너 이 까페 어떻게 생각해?"

 

"? 여기? 그냥 별 생각없는데. 나 어차피 군대 가잖아."

 

"하긴, 언제라 그랬지? 11? 이제 얼마 안남았네.

아 맞다 얘기하려던게 말야. 이 까페에 이상한 사람이 하나 있는거 같아."

 

"? 이상한 사람이라니?"

 

"누나가 옛날에 까페 대문에 쓴다고 사진 올린거 있잖아.

그때부터 스토커처럼 내가 쓴 글마다 댓글달고 쪽지하고

그러는 사람이 한명 있거든.

그러려니 했는데 얼마전에는 자기 곧 출장갈건데

만나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막 그러더라?

나는 별 대꾸 안하고 그랬는데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는지

얼마전에 전화도 해서는 자기 지금 나 사는데 근처에 있다고

만나자고 나오라고 막 그러는거야..."

 

"... 그런 놈이 있어...?"

 

"내 번호 스텝들 말고는 아무도 모를텐데 그 사람 스텝인가봐

아님 누가 알려줬나? 근데 처음에 까페 들어올때

자기소개서 같은거 쓰잖아, 가입인사한다고.

거기에 주소 비슷하게 올린거 있는데 찾아올거 같아서 무서워 ㅠㅠ

요즘 누나가 그거때문에 스트레스야 진짜."

 

요약하자면,

그녀를 스토킹하는 녀석이 나타났다는 말.

 

그녀는 나보다 6살이 많았고

그 스토킹 하는 녀석은 나보다 8살이 많았다.

 

... 하 나이먹고 뭐하는짓이야

 

난 괜히 화가 났다. 왜 괴롭히는거야

내가 좋아하는 누나를! ?!!?!

누나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그건 이성을 좋아한다는 그런 감정은 아니였다

가족을 좋아하는, 주변 소중한 것을 좋아하는, 그런 감정에 더 가까웠던거 같다

게다가 이쁘고 착하기도 하니까 친해지고 싶은 마음도 컸었고.

 

누나는 스물 중반에 사회 생활을 해나가는 직장인이고

나는 아직 군대도 안 다녀온 학생에 불과했다. 정확히는 휴학생?

누나를 감히 좋아한다는 마음을 품는거 자체가 좋았기에

좋아한다는 표현이나 그 감정이 더 커지는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치만,

누나를 괴롭힌다는 그 스토커는

도저히 용서 할수가 없었다.

 

내가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힘이 있는것도 아니지만

그 사람만은 어떻게든 누나에게서 처리해주고 싶었다.

 

"누나. 그 사람 누군지 알려줄 수 있어?"

"... 내가 너니까 알려주는거야. 그 있잖아................."

 

누나의 얘기는 꽤 충격적인 사실을 함께하고 있었다.

스토커라고 말해준 그 사람이,

내가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기도 했고

우리 길드내에서 매너 좋기로 소문난 사람이였기 때문이다.

 

나도 평소에 형형 하면서 따랐던 사람이기도 했고...

 

길드까페에서는 굉장히 소박하고 착한 사람이였는데

뒤로 이런 짓을 하고 다녔다는걸 알게되자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무섭기도 했다

진짜 사람이란게 겉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되는구나

속마음은 정말 아무도 모르는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그 사람 아무리 찾아가고 뭐하고 연락하고 그래도 만나거나 가까워지지마"

 

". 안그래도 요즘 답장도 안하고 까페도 좀 뜸하게 가는편이야. 연락은 당연히 안받고.

누나 까페에서 편하게 얘기 하는 사람 몇명없어~ 남자는 너밖에 없을걸? ㅋㅋ"

 

"아 진짜? 남자는 나밖에 없어? 영광이네 ㅋㅋ"

 

"그럼! 당연히 영광으로 알아야지~ 누나가 너 예뻐라 하잖아"

 

............... , 심장 떨어질뻔...

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그게 은근히 내 가슴을 꽁냥꽁냥하게 만들고 있었다.

누나가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지 얼마 안되서

길드 까페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직 게임이 오픈 하기에는 시기도 많이 남았고 (오픈일정도 안나오고 미정..)

까페가 만들어지고 시간도 어느정도 지났는데

다들 정모 한번 안하냐며 꽤나 들썩거리고 있던 모양이다.

 

까페는 서로의 일상에 대한 글, 서로의 사진등을 올리고 댓글을 주고받으며

많이들 친해진 모양이었고

동네가 가까운 몇몇은 이미 술도 한잔 한거 같았다.

 

스무살이 되고 대학에 갔던 그 당시의

MT 라던지 OT, 신입생 환영회, 동아리 모임 등등

여러 사람이 모여 재밌게 놀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정모를 한다는거는 긍정적인 반응이였고

무엇보다 누나를 보고 싶었다.

 

정말 말 그대로 얼굴을 보고 대화를 해보고 싶었다.

 

새벽마다 쪽지를 통해 대화를 하던게 어느덧 3개월이 넘어가고 있었고

이제는 누나가 없는 새벽은 허전하기까지 했다.

 

소심소심했던 나는 차마 핸드폰 번호를 물어봐서 연락하겠다는

그런 마음은 품지도 못하고 있었다 ㅋㅋ

그 뭐랄까.

지금 쪽지만 주고받는 이것도 나만 누리는 '특권'인데

더한것을 원하다가 이것마저 누리지 못하면 어떡하나... 라는 그런거?

 

누나도 딱히 내 번호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너 정모 갈거야?"

 

", 뭐 기회가 되면 가보려고. 날짜 정해지면 점장님한테 알바 하루 쉰다고 얘기할라고."

 

"... 난 어쩌지. 나도 가보고 싶기는 한데..."

 

"다른 누나들이나 여자애들도 꽤 오는거 같던데. 누나도 와~ 얼굴이나 한번 보자"

 

"야 누나 사진이랑 똑같이 생겼어 ㅋㅋ 사진빨 아니다?"

 

"사진빨이고 아니고는 내가 보고 판단해줄게 ㅋㅋ 동생이 멀리서 간다는데. 누나도 가자~"

 

"일단 정이(가명)한테 물어보고 알려줄게. 정이 가면 같이 가야지."

 

"오면 나한테 꼭 붙어있어. 그 스토킹 하는 사람 말도 못붙이게."

 

"든든하네 짜식 ㅎㅎ"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울이나 경기쪽에 살았고

나는 지방에 살았다.

정모는 서울에서 열릴건 뻔한거였고...

만약 누나가 간다고 한다면 알바 하루쯤은 거르고 나도 갈 생각이였다.

 

다른것도 아니고 누나를 보는건데 알바가 대수겠냐고.

 

정모는 아니나 다를까 서울에서 할 예정이였다.

 

평소 알바를 성실히 했던 나였기에,

점장님에게는 집안의 결혼식이 있다고 얘기를 해두고 정모가 있는 날 스케줄을 비워놨다.

 

누나도 정이누나랑 함께 정모에 갈 예정이라고 그랬다.

 

그리고 정모를 앞둔 날 새벽,

누나는 내게 핸드폰 번호를 알려줬다.

 

"누나 아는 사람도 얼마 없고, 친한 사람도 얼마 없어.

너랑 정이만 믿고 가는거야. 알지?

정모 갔는데 누나 심심하게 하거나 혼자두면 죽어

멀리서 오느라 심심할텐데 오면서 누나한테 문자라도 하고,

너 혼자 가면 뻘쭘할테니까 정이랑 나랑 같이 가자

서울역 몇시쯤 올거 같아?"

 

"정모가 6시랬나? 그럼 서울역에 5시에는 도착해야 맞을거 같은데.

나 서울지리 잘 몰라 ㅎㅎ 누나가 안내해줘"

 

"그래, 나랑 만나서 가면 되겠네. 5시까지 와~ 정이랑 기다리고 있을게"

 

정이누나는 나보다 두살 많은,

되게 까페내에서 인지도도 높고 활동도 많고 활발한 그런 누나였다.

나랑도 말은 트고 지내는 그런 사이였기에

정이누나랑 셋이서 보는게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누나가 핸드폰 번호를 알려줬다는게 마냥 좋았다

 

왠지 누나에게로 한단계 더 다가가게 된 느낌이랄까

 

그렇게 숫자 몇개에 흐뭇해하는 밤이 지나가고

정모날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 최대한 기억을 살려가며 써내려가는중...)

대망의 정모날 아침.

어떤 옷을 입고 가야 하나,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나 하는 고민은 둘째치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고민이 제일 컸었다.

물론 게임까페니까.. 게임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올거 같았지만

누나랑은 게임 얘기만 시시콜콜 하다가 헤어지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너무 진지한 얘기를 나누기에도 어색하고

취미가 뭐냐, 좋아하는게 뭐냐 이런 얘기를 나누는것도 이상하기는 했다.

여자친구를 사귀어본 경험이 있기는 했지만

그리 길지 않았던 만남이었고

그 만남이 그리 도움이 될거 같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이 만남이 소개팅이나 남녀간의 만남이 아닌 단순 정모의 만남이기에

내 고민은 참 쓸데없는것 일지도 모를일이였다.

서울로 출발하며 누나에게 간단히 문자를 했다.

나는 이제 출발중이니 누나도 늦지 않게 나오라고 보냈다.

그랬더니 장문의 답장이 왔다

< 먼길 오느라 고생이 많네. 아직 겨울은 아니지만 쌀쌀하니까 옷 잘 챙겨입고 오고~

누나는 정이랑 만나서 까페왔어. 정이가 너 보고싶어 하던데? 인기남이야 아주~ ㅋㅋ

까페에 아는 사람 얼마 없다더니 정이랑은 언제 또 친해졌어. 누나랑만 친한줄 알았더니 >

< , 정이 누나랑은 그냥 인사만 한 사이야 ㅋㅋ

정이 누나가 워낙 친화력이 좋아서 그렇지 뭐 >

< 들어보니까 정모에 사람 되게 많이 온대~ 누나한테 잘 붙어있어

누나 낯가림 심하다 ㅎㅎ >

< 당연하지. 나도 누나 말고는 딱히 친한 사람 없어 >

꽤 많은 문자를 주고 받으니 어느덧 서울 근처에 다다르고 있었다.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문자를 한다는거... 이런게 설렘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 와중에도

누나랑 어찌저찌 잘되서 꽁냥꽁냥한 사이가 되는걸 상상하기 보다는

그냥 누나랑 이렇게 문자를 주고받고 친근하게 얘기하고 있는 남자가

''라는 사실이 참 좋았다.

그저 그 사실이 서울로 오는 기차에서의 피로를 싹 가시게 해주었다.

그리고 떨리는 첫 통화-

"여보세요? , 누나. 와 목소리 되게 여리여리하네. 얼굴만 어린줄 알았더니 목소리도 어려 ㅋㅋ

나 이제 도착해쓰. 누나 어디야?"

"~ 왔어? 너도 목소리가 좀 어린데? 얼굴은 늙어보이더니 ㅋㅋㅋ"

"늙어보이는건 인정... 노안이 원래 나중되면 제나이처럼 보여

서울역 오랜만인데, 역시 사람 많네. 누나 아직 안왔어?"

"잠깐만..."

잠시 정적이 흐르고

누가 내 어깨에 살포시 손 대는게 느껴졌다.

"~ 너 사진이랑 똑같네"

흠칫하며 돌아본 뒤에는 익숙해 보이는 얼굴이 둘 있었다.

여섯살 많은 그녀와 두살 많은 그녀

내가 좋아하는 누나와 정이누나였다.

#

"희정(가명)언니가 너 귀엽게 생겼댔는데 전혀 아닌데? ㅋㅋ"

"~ 우리 정우(가명) 귀엽지 않아? 충분히 귀여운데 왜 ㅋㅋ"

"... 됐고, 빨리 가자. 늦은거 아냐?"

가벼운 내 험담으로 첫만남을 가진 우리는

일단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정모가 있을 예정인 곳과 서울역은 거리가 좀 있었다.

호프집을 운영하는 길드원이 한명 있었는데

정모의 장소가 그곳이였고, 살짝 변두리에 위치해 있었다.

누나는 정장 비슷하게 생긴 옷이였고

정이누나는 청바지에 캐주얼하게 차림을 했었다 (자세히 기억안남)

주변 내또래들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던 누나는

사진처럼 예쁘고 쪽지를 주고받을때처럼 친근했다.

어색어색할수도 있었지만 정모장소를 향하며 가는 택시 안에서

우리 셋은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었다.

누나랑 정이누나는 일찌감치 만나서 조금 더 친해진 상태였고

나는 누나랑, 누나는 정이누나랑,

정이누나는 간간히 나와 대화하며

조금씩 서로에게서 낯설음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이내 정모 장소에 도착을 했고,

정모가 열리는 그 호프집 입구에 커다랗게

< ㅇㅇ 길드. 첫 정모를 환영합니다!>

라는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 생각보다 거창한 환영인사인데...?

생각도 잠시

흠칫하며 들어선 호프집 안의 풍경은

나를 더 놀라게 만들었다.

10~20명 정도쯤 왔을거라 생각했는데

호프집 안에는 대략... 40...? 50?

엄청 많은 사람들이 각기 이름표를 목에 걸고 자리하고 있었다.

이름표는 서로의 이름은 모르고 닉네임만 알기에

이름이랑 닉네임을 헷갈리지 말라는 길드장의 제안이였고

다들 재밌을거라며 찬성했었더랬다.

40~50명의 성인 남녀가 색깔도 다양한 이름표를 목에 걸고 있는 모습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주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나도, 누나도, 정이누나도

각기 이름과 닉네임이 써 있는 이름표를 목에 걸고

호프집에 당당히 입성했다.

그리고 우릴 반겨주는 까페 사람들.

"! 우리 길드 최고 미녀 왔다!!!!"

누군가 누나를 보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가 최고 미녀인건 맞지만

그 외친 사람의 이름표를 보니 기분이 확 나빠졌다.

 

그놈이였다. 스토커.

 

누나도 그걸 눈치챘는지 표정이 굳어지는게 보였고

아무것도 몰랐던 정이누나만 그 환영인사에 응해주었다.

 

"~ ㅇㅇ 오빠. 희정언니만 보이고 난 안보여?

예쁜 여자만 반겨주는거야 지금? ㅋㅋ"

 

"에이~ 아니지. 정이도 완전 기다렸지.

다들 너네 셋 언제오나 계속 기다렸어."

 

"특히 희정언니를 더 기다린건 아니고?"

 

"... 그것도 그렇고...? ㅋㅋㅋㅋ

자리에 앉아. 배고프겠다 뭐 좀 먹자."

 

원래대로라면 매너도 있고 되게 착하고 남자답다고 생각했을 그 형이

굉장히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저 가면 뒤로 누나를 괴롭혔을 생각에 말도 섞기가 싫었다.

누나도 고개만 까딱 해서 인사를 하고는 나와 정이누나를 끌고

사람이 그나마 적어보이는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잠시동안

누나가 내 손목을 잡고 가는데, 참 좋았다.

얼마만에 잡혀보는 손목이야 이거.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북적이는 호프집에서

우리는 자기소개를 하고 인사를 나누고 술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까페에서 전혀 보지 못했던 사람도 있었고

활발한 활동을 하며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도 있었다.

 

활발한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까페와 마찬가지로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자기 존재를 어필하고 있었고

나는 동갑 녀석들 몇명과만 인사를 나누고 (동갑이라 그냥 쪼끔 친했다)

누나 옆에 꼭 붙어있었다.

 

누나는 인기가 많았다.

여기저기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인사를 하러 왔고

그 틈에 끼어 나도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정이누나는 이미 우리 테이블은 잊었는지 가끔 와서 "헥헥 힘들다"

라는 말만 하고는 사라지기 일쑤였고

테이블의 사람은 계속해서 바뀌고 있었다.

나랑 누나만 고정적으로 자리에 있을뿐.

 

난 술을 많이 먹지 않았다.

원래 안 좋아하기도 하지만,

누나 앞에서 혹여나 실수라도 할까봐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다.

 

"정우는 담배 안펴?"

 

호프집 안의 한 구석이 담배연기로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빠지지 않는 것이 담배였고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꼬나물고 술과 함께 하고 있었다.

 

"난 담배 안펴. 아직 안펴봤는데 피울 생각도 없고."

 

"~ 보기드문 남자네. 누나도 담배는 별 생각없더라."

 

"누나는 피우지마~ 나도 안 피울거야. 아마도 ㅋㅋ"

 

"너도 안펴야지 아마도는 뭐야. 피우지마, 몸에 좋지도 않은데.

누나는 담배 안피는 남자가 좋더라"

 

아마 이때였던거 같다.

평생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던게.

 

그렇게 시시콜콜한 얘기를 주고받고

간간히 오는 사람들이랑 사담도 나누고 하다보니

많은 시간이 흘러 있었다.

 

누구는 취해서 잠든 사람도 있었고,

누구는 했던 얘기 또하고 또하고 하며 주정도 부리고 있었고

누구는 유독 친해졌는지 깔깔대며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정모는 그리 싫지 않았다.

재밌었고 흥겨웠고 색다른 기분이 느껴졌다.

익명처럼 어렴풋이 알기만 했던 사람들과 현실로 이어지는 자리였기에

기분 좋은 만남이였다.

 

그렇게 잘 마무리만 됐다면 참 좋았을건데.

 

사건은 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터지는 법이다.

 

#

 

"나 갈거야. 아오 씨xxxx"

 

어디론가 사라졌던 정이누나가 거친 언어와 함께 가방을 챙겨들고 있었다.

 

"왜 무슨일이야?"

 

희정누나가 침착하게 정이누나를 다독였고

정이누나는 한참동안 씩씩거리며 분을 삭히고 있었다.

무슨일인지 도무지 감도 안오는 상황에

정이누나가 말을 이었다.

 

"저 새끼, 저거 순 내숭이였어. 변태새끼.

언니 조심해야겠어."

 

정이누나의 말인 즉슨

정이누나가 여기저기 테이블을 돌다가

그 스토커놈 자리에도 갔더랜다.

 

이미 술이 꽤 돌았기에 다들 헬레벨레 정이누나를 맞이했고

술 한두잔 따라주며 얘기를 나누는데

그 스토커놈이 술이 잔뜩 취했는지

술은 여자가 따라줘야 제맛이다, 옆에 와라, 은근슬쩍 어깨동무,

허리에 손, 실수인척 허벅지 터치 등을 했더랜다.

 

게다가 술게임 같은걸 강요해서 접촉을 이끌어내기도 했고.

 

정이누나는 그런걸 참거나 숨기는 스타일은 아니였다.

그 자리에서 이러지 말라고, 술먹고 무슨 추태냐고 한바탕 쏘아주고는

그나마 술이 덜 취한 그 테이블의 멤버에게

이 사람때문에 기분나빠서 더 못있겠다 말하고는 왔다고 했다.

 

나랑 희정누나는 그 얘기를 들으며 전혀 놀라지 않았다.

원래 그런 놈일거라고 예상했으니 말이다.

 

대신 놀랐을거 같은 정이누나를 진정시키고

길드장 형에게 간단한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이런 일이 있고, 이래서야 되겠냐고.

이제 시간도 늦었으니 정모는 끝내는게 어떻겠냐고 의견을 물었다.

 

잠시간의 자리정리가 있고

첫 정모는 그렇게 끝이 나는듯 했다.

 

끝났으면 좋았을것을...

 

"!!!!!!!!!!!! 나 희정이 좋아한다!! 희정이 좋아한다고!

나랑 연락도 하고, 나 쟤 집도알아!!!"

 

나랑 희정누나가 나가는 것을 본 스토커놈이

술에 취한 목소리로 소리치는게 들렸다.

 

"가자 정우야. 신경끄고."

 

누나의 고운 얼굴이 짜증으로 물들어있었다.

당사자가 아닌 내가 들어도 짜증이 확 나는데

누난 도대체 얼마나 짜증이 날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가슴이 찌릿했다.

저 스토커는 왜 또 큰소리지?

 

", 쟤 좀 말려라"

"쟤 술 마이 뭇네. 치아라" (사투리 못씀 죄송)

"... 형 왜그러세요. 정신차리세요."

 

스토커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말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저기 웅성웅성대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거 같았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기심반 걱정반의 눈빛으로

나와 희정누나, 스토커를 번갈아보고 있었고

정이누나는 "저 미친새끼가..." 라며 화를 내고 있었다.

 

"아니 놔봐!! 나 희정이 좋아한다니까? 쟤도 나 좋다 그랬어!!"

 

스토커가 별 그지같은 멘트를 구사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난 이 그지같은 상황에서 희정누나를 피신시켜야 겠다는 생각을 했고,

누나를 이끌었다.

근데, 누나가 거부했다.

 

"잠깐 정우야."

 

누나가 그 스토커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갑자기 흥미진진해진 사태에 사람들은 각기 마시던 술과 수다를 멈추고

우릴 주목했다.

정확히는 희정누나와 스토커.

 

스토커도 희정누나가 다가오자 움찔했지만 눈을 피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취기섞인 목소리로 뭐라뭐라 중얼대는게 보였다

얼핏 듣기에 넌 내꺼, 좋다, 뭐 어쩌구 하는 내용이였다.

 

희정누나가 그 고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오빠, 오빠가 평소에 나 좋아해주는건 참 고마운데

그 방식이 틀렸어요. 상대방이 싫어하면 그건 집착도 뭐도 아니고 그냥 괴롭힘이에요.

그리고 오빠보다는 저기 정우가 난 더 마음에 들거든요? 오빠보다 백배는 나은거 같아요 정우가."

 

따박따박 말을 쏘아내고는 누나가 돌아섰다.

스토커는 돌아선 누나의 뒤로

누나 욕반, 내 욕반, 이상한 헛소리 몇개를 지껄였고

누나는 가볍게 무시하며

나와 정이 누나를 이끌고 호프집을 나왔다.

 

조용하기만 했던 누나에게서

되게 당찬 모습이 나와서 당황스러웠고

 

마지막에 했던 그 멘트가

조심스럽게 나를 파고들고 있었다.

 

내가 더 마음에 든다고...?

 

급격한 두근거림.

이건 술때문에 두근거리는게 아닌건 분명했다.

 

바람은 차가웠고 누나의 손은 따뜻했다.

희정누나는 한쪽에 정이누나 팔짱을 끼고, 다른 한쪽은 내 팔짱을 끼고

그렇게 걷고 있었다.

 

정이누나는 뭔가 말을 할랑말랑 했는데 이내 못하는 눈치였고

나는 딱히 할말이 없었다. 그냥 멍할뿐.

갑자기 이게 뭔 상황인거지??

 

희정누나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생글생글하며 걷는데 발걸음도 참 가벼워보였다.

 

"우리 2차 갈까?"

 

희정누나가 물었고,

정이누나는 약속이 있다며 가봐야 한다고 그랬다.

그때는 몰랐는데

정이누나가 나중에 얘기해줬다

그 자리에 자기가 있으면 안될거 같다며 빠져준거라고.

참 센스있는 누나다.

 

난 기차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고

누나와의 술자리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2차는 서울역 근처에서 하기로 했다.

 

"그 스토커 언젠가 한번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늘이였나봐

잘됐지 뭐. 앞으로 또 그러지는 않겠지?"

 

"글쎄... 누나가 아까 되게 톡톡 쏘아붙여서 이제 누나가 싫지 않을까?"

 

"그럼 더 좋고."

 

서울역 근처에 누나가 자주가는 Bar가 있다고 했고,

우린 그곳으로 갔다.

바는 아직 어린 내게 생소한 문화였다. (21!!)

 

여기서 급 느껴지는 누나와의 나이차...

누난 직장인이고 난 학생이구나.

살짝 씁쓸했다.

 

난 아무거나 누나에게 물어 메뉴를 정했고

누나는 자주먹는게 있는듯 했다.

호프집처럼 시끌벅적하고 시장같은 분위기에서만 술을 먹어보다가

조용하고 품격있는(?)듯한 바에서 술을 먹으려니 영 낯설었다.

 

"조용히 얘기하고 싶어서. 호프집보다는 여기가 낫지?"

 

"되게 깨끗하고 조용하네. 나 바는 처음 와보는데 ㅎㅎ"

 

"누나도 몇번 안와봤어. 그냥 조용하고 얘기하기엔 좋아~"

 

그렇게 살짝 어색어색한 얼마가 흐르고,

 

"곧 군대 가겠네. 얼마나 남았어?"

 

"118일이니까... 한달도 안남은거 같아. 시간이 너무 빨라."

 

"하필 추울때 가네... 좀 따뜻할때 가지."

 

"어차피 가면 다 춥대, 빨리 갔어야 하는데 내가 친구들중에는 좀 늦어"

 

생각하기도 싫은 군대 이야기.

난 이제 앞으로 2년을 누나 곁에서 떠나있어야 했다.

 

그냥 이렇게 얼굴보고 대화하고 이런걸 못한다는게

어찌나 싫던지.

오늘 처음 본 누나인데 그냥마냥 편하고 좋은 느낌이였다.

쪽지로 주고받던 그 느낌 그대로

참 좋은 누나였다.

 

"아까 누나가 했던 말 있잖아."

 

아까 했던 말... 이라면...?

 

"정우가 참 나이답지 않게 생각이 어리지도 않고 듬직해서 누난 정우가 좋은거 같아

그때 새벽에 쪽지해보길 잘한거 같아. 그때 쪽지 안했으면 너랑 이렇게 친해지기나 했을까."

 

"그때 쪽지를 안했어도 친해지지 않았을까? 다르게라도 친해졌을거 같아."

 

"하긴, 너랑 대화하면 편하고 그래서 매일 얘기해도 부담이 없더라."

 

그저 달콤하기만 한 얘기들.

누나의 얘기는 다 기분좋게만 들렸다.

 

"정우 넌 이상형이 누구야, 연하나 연상 뭐 이런거."

 

평소에 이상형은 딱히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그냥 마음에 맞는 사람, 나랑 잘 통하는 사람, 끌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랑 사귀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누나였다.

 

그런데 누나라고 얘기할 수가 없었다...

 

"나 이상형은 딱히 없어. 생각해본적이 없는거 같아."

 

"연상이나 연하, 이런건 안따지고? 나이 이런건 상관없어?"

 

"... 띠동갑이나 너무 차이만 안나면 괜찮지 않을까??"

 

누나의 정확한 마음을 알기도 어려웠고

쉽게 내 마음을 비추기도 어려웠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군대.

 

그리고 그 뭐냐...

이렇게 잘나고 이쁜 누나인데

나같은 놈이랑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그런거?

 

솔직히 자신이 없다는게 맞는 말인거 같다.

 

기차 시간은 점점 오고 있었고

시간은 어찌 그리 빨리 가는지 야속하기만 했다

 

게다가 난 왜 지방에 사는건지.

지방만 아니라면 좀 더 누나와 있어도 될텐데.

왜 난 21살인건지,

조금 더 나이가 먹었으면 안되는건지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참 이런거 하나하나 따지다보면 끝도 없는데

불만은 늘어가고 초조하기만 했다.

 

"... 이제 가야겠네 정우. 아쉽다."

 

"뭘 아쉬워 또 보면되지. 오늘보고 말것도 아닌데."

 

최대한 내 마음을 숨기며 말했다

아쉽기는 내가 얼마나 아쉬운데!!

 

..당장 기차를 놓치면 지낼 곳도 몸을 기댈 곳도 없는 실정이라

눈물음 머금고 난 기차에 올랐다.

집으로 가는 기차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그 밤풍경이 그렇게나 쓸쓸할 수 없었다.

 

그나마 누나와 주고받는 문자가 위안이 되고 있었을뿐.

 

정모 이후,

까페의 분위기는 확 달라져 있었다.

 

정모때 눈이 맞아서 사귀는 사람도 있었고

정모때 이미지를 확 깨며(스토커? ㅋㅋ) 밉상이 된 사람도 있었고

말이 없었는데 말이 많아진 사람, 갑자기 말이 더 없어진 사람,

시시콜콜한 정모 후기와 다음 정모에 대한 기대감

정모가 아닌 소모임에 대한 의견들로 까페가 북적거렸다.

 

난 그전과 똑같이 그냥 가끔 글을 올리고 가끔 댓글을 달고

가끔 활동을 하는 회원이었고

똑같이 새벽에는 누나와 쪽지를 주고받고

새벽이 아닌 시간에는 간간히 문자를 주고 받았다.

 

더 좋은건 가끔 통화도 한다는거.

 

매일 엄마, 친구, 점장님(편의점) 전화만 받다가

상큼한 누나 목소리를 들으니 꿀같았다.

달달히 녹아들어가는 느낌 ㅋㅋ

대부분 누나가 얘기를 하고 나는 들어주고 하는 입장이었는데

누나는 회사에 대한 스트레스, 그 날 있었던 에피소드,

간혹 까페에 대한 얘기, 가끔 게임에 대한 얘기를 했다

 

무슨 얘기를 해도 좋기만 했다.

이러면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 점점 누나에게 빠져드는거 같았다.

 

점점 시간은 가고, 11월이 되기 하루전.

난 오래 이어가던 알바를 그만뒀다.

남은 일주일은 나를 위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남들 다 하는 여행도 가고 싶었고

평소에 못해보던거, 못먹어보던거

다 하나하나 해보고 싶었다.

 

누나도 군대 가기 전에는 후회할거 남기지 말고 다 하라고

여행 가려면 계획 제대로 잘 세우고 가라며 날 격려해줬다.

 

정말 정말 정말 가고 싶은 곳은

누나가 있는 서울의 그곳이지만,

그런 사실은 숨긴채 부산과 대구쪽 밑에 지방으로 목적지를 잡고

그 지방에 사는 친구들에게 여행 자문을 구하기 시작했다.

 

참 묘한게

내가 부산과 대구쪽을 여행지로 잡았다고 누나에게 얘기를 하니

누나 고향이 대구라며 (정확히는 경산)

대구는 자기가 소개해준다고 그랬다.

 

마침 주말이 끼어있기도 했고,

누나도 오랜만에 집에 내려갈거라며 같이 대구행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누나랑 나는 대구역에서 두번째 만남을 가졌다.

 

여자랑 여행 한번 안해본 나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으면서도 마냥 즐겁기만 했다.

 

딱히 단둘이 여행을 온 상황은 아니고

누나는 그냥 집이 대구였던거고 나만 여행이기는 했지만

말도 안되는 이 상황이 참 좋았다.

 

대구에서 맛있다는 맛집을 가고,

누나가 학창시절 즐겨다녔다는 분식집도 가고,

대구에서 이름난 곳을 구경하고,

그렇게 돌아다니다보니 저녁은 금방이였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누나랑 있을때의 시간은 정~말 빨리 갔다

평소 필요없던 시간을 여기에 다 투자하고 싶을만큼 그랬다.

 

누나랑 그 근처에서 제일 핫하다는

영남대 뒷골목 술집으로 향했다

처음에 갔던 바와 비슷한 느낌의 호프집이였다

조용하고 안주가 맛있는.

 

거기서 누나는 옛사랑에 대한 얘기를 했다

 

누나는 오래 사겼던 남자친구가 있었다고 했다

스무살 풋풋한 나이부터 스물여섯의 나이까지

6년을 만나던 남자였는데

오랜 시간을 만난만큼 서로에 대해 잘알고

결혼까지도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라고 했다

 

뜬금없는 옛사랑 얘기지만 난 조용히 듣기로 했다

그저 지나간 사랑이였는데

듣기만 해도 가슴이 아릿했다

오래 만난 사람이 있었구나...

 

누나가 사겼던 사람이 없었을거란 생각은 안했지만

직접 듣고 있으니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아니였다

 

누나는 그 남자와 좋지않게 헤어졌지만 (...)

가끔 생각난다고 그랬다. 그치만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고.

그러던 와중에 뭐라도 해보고 싶었고

우연히 N사의 A게임을 보게됐고 접하게 됐다고 했다

길드 까페도 별 생각은 없었지만 길드장 형이 끈질기게 가입을 권유해서

어쩌다보니 가입했고 활동할 생각도 없었더랜다.

 

사진은 가입 조건에 사진이 있어서 어쩔수없이 하나 보냈던게

까페 대문에 실리기까지 했던거고.

처음엔 사진이 올라가는게 부담스러웠지만

이왕 가입한거 까페활동이나 열심히해보자 라는 심정으로 놔뒀다고 한다.

그러다 그 스토커 놈이 꼬였던거고... (이쁘니까)

그 스토커놈이 누나 연락처를 알았던건 스텝중에 하나가 그 스토커놈 친구였더랜다.

 

정모의 그 사건이 있은후,

길드장형이, 누나에게 그랬다고 한다

불미스러운일을 겪게 되서 미안하다며

연락처를 알려준 그 스텝놈과 스토커놈 둘다 강퇴 조치 하겠다고.

실제로 그 둘은 며칠 뒤 자취를 찾을 수 없기는 했다.

 

누난 조용히 옛사랑부터 까페에 대한 얘기

그리고 최근에 대한 얘기까지 꺼내기 시작했다.

 

난 여전히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간혹 리액션만 해주고.

 

누나가 왜 내게 이런 얘기를 하는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런 얘기를 하는지 알수는 없었지만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야 하는게 내가 꼭 해야하는 의무처럼

그렇게 누나 얘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특히 최근의 얘기에는 내 얘기도 종종 나와서 더 그랬다.

 

"정우가 그 새벽에 있었을때 말야. 사실 누나가 아무나 대화할 사람이 필요했거든.

뭐를 바라거나 이랬던건 아닌데 너 싹싹하게 날 대해주더라고.

우리가 친하거나 그랬던 사이는 아닌데 친한척도 해주고, 살갑게도 대해주고,

너가 누나라면서 막 말 걸어주고 그러니까 그게 또 고맙더라고.

특히 새벽에 말야, 누난 새벽이 참 싫은데 너 맨날 새벽마다 있으니까 좋더라?"

 

"다행이네. 나 새벽에 일했던게 처음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어."

 

"그치, 누나도 그거 고맙더라.

누나가 속상해서 술한잔해도 새벽에 말 받아주고.

잠이 안와도 누나 잘자라고 토닥토닥 해주던게 너고.

요즘에는 누나 힘내라고 문자도 해주고 가끔 전화도 하면서 좋더라고.

, 그거 말야 ㅋㅋ 너 누나 잘자라고 자장가 불러준거 ㅋㅋ 아 오글거렸지 참"

 

"... 그건 누나가 불러달라고 빠득빠득 우겨서 불러준거고."

 

"아무튼, 웃겼어. 귀엽기도 했고."

 

"나 귀엽다고 하는건 누나뿐일걸? 이게 어딜봐서 귀여운 외모냐고"

 

실제로 난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잘생긴것도 아니고 그냥 무난무난한 얼굴,

 

... 누나랑 이 호프집에 들어올때도

누나는 민증검사를 했지만 나는 안했을정도로

누나는 동안에 나는 노안이였다

(... 누난 27살이고 난 21살인데....)

 

"누나가 귀엽다면 귀여운거야. 짜식이."

 

"네네~ 그러믄입죠"

 

누나랑 꽤 오랜 시간을 호프집에서 대화를 했다

누나는 내 이야기도 궁금했는지 이것저것 물었고

최대한 진실에 가깝게 누나에게 답해줬다.

 

누나가 가장 궁금해했던건

내 첫사랑이였는데,

내 첫사랑은 내 친구랑 바람나서 떠나갔다

 

그 얘기가 나올때

누나는 자기일처럼 내 친구랑 내 첫사랑을

참 맛깔나게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그랬었다.

 

군대에 가기전,

누나를 만났다는게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우연히 주고받은 쪽지 하나로 이렇게 좋은 누나를 만나게 됐고

이렇게 술까지 주고받고 있으니

새벽에 알바를 하게된 그것부터, 게임을 하려고 생각했던 그거,

까페에 가입하고 까지의 모든것들이

하나라도 없었으면 누나를 못봤겠지... 라는 아찔함으로 와닿기도 했다.

 

참 좋았다

 

나보다 여섯살 많은 그 누나가.

 

"정우는 담배도 안피고, 술도 잘 안마시더라? 그때 쫌 놀랐어"

 

정모때 내 동갑 아이들은 술에 떡이 된게 태반이였다

담배도 대부분이 피고 있었고...

 

뭐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거긴 했지만

누난 그게 썩 마음에 들었었나보다.

누나 자신도 술도 잘 못하고 담배도 안하니까

상대방이 그러면 좋다는 눈치였다.

 

오늘은 그때랑 다르게 술이 좀 들어갔다.

많이는 아니고 취기가 적당히 오를 정도로만.

 

평소보다 말이 많이 나왔고

평소보다 뭔가 심장도 빨리 뛰고 쿵쿵대는 것이

좋지 않은 징조였다.

이러다보면 분명 내 안에 있는 진심이 나올것만 같았다.

 

누나가 좋다는 그 진심이.

 

".. 오늘은 좀 취하네. 그만 가자 누나. 누나 집에 들어가야지."

 

"어 벌써? 아냐 아직 12시도 안됐는데 한잔 더 하자."

 

누나가 소주 한병을 더 시켰다.

 

전처럼 기차시간이 정해져있는것도 아니고

여행을 목적으로 돌아다니는거라

난 찜질방이나 어디 눈 붙일만한 곳에서 자면 그만이고

누나도 집이 가까우니 부담은 없었다.

 

취하지만 말자라는 마음으로

적당히 한두잔 더 술을 들이켰다.

 

"정우야."

 

누나가 부르고 내가 대답한다.

 

", 누나."

 

누나가 다시 말을 이어간다.

 

"정우야, 누나가..."

 

잠시 말을 끊고, 다시 말을 잇는다.

 

"누나가. 이러면 안되는거 같은데. 너가 참 좋다.

누나가 너보다 나이도 많고 이런데, 너가 좋은거 같아

니가 그 나이같지 않게 생각이 깊은게 마음에 들고 듬직해서 마음에 들어."

 

누나가 또 말을 잇는다.

 

"누나가 너 부담주려고 하는 말은 아닌데, 그냥 니가 좋아

연하는 생각도 안해봤는데 요즘 니가 마음에 들어오는거 같아."

 

그리고 또 누나가 말을 잇는다.

 

"근데 너는 왜... 군대에 가는거니... ..."

 

누나가 잠시 말을 끊는다.

 

... 듣고만 있었다.

 

 

나를 좋다고 해준 여자가 누가 또 있을까..?

아득한 떨림에 젖어본다

첫사랑의 그녀도 내가 좋다해서 만났고

나만 더 좋아하며 지내다 마음이 까맣게 타 헤어졌는데

이렇게 내가 좋다고 표현해주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일이였고

접해보지 못했던 낯선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렇게 예쁜 누나가

누구나에게 사랑받는 누나가

가끔 상상만 했었던 그런 누나가

내가 좋단다.

그것도 저렇게 또박또박 말하며 내가 좋단다.

지금이라도 군대에 가지 않겠다고 말할까?

며칠 남았으니 군대 연기도 되지 않을까?

지금 이 상황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나가 소주 반쯤 차 있는 잔을 비우고

얼음 가득한 물을 마셨다.

그리고 조용히 나를 바라봤다.

내가 뭔가 말해야 하는... 그런 상황

"... ... 누나."

어떤 말을 해야 하나 정리 되지는 않았지만

일단 말을 걸었다

"... 정우야. 말해."

소주병을 들어 누나 잔에 한잔 따라주고

비어있는 내 잔에도 소주를 담았다

찰랑거리는 소주가 호프집 조명에 반짝였다

소주 한잔을 원샷! 해버리고

속부터 쓰게 올라오는 그 쓴맛을 느꼈다

"누나... 난 있잖아.

살면서 뭔가 바래보거나 열망해본적이 없는거 같아

되게 뭔가를 하고싶다거나, 갖고 싶다거나 그런것도 없었고

그냥 평범하고 무난한 생활을 쭉 했었어

여태 재밌었던 기억도 그다지 없었고, 특별한 것도 없었던거 같아"

아까는 누나가 말했고

내가 듣기만 했었다.

지금은 내가 말하고 누나가 듣기만 했다.

"평범한 사람이 특별해지는거 쉽지는 않더라

해본 사람이 뭔가를 또 해본다고, 난 그게 잘안되더라고.

처음에 말야, 누나랑 딱 대화를 나누는데. 그 있잖아 쪽지 나한테 줬을때.

난 그 쪽지 하나에도 떨리고 설레고 그랬어

누난 몰랐겠지만 말야.

알잖아 누나가 좀 예뻐야지.

나 까페에 사람들 사진 돌아보면서 누나가 제일 예쁘다 생각했거든

근데 누나가 딱 쪽지를 주는거야 ㅋㅋ 상상이가? 그때 내마음?"

쌓여있던 무언가가 풀어지듯

말이 막 나오기 시작했다

"그냥 쪽지만 나누고 그래도 좋더라고.

얼굴도 제대로 못봤는데 그냥 대화만 가끔 하는것도 좋았어

근데 그거 그 뭐냐,

인터넷으로 사람 만난다는걸 주변에서 좋게 보지는 않잖아

게다가 우리가 막 사랑에 빠진 남녀도 아니고 그냥 대화만 하는 누나 동생인데

핸드폰 번호 물어보는것도 쉽지 않더라고

누나가 나 막 이상하게 볼까봐. 혹시 얘가 찝쩍대는건 아닌가 오해할까봐.

그래서 그것도 못 물어보고 그냥 새벽에 누나 들어오는것만 기다리고 일하고 그랬어"

목이 탄다,

물이 필요해

"정모갈때 누나 안나오면 사실 안갈라 그랬어

가서 볼 사람도 없고, 나도 누나랑만 친하잖아.

다들 뭐 인사도 하고 다니고 친한척 얘기도 주고받기는 했는데

누나처럼 친근하고 보고싶고 그런 사람은 없었어

정이누나는 뭐... 먼저 막 살갑게 대하고 그러니까 쫌 더 친해지기는 했지

나 핸드폰 번호도 누나꺼밖에 몰라 ㅎㅎ"

누나는 별다른 움직임없이 내 얘기를 듣고 있었다

가만히 나를 바라보는 누나는... 참 예뻤다

정말 예뻤다

"누나랑 잘해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안해본건 아닌데

솔직히 그 생각을 오래 할수는 없겠더라...?

막 그런거 신경을 안쓰고 싶어도 그렇더라고

누나는 직장인이고... 나는 학생이고... 누나말처럼 난 또 군대를 가고..."

"군대..."

"...그러게 군대. 2년이 짧은건 아니잖아

누나는 게다가 예쁘고 좋아해줄 사람도 많은데

나같은애 군대 간다고 기다려주면 누나 2년이 너무 아까워"

마음은 아닌데

마음은 정말 아닌데

내 머리는 누나를 거절해야 한다고...

이 일생일대에 한번 찾아올까 말까한 기회를 차버려야 한다고...

그렇게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맞는 대답 같기도 했고...

#

"누나, 누나는 되게 예쁘고 그런데 왜 나를 좋아한다고 그럴까...?"

그러게나 말이다

왜 나를 좋다고 하는지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여자라도 나 좋아하기는 쉽지 않을거 같은데

쌩판 남이나 다름없는 누나는 내가 좋단다.

누나에게서 왜 내가 좋은지를 듣는게 목적이였다기보다

누나에게, 나 좋다는 말을 한번 더 듣고싶은 마음에 물었다

참 이기적인게

그냥 그 말이 막 듣고싶었다

내가 좋다는 그 말이 마구마구 듣고싶었다

그러면 이렇게 쿵쾅대는 내 마음 조금 진정이 될거 같았고

누나가 무슨 말이라도 더 꺼내준다면... 그래준다면...

...

첫사랑 때는

사랑이 이런건가 싶었다

 

떨리는 마음에 고백을 했던 그 순간이

찐하게 남아 오래도록 남았었는데

비록 그 끝은 참담했을지라도

그 날의 그 고백, 그 날의 그 공기 흐름들은

잊혀지지가 않았다.

 

오늘, 그런 찌릿함이 마음속을 헤집어 놓고 있는중이다.

 

희정누나는

술잔을 만지작 만지작 하며 입이 마르는지 간혹 물을 들이켰고

혀로 입술을 적시기도 했다

 

적막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정우야, 누나는 있잖아.

남자가 남자다워야 남자라고 생각해.

그 스토커 기억하지? 그런 애들은 남자같지도 않잖아 그치?

그 사람이 아무리 잘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위치에 있어도

속으로는 그렇게 찌질한 생각을 하고 사람들을 대하는데

어떻게 그런 사람에게 정이 가고 마음이 가겠어

너는 말야. 참 착하고 마음이 깊어.

남자로서의 매력도 충분해, 왜 그렇게 자신감이 없어?"

 

뭔가가 울컥울컥 하는거 같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정말 그런 진실함이 담긴 말.

 

"어리면 어떻고, 학생이면 어때, 백년만년 학생일거 아니잖아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너도 직장인이 될거고

조금만 있으면 군대같은거 옛 추억이라 생각하며 웃고 있을거고

우리가 더 좋은 사이로 발전하게 될지 어떻게 알겠어"

 

입이 떼지지 않아서...

침만 꼴깍 삼켰다...

 

"정우야, 누난 참 너가 좋아."

 

"누나..."

 

"여자가 먼저 고백하게 만드는거야? 정우 기술 좋네

선수였네 선수였어 ㅋㅋ

아닌척 순진한척 다 하더니만 선수네~"

 

"... 선수는 무슨. 누가 들으면 비웃겠어"

 

"아무튼 그래. 너 곧 군대가는 것도 다 알고

너 나보다 어린것도 알고, 니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잘 알겠어

그래서 넌 어떻게 하고 싶은건데 응?"

 

참 못났다 진짜

난 참 못난거 같다

 

누나가 저렇게 당차게 얘기하면서도

입술이 떨리고 말투가 떨리는게 느껴졌다

 

저렇게 떨면서도 또박또박 말하는게 보이는데

이것저것 핑계대며 내 마음의 안정만 찾았던게 참 한심했다

계속해서 핑계거리를 찾고, 두려워만 했던게 바보같았다

 

대답은 정해져있는건데.

 

 

"누나, 누나야"

 

"으응... 정우야."

 

또 목이 탄다 또.

목이 타고 입이 마르고 이생각 저생각 이것저것생각 오만생각 다 들었다

 

얼마 마시지 않았던 탓에 취기는 없었지만

분위기가 나를 취하게 했고

누나의 말들이 나를 취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취한채로 누나에게 말을 건낸다.

 

"누나야, 난 말야.

누나같은 여자를 만난다는걸 생각해본적이 없어서 말야

이런 상황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잘 모르겠어

게다가 오늘은... 이런거 생각도 못했었고.

막 되게 떨려 지금 온몸이 막 떨리는거 같아"

 

쓸데없는 말이 나왔다

하고싶은 말은 이게 아닌데.

 

"희정누나 나는..."

 

말이 잠시 턱하니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심호흡을 하고 한숨 한번 쉬고... 한숨 두번 쉬고...

말을 이어간다

 

"누나 나는, 누나가 저~~~~엉말 정말정말 좋아

미친거 같아. 누나 생각만 하더라고 요즘.

누나 보고싶고 만나고싶고 누나랑 함께있고 싶고

군대도 가기 싫더라? 누나랑 더 있고 싶어 막"

 

얼굴이 달아오른다

창피해...

 

"막 이기적인 생각도 들었어

2년동안 누나가 기다려주면 참 좋겠다는 그런 생각

그렇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런 생각

누나가 다른 남자랑 만나는거 생각만해도 싫어

그 스토커 얘기할때도 내 여자 건드리는거 같아서 싫었어

나만 만나야 하는데, 나만 누나 좋아할 수 있는데...

그냥 누나는 나랑만 알고지내야 하는데... 그런거 말야"

 

이왕 이렇게 된거 다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하게 모든걸 다!

 

"누나 나만 만나야해.

다른 남자에게 뺏기기 싫어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설움을 내뱉듯 거침없이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참 어설프고 오글거리고 고백같지도 않은

사랑을 속삭이기보다 분에 차 사랑을 말해버리는 그런 말투였다

 

"누나 좋아해. 좋아한다고... 정말 좋아해..."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왜 그랬지 바보같이

그치만 울지는 않았다, 살짝 눈시울이 시큰해졌을뿐

 

"2년만 기다려줘. 금방 갔다올게......"

 

정말 하기 싫었던 말을 꺼냈다

기다려달라는 그 말을....

 

반대로 생각해봤다

누나가 어디론가 2년동안 떠나있고

연락도 제대로 안되고 잘 볼수도 없고

나는 혼자 남겨져 있는 그런 상황을.

 

... 고문이였다 그건 진짜

 

지금 문자를 보내놓고 답장을 기다릴때도

답장은 언제오는지 수시로 확인하고

누나가 혹시 못 읽은건 아닌가, 바쁜데 피해를 주는건 아닌가,

핸드폰이 꺼졌나? 내가 할말이 없게끔 문자를 보냈나?

그런 걱정을 하며 시간 보내는것도 미치겠는데

 

그보다 더한 상황속에 2년을 기다려야 한다는게

... 더럽고 치사하고 거지같았다.

 

누나는 나를 바라봤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 얼굴은

복잡미묘한 얼굴로 싱글생글 웃고있었다

 

희정누나는

단발보다는 조금 긴 생머리였고

검은색보다는 갈색에 가까운 머리색을 가졌다

입술은 얇은편이였고, 쌍커풀이 없고, 눈은 땡그랗고

볼에는 보조개가 한쪽만 들어가는 그런 얼굴이다

 

웃을땐 오른쪽보다 왼쪽 입꼬리가 더 올라가고

눈꼬리는 아래로 조금 쳐져서 순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무표정은 거의 없고 웃는 얼굴이 매력적이였는데

 

그런 매력적인 누나가

나를 보고 싱글생글 웃고있었다

 

가슴이 막 뛴다

좋아한다는 말을 한 여운이 지나가기도 전에

누나가 나를 보고 웃는 그 미소때문에

가슴이 더 막 뛴다

 

"그래, 정우야. 기다릴게."

 

기다려볼게도 아니고

기다릴게. 라며 누나가 말했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기다린다고 그랬다

 

누나가

 

희정누나가

 

내가 좋아하는 희정누나가

 

나를 좋다고 말하던 희정누나가

 

기다린다고 그랬다

 

기다리다. 라는 그 말이

그렇게 아름다운 말이고 감동적인 말인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기다린다는 누나의 말을 듣고 내 기분은

뭐라 표현이 되지 않는다.

 

기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 그냥 마냥 좋기도 하고

 

테이블 위에 있던 누나의 손이

천천히 테이블을 가로질러 내 곁으로 왔고

이내 내 손 위에 포개졌다

 

내 손등에 누나의 손이 겹치고

난 손을 돌려 손바닥으로 누나의 손을 맞이했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온기가 느껴지고

만지작 만지작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무슨 말을 해야할거 같은데

도대체 이런 상황에선 무슨 말을 해야하는지...

 

그냥 누나 손만 잡고 있었다.

 

그래도 남자손이라고 제법 거칠었던 내 손에 비해

누나 손은 보드랍고 얇았다

내 손이 큰 편은 아니였는데 그런 내손보다도 작았다

몰랐었다 누나의 손이 이렇게 작을줄은

 

테이블을 사이에 둔 우리는

잠시동안 그렇게 손을 잡고 시간을 보냈고

아무 대화도 안하고 쳐다보기만 했지만

어색은 커녕 자연스럽게 서로를 생각하는거 같았다

(특히 나는... 그 시간이 정말 그랬다)

 

영남대 근처는

그쪽에서 꽤 잘나가는 술집거리의 하나였고

시간이 늦어감에 따라

조용한 호프집도 이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많은 사람이 자리한 호프집은

젊음의 열정과 몇 연인들의 애정, 친구끼리의 우정을 동반하며

더 시끌시끌 해졌다

 

누나가 자리를 옮기자며 일어났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하려는 누나를 막고

지갑속에 있던 현금을 내밀었다.

 

"누나, 저번에 그 바에서 누나가 샀잖아

오늘은 내가 낼게

나 월급도 받아서 두둑해

얻어먹기만 하지 않는다고"

 

"정우가 사주는거니까 얻어먹어 볼까?"

 

나름의 시위였다

나도 이정도쯤은 계산할 수 있다는걸 보여주고 싶었다

 

호프집을 나서자 거리는

가을이 제법 깊어졌다는걸 알리듯 꽤 쌀쌀했다

 

거리의 사람들에게 이제 반팔은 찾아볼 수 없었고

두꺼운 옷을 입은 사람도 종종 보이고 있었다

 

누나는 "아 춥다..." 라며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와 팔짱을 꼈다

 

누나는 향수를 뿌리지 않았는데 (지금도 그렇다)

그래도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샴푸인가?

 

우리는 잠깐 걷기로 했다

그 근처에 딱히 걸을 만한 곳이 있지는 않았지만

밤거리를 걸어보기로 했다

 

팔짱을 끼기도 하고

손을 바꿔 잡기도 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기도 하고

걷는 동안 그렇게 히히덕 거렸다

 

대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실 연인끼리는 무슨 대화를 하는지 통 모르겠어서

할말이 없었던거 같다

 

그냥 걸으며 온기를 느끼고

옆에 누나가 있구나 하는걸 느끼면서

기분 좋게 걸었다

 

또 다른 호프집에 2차를 가기보다는

시간도 늦고 밤공기도 차갑고 해서

누나를 집에 데려다주기로 했다

 

영남대 거리에서 택시로 5~10분정도 걸렸던 누나의 집은

걸어서 30분쯤 걸리는 곳에 위치했고

30분은 무슨 한시간이 걸려도 걸을 수 있을거 같았다

 

"정우야, 오늘 참 좋다."

 

"그러게... 난 진짜 생각도 못했는데

오늘이 이렇게 기억에 남는 날이 될줄은 몰랐어"

 

"생각도 못한거야 아님 생각은 했는데 접은거야?"

 

"생각은 했지. 근데 접었지. 접을수밖에 없었잖아~"

 

"그런게 어딨어 하면 하는거고 아님 마는거지"

 

"그래서 했잖아, 좋다고"

 

"내가 먼저 말해서 한거 아냐? ㅋㅋ 나 아니면 말이나 했겠어 어디?"

 

그건 그랬다

누나가 먼저 한발짝 다가서지 않았다면

난 두발짝 떨어져서 바라보기만 했을지도 모를 일이였다

그리고 후회했겠지

 

일부러 천천히 걸었던건 아니였다

동네 공원에 잠깐 들르기도 하고

지나가다 보이는 다리 위 야경을 감상하기도 하고

신호가 보이면 차가 없어도 파란불 꼬박꼬박 지키고

그러다보니 30분 걸려야 할 그 길이

40, 50분은 걸려서 도착하게 됐다

 

누나네 집 근처는 깜깜했다

간혹 보이는 가로등만 보였고

시끄러웠던 옆동네와는 달리 고요했다

 

누나를 보내기 싫은 마음 간절했지만

시간이 늦었기에 누나를 보내기로 했다

 

집이 얼마 남지 않은 골목길

그리고 사람소리 하나 안나는 적막함

가로등 빛이 꿈뻑거리는 그 거리

 

깍지 낀 두 손에 닿는 밤공기

 

하나하나 새기며 누나의 집앞으로 향했다.

 

친구들 집은 가끔 놀러가봤지만

여자친구(..)의 집앞을 가보는건 새로운 경험이였다

그 뭐랄까

바래다주다라는 그런 남자친구의 특권을 행함과 동시에

집도 알려줄만큼 친숙해졌다는 느낌을 받는

남자친구로서의 의식을 성공적으로 치뤘다는거랄까

 

모르는게 너무 많은데

하나하나 알아가는 그 과정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내가 아는거라고는

누나의 나이, 이름, 성격, 직업이 전부였고

그 외에는 뭐를 좋아하는지 뭐를 싫어하는지도 몰랐다

 

, 누나가 고양이를 키운다는건 알고 있었다

경산의 본가는 아니지만 서울의 집에는

외로움을 달래주려 고양이 두마리를 키운다고 했다

 

누나가 내게 동물 좋아하냐고 물었을때

좋아는 하지만 키우지는 않는다라고 대답했던적이 있는데

누나가 그때 반려동물의 필요성과 장점을 열심히 어필하며

내게 열변을 토했던적이 있었다

그때 고양이를 키운다는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나도 고양이를 좋아해야겠구나' 라는 생각도 한적이 있다

뭐 귀엽기는 했으니 괜찮을거란 생각도 함께

 

"이제 정말 며칠 안남았네.

괜히 내 고생을 내가 사서하는거 같아

무를까? 우리 만나기로 한거 무를까?"

 

"아예 시작안했으면 모르는데

시작했으면 무르는거 없는거 몰라?

이제 나만 바라보는거야 누나는"

 

장난스럽게 얘기하는 누나의 물음에

나는 정색하며 대답해줬다

 

정말 그랬다

시작도 안했으면 모를까

시작을 이미 한 이 시점에

누나는 누나이기보다 여자였다

 

놓치기 싫은 여자

 

누나네 집은 빌라였는데

주변에 비슷하게 생긴 집들이 많았다

누나는 외동딸이라 형제가 없었고

집에는 부모님 두분이 계시다고 했다

오랜만에 내려온 딸인데

그 귀한 시간을 내가 독차지하고 있다는게 미안했다

아니, 사실은 하나도 안 미안하고

더 독차지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겠어 집에는 보내야지

 

"내일 또 보면 되지

어차피 내일 누나도 쉬는날이고 딱 좋네

누나 눈 좀 붙이고 와, 맨날 일하느라 고생하는데"

 

누나는 한차례 내 손을 꼭 잡아준뒤에

이끌리듯이

내 품에 안겨왔다

 

품에 안기는 누나의 어깨를 감싸며

누나를 더 내 품 가득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향기롭고 두근거렸으며

왜인지 모를 한숨이 나왔다

 

가녀린 누나의 몸이 떨리는게

추워서만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내몸도 그렇게 떨고 있었을테니까.

 

얼마간을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을까,

 

"누나 이제 들어가자, 춥다"

 

점점 추워지는 바람에 누나가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됐다

소중한 사람인데 아프면 안되지...

 

누나와의 긴 안김에서 떨어지고

빌라 입구의 문이 열리고

올라가는 계단의 불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걸 보고

열쇠 소리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난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돌아서는 내 품안에는

아직 누나의 그 향기가 나는듯 했다.

누나의 그 온기도 함께.

 

주말은 왜 이틀밖에 되지 않는지

하고싶은건 많은데

할수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누나는 다음날 출근을 위해

다시 올라가야했고

나도 같이 올라가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목적지가 따로 없었으니까

 

정장 비슷한류의(블라우스에 치마??)

옷 입었던 누나만 봤었는데

평범한 바지에 티를 입은 누나를 보니

누나라는 이미지가 확 가시는거 같았다

 

얼굴도 어리게 생겨서는

다른 누가 봤을때 우린 연상연하 커플이 아닌

최소 동갑, 아니면 내가 오빠로 보일지도 모를 일이였다

 

어제는 추위를 핑계로 팔짱을 꼈다면

오늘은 너무나 당연하다는듯이 팔짱을 하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빠른 기차를 타면 두시간이면 서울에 도착이였고 느린걸 타면 네시간 이상은 걸려야 했다

우린 조급해하지 않았다

 

느린 기차 승차권을 들고

경산역 벤치에 앉아 가만히 기차를 기다렸다

 

간이역처럼 소규모의 경산역은

그 자체로 그림같은 풍경을 제공해주었고

어제는 대구역이 뭔지 경산역이 뭔지

신경 쓸 틈 하나 없었지만

마음부터 여유롭고 풍요로운 오늘은

옆에 심어진 나무 하나, 풀 하나에도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시골같지? 누나 여기서 태어나고 자랐어"

 

"도시보다 더 운치있는데 왜

나도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어

어릴때는 시골도 많이 놀러가고 그랬는데

할머니 돌아가시고는 갈 일이 없네"

 

"어쩐지 시골사람같더라니... 맞네 ㅋㅋ"

 

"...시골사람 같은건 뭔데?

나 사투리 같은거 안써서 다들 서울사람인줄 알건데"

 

"... 왠지 정겹고 가깝고 따뜻한 그런거

그런 시골사람같아"

 

"시골사람 맞아 그럼. 정확하네 ㅎㅎ"

 

어떤 대화를 한들 즐겁지 않았겠냐만은

'여자친구'라 의식하고 대화를 나누다보니

즐거움 두배, 기쁨 두배 였던거 같다

 

마주잡은 두 손을 보는데

참 보기 좋았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자 기차가 도착했고

철컹철컹 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서울행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차의 좌석은 넓지 않아서

둘이 딱 붙어 앉아 있으면 적당한 느낌이였다

누나가 창가에 앉고 나는 통로쪽에 앉았다

희정누나가 살포시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나는 조금 누나쪽으로 몸을 움직여 누나가 기대기 쉽게 해준다

 

그 상태로 대화를 나누는데

기차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그렇게 큰데도

누나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너무 잘 들렸다

 

우리는 주변에 피해가 갈까봐

조근조근 둘만 들리게 대화를 했는데

숨소리도 간혹 들리고 숨결도 느껴지고 하는게

그게 참 좋았던거 같다

 

가다 잠시 졸기도 하고

이내 다시 깨서 대화도 나누고 하다보니

길것 같았던 네시간은 금방 흘러

어느덧 서울역에 도착하게 됐다

어디를 가야겠다고 정해두지는 않아서 잠시 고민을 해야했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누나가 더 잘 알기에

누나가 이끄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서울이 괜히 서울이 아니었던게

그나마 지방에서 큰도시 축에 끼던 우리동네가

이곳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다

 

흔히 '시내'라 불리던 잘나가는 거리가

여기에는 한두개가 아닌 수십개는 있는듯 했다

어디로 가야하나를 고민하는게 아니라,

어느곳으로 가야 재밌게 노나 고민하던 누나는

이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인따라 산책하는 강아지마냥

쫄래쫄래 누나를 따라가는데

어쩜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눈에 띄는지

참 예쁘고 곱고 그랬다

 

초등학교 5학년때 담임선생님이

정우는 나이답지 않고 의젓하고 사려깊으니까

나중에 좋은여자 만날거라 해주던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선생님은 역시 아무나 하는게 아닌가보다

선견지명이 있으셨던 강윤정 선생님이

갑자기 보고싶어졌다

찾아가야지 가야지 하다가 안갔던 못난 제자를

선생님은 기억이나 하실까 싶다

그래도 반장이였고 선생님 많이 도와드렸는데,

이름정도는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나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곳은

한강이 보이는 그런 곳이였다

(이름은 기억이 잘 안난다)

 

공원처럼 생긴곳인데

삼삼오오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모여있었다

돗자리를 피고 자리한 사람도 있고

벤치에 앉아 서로에게 기댄 사람도 있고

많은 인원이 동그랗게 둘러앉은 곳도 있고

 

다들 즐거워 보였다

 

"여기 한번 오고싶었어 남자친구랑.

친구랑은 몇번 와봤는데 좋더라"

 

"강도 보이고 사람도 많고 뭔가 흥겹네 여기"

 

"이따가 노을지고 야경 보이면 더 이뻐

지금은 그냥 바람쐬고 하는것도 괜찮아

정우 너랑 오니까 되게 좋다~"

 

"난 누나랑 있으면 어디든 좋을거 같아 ㅎㅎ"

 

"오글거려 ㅋㅋ"

 

사람들은 대부분 먹을거리를 옆에 두고 있었다

과일, 과자, 고기, 간단한 분식 등

먹을거리와 마실거리를 함께하며

소풍같은 분위기 속에서 여가를 즐기는듯 했다

 

겪어보지 못했던 신세계가 눈앞에 있었다

이런건 학교에서 놀러가야지만 했던건데

도심 한복판에서 이런 광경이 펼쳐지는게

놀랍기만 했다

적은 면적도 아니고 대충 눈에 보이는

한강의 옆면이 사람들로 다 가득했다

 

"우리도 자리 잡자"

 

누나는 신나보였다

나도 신나보였을거다

살짝 흥분해 있기도 했고.

 

이런게 데이트인건가 하는 그런 느낌에

제정신은 아니였다

 

강길을 걷다 비어있는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밤보다는 덜 추웠지만

강 주변의 바람은 차가움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걸치고 있던 옷을

누나에게 덮어줬다

 

이정도는 기본이지 라는 얼굴로 누나에게 눈빛을 날렸고,

누나는 코웃음치며 옷에 파고들었다

성의는 잘 받아주겠어와 같은 도도한 표정.

 

한강이 앞에 있어도 여기가 서울인지 어딘지

장소는 멍하니 잊은채

누나와의 시간을 만끽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먼 하늘 구석에서

노을이 다가오며 손짓하기 시작했다

 

누나가 말했던 것처럼

한강의 노을진 야경이 펼쳐지고

혼자라면 느끼지 못했을 감동과 함께

 

옆에 있는 이 여자가 내 여자라는 사실이

고맙고 감사했다

 

 

"정우는 여자친구 사귀면 뭐 제일 해보고 싶었어?"

"글쎄... 딱히 생각해보거나 뭐 해야지 했던건 없는거 같아.

같이 밥을 먹어도 좋고, 걸어도 좋고, 그냥 만나서 같이 있으면

그게 다 좋을거라고만 생각했지"

첫사랑이였던 예전의 그녀는

학과에서 인기가 많았고 동아리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예쁘지는 않았는데 유독 그랬다

친구들 모임에 자주 불려 나갔고

친구들과의 사이가 어찌나 좋은지 약속이 없는 날이 없었고

나를 만날때도 친구와 같이 만나면 어떻겠냐며

, 또는 넷이 만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내 친구의 친구였던 그녀와 가깝게 된 계기도

친구와 함께 있던 술자리에 그녀가 합석하게 되서 그런거였는데

집이 가깝기도 했고 우연히 같은 강의를 들으며 친해지게 됐다

이성과의 접촉이나 만남이 거의 없었던 내게

그녀는 어떤 부담도 없이 호감으로 다가왔고

만남의 빈도가 잦아지고 집 근처에서 가끔 만나고

단둘이 만나게 되는 일이 한두번 있게 되면서

내게 사랑으로 다가왔었다

그렇게 다가와서는 별다른 추억이나 인연도 없이

세달을 채우기도 전에 떠나갔더랬다

일전에 언급했듯이 내 친구도 그때 같이 떠나갔다

그런 내게

여자친구와 무언가를 한다는건

어떤걸 하든지 로망이요 기쁨인건 당연한 것이겠다.

누나가 내 옆에서 꼼지락 꼼지락 거리며 몸을 움직이는 것만 봐도 좋은데

뭔가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그 뭔가는 음... ...

남들 다 하는 그.... ... 뽀뽀 라던가

아니면 입술끼리 부비는거라든가

내 입술이 누나 입술에 닿는거라든가

, 아니 굳이 입술이 아니여도 볼에라도 닿는거라든가 하는

뭐 그런거 말이다

뽀뽀가 아니여도 쪼옥 하는 그런거 있잖아 그거

"누나는? 누나는 뭐 하고싶었는데?"

"......................."

누나는 전 남자친구랑 오랜 시간을 사겼으니까

많은걸 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해봤던걸 찾는게 더 어렵겠지

안해본게 있으면 나랑 해보면 되는데 말야

전 남자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으려해도

소심하게 툭툭 심장이 얼큰한거 보니

되게 이해심 많고 착하기만 하지는 않은가보다 나는.

누나의 대답이 나오기까지

굉장히 짧은 시간에 불과했는데

난 그 짧은 시간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한거 같다

비록 누나랑 나랑 맘이 잘 맞아서 지금 이렇게 부비작 거리고 있지만

현실인듯 현실이 아닌 이 붕 뜬 마음은

아무리 가라앉히려해도

몇백개의 조각 중 한두개는 송곳처럼 날카롭게

"더 깊어지기전에 그만두는게 어때!" 라며 콕콕 찌르고 있었다

그때마다 "닥쳐" 하며 깊이 묻어두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아무리 좋았어도 난 아직 그 좋다라는걸 감당하기엔 어렸던거 같다

됐고, 누나가 말을 이었다.

"오늘은 그냥 이렇게 강 바라보다가 얘기하다가 걷다가,

그러다가 집에 가자. 다른건 안해도 괜찮을거 같아."

"응 나도 딱히 뭔가 하고 싶지는 않아

아직 누나랑 이렇게 있는게 실감나지도 않고

누나랑 손잡고 팔짱끼고 이렇게 계속 있고 싶어"

"춥겠네 우리 정우. 누나한테 이거 벗어줘서.

이제 두꺼운 옷 슬슬 꺼내서 입고 다녀야겠어"

"누난 약하니까 잘 챙겨입어야돼

이 마른것좀 보라고, 살 좀 쪄야겠는데"

"정우가 아직 뭘 몰라서 그러는데 숨겨진 살들이 많아

이게 다 여자의 비밀이라는거라구 ㅋㅋ"

"숨길데가 어딨다고 숨겨졌대 ㅋㅋ 웃기시네 아주

좀 더 쪄도되니까 다이어트니 뭐니 굶거나 그러지 말라고

잘먹어도 모자란판에 다이어트는 무슨"

누나랑 쪽지를 나누며 알게 된 사실중에 하나는

누난 맨날 다이어트를 해야한다느니

오늘 뭘 먹었는데 이게 몇 칼로린데 어쩌구 하는

참 말도 안되는 걱정이 있다는 거였다

실제로 누나는 그냥 보통 체형이라

다이어트는 커녕 간식 야식을 챙겨먹어도 될거 같았다.

"모르는말씀, 여자는 평생 다이어트 하는 동물이야"

전혀 공감이 가지 않았지만

일단은 끄덕끄덕.

노을은 많은 시간을 우리에게 할애해주지 않았다

노랗고 붉던 하늘은 금세 까맣게 칠해지기 시작했고

주변은 이내 가로등 빛만이 보이고

주변 사람들의 모습은 흐릿해지고 있었다

가로등 밑에 있는 사람들은 멀리서도 더 잘 보였지만

일부 빛이 비추지 않는 곳은

그저 깜깜히 누가 있다는 것만 짐작이 될 뿐이였다

나랑 누나가 있던 벤치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 있어서

빛이 있지도 않은 없지도 않은 애매한 자리였다

은은한 빛이 비추는게 더 운치있게 느껴졌다

아침부터 계속 잡고 있던 손인데도

질리거나 손을 놓고 싶다는 그런건 없었다

더 오래 잡고 있고 싶고,

많은 시간을 더 이 손과 같이 있고 싶었다

작도 보드랍고 말랑말랑한 누나의 손

가만히 잡고 있다가 만지작 만지작 꿈틀대본다.

손등을 쓰다듬고 손바닥을 간질이고

손목을 잡아보고.

그러다 손을 등 뒤로 돌려

누나를 감싸안는 형식으로 어깨에 손을 걸치고

내쪽으로 누나를 조금 당겨봤다

"춥지?"

식상한 멘트는 아니였을까.

"얼마 살지는 않았는데

누나랑 함께했던 요 몇달이, 그리고 요 며칠이

내 생애 제일 즐겁고 행복한 날인거 같아

이런 마음 느끼게 해줘서 고마워 누나"

"누나도... 누나도 그래 정우야"

"나 잘 갔다올게. 누나"

"누나가... 배웅해줄게 그날. 연차쓰면 되니까"

"아냐 쉬는날 아닌데 억지로 그러지는마"

와줬으면 싶었다

누나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담아두고 싶은데

차마 오라고 말은 못할거 같았다

누나가 원하는 남자답고 의젓한 모습은

이럴때 오지말라며 씨익 하고 웃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미친...)

"아냐, 누나 그날은 쉴거야. 너 보내고 누나도 좀 쉬고 하면 될거같아

요즘 일 열심히 했으니까 하루정도야 뭐 괜찮아 ㅎㅎ"

"그래...? 그래 그럼"

기뻤지만 티내지 않는 시크함

그건 멋진게 아니라 멋이 없는거라는걸 왜 그땐 몰랐을까

정모때 헤어졌던 그때처럼

기차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누나는 보내야하는

그 순간이 찾아오고 있었다

아침에 경산역을 출발한게 방금 같은데

벌써 어둑어둑한 주변의 모습이라니

시간은 정말 어쩜 이리 야속한거냐...

떠날 시간은 다가오고

떠나기는 싫고

집에는 가기 싫은데 가야하고

누나를 보내기 싫은데 보내야 하는

얄궃은 시간이 계속해서 흘렀다

아쉬운 모습, 침울한 모습 보이지 말자라는 생각에

밝은 음성으로 누나를 부른다

"누나, 가자. 여기 다음에 또 오자. 좋네 여기"

일어나 옷매무새를 다듬고 누나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걸쳐준 옷은 누나 어깨에 다시 안 떨어지게 걸쳐주고

그렇게 쳐다보고 있자니

어제밤이 생각나 누나를 안고 싶어졌다

........ 아니 안고 싶어졌다라고 생각하면서 동시에

누나를 안고 있었다

따뜻했다

등으로는 차가운 바람이 부는데

누나가 있는 내 품은 그저 따뜻하기만 했다

이렇게 누군가를 안아본게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꼬꼬마 어릴때야 어른들이 안아주고 했다지만

커서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봤던 기억이 거의 없는거 같다

남자들끼리는 서로를 안아준다는게 생각만해도 끔찍하고

남녀사이에는 연인이 아니고서야 안는다는게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는 힘들었다

 

서로의 심장이 느껴질만큼 가깝게 안겨있는 우리는

심장소리가 쿵- - 뛰는것과 동시에

숨소리도 후우- 하아- 들렸고

누나의 숨은 내 가슴팍에 맺히고

내 숨은 누나의 머리칼에 이어지는

그런 시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향수도 아닌데 이 좋은 냄새는 뭐냔 말이지

분명 좋은 향기가 난다

내 느낌이 아닌 정말 좋은 향기가.

 

#

 

난 누나를 데려다주고 싶었지만

누나가 바득바득 우기며 자기가 데려다 줘야 한다기에

서울역까지 함께 갈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로망은

좋아하는 여자를 집에 딱 바래다주고

금의환향하듯 돌아서는건데 누난 몰라도 너무 모르는거 같다

그런것도 모르다니 너무해

 

일요일 저녁의 서울역은 사람이 많았다

사람이 많았지만 내려가는 기차의 좌석은 부족하지 않았다

행여나 내가 자리에 앉아가지 못할까 걱정했던 누나는

좌석을 확인하고 티켓을 끊고나서야 안심했다

 

거기서 한차례 실랑이를 벌였는데

기차표를 끊어준다는 누나와

이런건 내가 알아서 한다며 내 기차표 내가 끊는다는

사소한 언쟁이 있었다

 

누나는 뭔가라도 더 해주고 싶은 마음에 그랬다지만

이건 아니다

난 동생이 아니라 누나의 남자친구였고

이런거까지 비호받아야 할 그런 입장은 아니라 생각했다

 

우린 이런거에 꽁할 성격은 아니었기에

그냥 해프닝 정도로 치부하고 다시 히히덕 거렸다

 

장거리 연애라는건

만나지 못해 보고싶어 힘들어하는 것도 있지만

 

만나고 나서 상대방을 보낼때

나는 여기 서서 안녕하며 손을 흔드는데

상대방 모습이 천천히 사라지는걸 계속해서 보는게

그게 참 힘든거라고 그랬다

 

보내고 나서 오늘 즐거웠던 일,

함께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갑자기 서글퍼진다며

보내는 그 순간때문에 힘든게 장거리 연애라고 그랬다

(누가? 누나가)

 

플랫폼에서 둘이 꼭 붙어 있으며

기차가 점점 가까워 오는걸 보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강렬한 기차 불빛이 반짝이고

지면에서부터 공기중까지 기차의 울림과 소리가 들리더니

조금만 지연되서 오면 좋았을 그 기차가

정시에 맞춰 도착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누나를 안아보고 돌아서려 했는데

 

그 찰나에

희정누나가

 

내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더니

자기쪽으로 끌어당겼다

 

저항하지 않고 누나에게 기울여진 내 상체에

누나가 다가서는게 느껴지더니,

볼에 무언가 닿았다고 느끼기도 전에

금방 그 느낌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손을 떼는 희정누나의 얼굴이 보였고

누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을 뿐이였다.

 

기차는 금방이라도 출발할듯이 뿌뿌 거리고 성을 냈고

이게 무슨 상황인가 생각도 하기전에

난 기차에 몸을 싣고는 창밖으로 누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는 기차가 출발하며 내가 창에 보이지 않을때까지

계속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해주었다.

 

그리고 우웅 거리며 울리는 문자.

 

<오늘은 뽀뽀만, 잘들어가 정우야>

 

... 아 누나....

 

남은 시간은 금방 흘렀고

군대에 가야 하는 그 날이 하루 전으로 다가왔다.

 

누나와는 문자도 주고받고 전화도 하고 했지만

역시 우리 사이에 쪽지는 빠질 수 없었다

까페에 접속해 나누는 그 쪽지라니, ~ 참 좋았다

 

우리끼리만 통하는 그런 비밀스러운 암호처럼

까페의 사람들은 모르는 쪽지를 주고받으며

왠지 신나고 유쾌했다

 

그 스토커 생각도 나고 그랬다

내 여자 괴롭혔던 그 괘씸한놈,

내가 이렇게 누나랑 알콩달콩한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짓고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러게 착하게 살아야 복 받는건데 말야

 

입대 전에는 어떤 마음일까 궁금했는데

별반 다를건 없었다

착잡함도 있었고 아쉬움도 있었고

빨리 다녀와야지 하는 속시원함도 있었다

 

누나를 생각하자면

미안함이 제일 많았고

속상함과 고마움...

그리고 불안함이 있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누나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다 할지라도

그걸 미워하거나 누나탓을 하거나

비관해서 쓸데없는짓을 하거나 하지 말자는 거였다

 

내가 누나와 알콩달콩한 관계인걸 아는 사람은 없었다

 

누나는 누나의 절친인 한명에게 말했다고 하는데

나는 친구들에게 누나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군대에 있어 친한 녀석들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주변에서 들었던 많은 얘기들은

군대커플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으므로

혹시 모를 이별을 잠정적으로 생각하며 그랬던거 같다

 

그랬다 나는.

 

누나를 너무너무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누나가 나를 떠나면서 생길 아픔도 생각했고

 

누나가 나를 떠나지 않을거라 생각하면서도

누나가 떠날 그 상황도 미리 마음에는 담아두고 있었다

 

이런 복잡한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없었고

이런 생각을 누나에게 말한다는건 더욱 말이 안됐다

 

그 마음은 나만 알고 나만 간직한채 그대로 묻어두었다

 

입대 전의 그 날,

난 정말 쓸데없는 생각과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희정누나가 너무 보고싶었다

 

그래서 전화를 했다

 

"누나... 보고싶다"

 

"의정부로 간다고 그랬지? 부모님이랑 친구들 인사하고 서울역에서 누나랑 같이 가면 되겠다

누나도 정우 너무 보고싶어... 벌써 내일이네"

 

"연차내지 말라니까 연차냈어?"

 

입꼬리는 올라가고 웃음은 나오는데

괜히 삐죽거려본다

 

"내일 너 보내고~ 누나도 오랜만에 집청소도 하고 이것저것 일 좀 보고 쉬려고"

 

"안그래도... 엄마랑 가족들한테는 역까지만 보자고 그랬어

뭐 그리 멀리까지 같이가냐고 그런거 하지 말라고 그냥 혼자 간다고 그랬어"

 

"ㅋㅋㅋ 누나랑 같이 가려고 가족들한테는 거짓말했네? 어이구 이쁘다"

 

"아니... 거짓말은 아니지. 혼자 가는건 맞는데 누나가 낑기는거야"

 

"누나랑 갈 생각하니까 좋지? 누나 내일 안 울거야

그런 말 있잖아, 군대때문에 눈물보이는 커플은 헤어진다고."

 

"그런건 다 미신이기는 한데. 나도 안 울거야"

 

왠지 모르게 통화하면서 눈물이 날거 같았는데

눈을 깜빡거리기도 하고 힘을 주기도 하며

눈물이 흐르지 않게끔 했다

여기서 울면 무슨 창피야 그게

 

누나랑 핸드폰이 뜨거워질 정도로 통화를 하고

그것도 아쉬워 새벽에 문자도 더 주고 받다가

조금은 자두라는 누나의 말에

정말 조금(두시간?) 자고 아침을 맞이했다.

 

엄마랑 가족들에겐 미안했지만

빨리 이곳을 떠나 희정누나가 있는 곳으로 향하고 싶었고

눈물을 훔치는 엄마와

그래도 훈련소까지는 따라가봐야하지 않겠냐며 말하는 친누나를 뒤로한채

기차에 올라탔다

 

가자, 빨리 가자

빨리 누나를 보러가자!

 

가는 기차에서 어찌나 초조하던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누나에게 사진은 보여줬지만

누나가 괜찮다는 반응이였지만

난 내 모습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안그래도 잘나지 않은 인물인데

머리를 빡빡깎기고 보니 더 못나게 생겼다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멋진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이런 후질구레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게 싫었지만

그래도 오늘 보면 얼마나 더 못볼지 모르기에

빨리 누나를 보고 싶었다.

 

 

누나는 내 머리를 보고 깔깔거리며 웃었지만

귀엽다며 쓰담쓰담 해주었고

웃기게 생긴 내 머리가 부끄럽기보다

누나를 봤다는 그 사실이 내 맘을 안정시켰다

 

오늘도 누나는 예뻤다

정장차림의 누나도 예쁘고

캐주얼하니 편한 복장의 누나도 예뻤지만

원피스를 입은 오늘은

유난히 더 예뻤다

정말 너무 예뻤다

 

"뭐야 왜 이렇게 예쁘게 입었어, 대충 입고 오지"

 

"우리 정우. 누나 예쁜 모습 기억하고 가라고 일부러 더 예쁘게 입었지~

게다가 누나는 뭘 입어도 예뻐ㅋㅋ"

 

"... 그건 인정."

 

의정부는 멀리 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가는 그 시간,

나 말고도 국가의 부름을 받은 청년들이 많아 보였다

 

다들 파르라니 짧게 머리를 잘랐고

가족들과 있거나 연인끼리 있거나 혼자 있으며

그렇게 그곳으로 향하는거 같았다

 

주변을 둘러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누나가 그 많은 사람중 제일 예뻤다

 

친구들이 입대할때도 와보지 않았던 훈련소라

생전 처음 보는 모습들이 눈앞에 있었다

씩씩함이 나타나는건지 두려움이 표출된건지

이상야릇하게 흥분한 청년들이 가득한 그 곳은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며 잊혀지지 않는다

 

키가 큼지막한 군복의 남자들이 크게 소리치며 무언가를 떠들었고

무리 지어 청년들이 이끌려 다녔다

 

누나와 제대로 된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어영부영 누나는 가족들 관람석(?)으로 향해지고

나는 운동장 한가운데로 버려졌다

 

앞에서 뭐라뭐라 떠드는데

난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누나를 찾았고

멀리서도 눈에 띄게 예쁜 누나를 금방 찾아냈다

 

누나가 손을 흔들며 외치는게 보이고

나는 그걸 바라보고 있고

뜨거운 설움같은게 느껴지는 찰나에

훌쩍이는 주변의 모습을 보니

 

울지 말아야겠다는 굳은 생각을 했다

멀리 보이는 누나도 우는거 같지는 않았다

 

화장했으니 울면 안되는데...

누나 고운 얼굴 망가질텐데 하며 걱정이 됐다

특히 마스카라 그거

눈 까맣게 되면서 큰일날텐데.

 

애국가를 부르고 뭐 어쩌구

충성하며 경례 어쩌구 하는 시간을 지나

가족들에게 마지막 큰절을 하라며 제법 계급 있어 보이는 사람이 말했고

설날도 아닌데 왠 큰절이냐며 투덜투덜 하다가

덩치가 산만한 청년들이 단체로 큰절을 하는건 꽤 멋있었다

 

집에서 울고있을 엄마와

그래도 동생이라며 걱정해주던 친누나

 

그리고 눈앞의 희정누나를 떠올리며

큰절을 올림과 동시에

 

이것저것 생각할 틈 없이

운동장의 수많은 청년들은

몇명의 사람들에 이끌려 어디론가 향하게 되었다

 

누나 안녕,

잘 다녀올게...!

 

 

 군대의 유명한 단어중에

'일말상초' 라는 단어가 있다

일병의 마지막 단계부터 상병의 초입 단계라는 뜻인데

 

요 시기에 군대 커플의 90퍼센트 이상이 헤어진다고 해서

일말상초라는게 유래하게 됐다고 한다

 

그딴건 개나 주고.

 

가슴 떨렸던 첫면회, 첫휴가,

가슴아팠던 시기가 다 지나고

 

누나의 곁으로

몸도 마음도 건강히

난 돌아왔다

 

군대의 선임 후임들이 다 헤어질거라고

힘들어도 견뎌내라고 그랬었는데

남들 다 헤어지고 아파하고 힘들어할 때

난 누나의 편지와 목소리로 이겨내며

 

그렇게 2년을 버텨냈다

 

중간에 참 그지같은 꼴 한번을 당했었는데

선임중에 하나가

완전 진짜 쓰레기같은 새끼였는데

 

누나랑 내 사진을 보고

너한테 안어울린다는둥, 지가 만나면 더 잘해줄거 같다는둥

몇살이냐, 나도 친구 좀 소개해달라 지랄지랄을 해대더니

 

누나 나이를 어쩌다보니 공개하게 되고

나랑 6살 차이나고 지하고도 6살 차이 나는걸 알더니 (이 새끼 나랑 동갑)

여자는 20대부터 30대가 어쩌고... 부터 시작해서

상스러운얘기 별 드러운 쓰레기같은 얘기를 바탕으로

나랑 사회가서 연락 자주 하자고 막 앵겨붙었는데

내가 안들어주자 괴롭히고 학대했던 그런 일이 있었다

 

이런게 한두번이 아니었는지 여러번의 신고끝에

그 새끼는 영창 및 다른부대로 전출가고

그 뒤로는 별다른 사고없이 무사히 전역할 수 있었다

 

난 누나 사진을 자랑스럽게 관물대에 붙이고 있었는데,

다들 연상 같지 않다며

동안도 동안이지만 미인상이라고 칭찬이(아부가) 자자했다

 

그렇게 내 자랑이었고 사랑이었던 누나와 함께 한 2년은

길지만 길지 않았고

짧지만 짧지 않은 시간을 지나

 

우리 둘을 더 돈독하게 끌어주고 있었다.

 

#

 

휴가때마다 간간히 누나를 봐왔지만

누나는 나이를 전혀 먹지 않은듯 처음 볼때의 그모습 그대로였다

 

그에 비해 나는

전보다 더 피부가 거칠어졌고 혼탁해졌으며

늙어있었다.

 

"우리 정우, 이제 피부관리도 좀 시키고 관리 좀 해야겠다.

고생 많았어 정말"

 

"이건 관리한다고 나아질거 같지가 않아...

기다려봐, 조금만 더 지나면 내 나이 찾는다니까 이제

누나야 말로 고생 많았지"

 

"진짜 보고 싶은날 많았어, 전화라도 자주 안왔으면 화냈을거야"

 

"나도 누나 목소리 들으면서 견뎠다구 ㅎㅎ 누나 목소리 좋아"

 

가장 걱정이었던 군대도 다녀오고 하니

누나와 나 사이에는 유대감 같은게 형성이 되는거 같았고

그전까지 내 안에 자리했던 송곳같은 불안감들이

이제는 무뎌진채 잠잠해진 상태로 사그라드는듯 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셋, 누나 나이 스물아홉 이었다.

 

군대만 갔다오면 달라질것 같던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주변에서 변했던건 그냥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랄까.

 

길드까페를 통해 만남을 가졌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제일 그랬다

 

좋은 사람도 많은 반면,

본성을 숨긴 나쁜 마음의 사람도 많았나보다

 

누구는 누구에게 사기를 당해서 난리를 치기도 했고

여자 관계가 더러운 누구를 고발하기도 했고

싸움이 나서 관계가 틀어진 몇몇도 있었고

좋은 관계로 발전해 결혼에 성공하고 애기도 낳고 하는 그런 인연도 있었다.

 

누나랑 내가 만난다는걸 아는 까페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내가 알기론 정이누나만 알고 있었던거 같다.

 

정이누나가 알게 됐던건

희정누나와 정이누나 둘이 만나던 자리였는데

그때 우연히 내가 전화를 걸게 됐고

수화기로 얼핏 들리는 목소리가 나인거 같은데

사랑해~누나 보고싶어. 하는 소리가 들리길래

희정누나를 콕콕 찔러서 누나가 실토해서 알게됐다고 한다

 

숨길 생각은 없었지만 알려서 득될것도 없기에

굳이 알리지 않았던 우리는

정이누나가 알게 된 후로 셋이 만나기도 했었다

 

정이누나는 그랬다

난 참 운이 좋은 놈이라고.

희정누나를 누가데려가나~ 했는데, 니가 데려가는거냐며

재수좋은놈이라고 그랬다

 

정이누나는 맨날 그랬다

자기가 희정누나만큼만 예뻤더라면 지금 이꼴은 아닐거라고

정이누나를 알고 2년이 넘는 시간동안

누나는 남자친구가 세번도 넘게 더 바뀌고 했는데

항상 남자가 쓰레기, x, x놈 이었다 (고 한다)

 

"그러게 우리 정우 같은 남자를 만나야지~

이상한 남자 좀 그만 만나고"

 

"아 언니, 그게 내 맘대로 돼??"

 

정이누나는 술만 조금 줄이면 참 매력적일거 같은데

그 말은 입밖으로 하지 않았다.

 

정이누나와

내 자기 희정누나랑 대학로 근처의 호프집에서 간단히 한잔 하고는

정이누나는 2차 약속이 있다고 하고 가버리고

누나랑 나 둘이 가볍게 한잔 더 하기로 하고 거리를 걸었다.

 

이제는 누나의 손이 내 손에 얹혀있지 않으면 어색했다

 

자연스럽게 깍지를 끼고

자연스럽게 팔짱을 하고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하고,

누나의 허리에 손을 감고,

 

가끔 누나랑 눈이 마주치면 배시시 웃고

그러다 가볍게 쪽 뽀뽀도 하고

 

그렇게 거리를 걸었다

 

가볍게 뽀뽀를 한다는게

참 자연스러웠지만 이렇게 되기까지가 오랜 시간이 걸린거 같다

 

그러다 문득, 첫 키스를 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상병때의 휴가의 그때,

 

그날도 어김없이 누나를 만나

영화도 보고 맛난것도 먹고 산책도 하고

그러다 호프집에서 술도 한잔 하고 그랬었다

 

그리고 또 평소랑 다름없이

누나를 데려다주는 그 길이였는데

 

누나 잘가- 하며 누나를 보내는 그 순간

누나가 나를 확 잡아챘다

뭔가 울상이고 분에 찬 얼굴이었다

 

왜 그러지...?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누나가 말을 이었다

 

"되게 속상해 정말.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나봐?

저번 휴가때도 그렇고, 그 전 휴가때도 그렇고

이번 휴가때도 그렇고.

먼저 뽀뽀하는것도 없고 내가 뽀뽀해줘야 하고

막 눈치를 줘도 눈치 채지도 못하고 둔하기만 하고!!

누나 오늘 되게 예쁘게 차려입었는데,

입술에 윤기도 흐르게 했는데

자꾸 입술도 쳐다보고 눈치도 줬는데 하나도 몰라 진짜"

 

".............?"

 

"아 됐어 됐다고!!"

 

아무리 멍청해도

눈치가 아무리 없어도

이쯤되면 알아서 해야한다.

 

앙탈을 부리는 누나를 힘으로 품에 안고

거칠게 다가가서는 서투르게

입술을 마주쳤다

도톰한게 느껴지기도 전에

새콤한 무언가가 느껴지고

긴 시간 숨을 나누던 우리는

행여 누가 볼새라

더 깊은 골목길 어두운 곳으로 자리를 옮겨

아쉽기만 한 첫키스의 여운을 만끽했다

 

첫키스만 20분 한듯.

 

아무튼, 그 이후에는 뽀뽀 쪽 정도는 애교였고

키스도 뭐... 참 좋은 거라는걸 알게됐다.

 

나는 학교에 복학을 했고

누난 직장 생활에 여념이 없었다.

 

누나가 하는 일은 부동산쪽 일이였는데

자세히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도

가끔 지방 출장이라던가 야근이 있고 그랬다

 

야근을 하는 누나를 볼때는 얼마나 안쓰러웠는지

꼭 야근을 해야만 하나 하는 생각이 늘 있었다.

그게 내 다가올 미래인지도 모르고...

 

달콤한 기억 짜릿한 로맨스를 즐기던 우리는

어느덧 연애 3년째를 넘어섰다.

2년은 군대에 있어서 별거 없었지만

그 후의 1년은 정말 꿀같은 시간을 보내며 지냈다.

 

동해부터 남해, 서해는 다 돌아보고 다녔고

지방의 이름난 도시는 시간나면 놀러가고 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해남인데

거기는 음... ...

코나의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라는 노래 제목으로 설명을 대신하기로 한다.

 

여느때와 다를거 없는 누나와의 만남,

누나는 여전히 예뻤고 사랑스러웠으며 미친듯이 좋았다.

 

누나가 말을 한다.

 

"자기야."

 

"응 자기"

 

우린 정우/누나 라는 호칭과 자기/자기 라는 호칭을 번갈아 가며 썼는데

누나가 정우라고 부르면 누나라 답해주고

자기라고 부르면 자기라고 답해주고 그랬다

특별한 뜻이 있었던건 아니고 둘다 좋았다.

 

"혹시 그런거 생각해봤어?"

 

"어떤거?"

 

"우리가 결혼하고 애를 낳고 하는 그런거"

 

생각을 안해본건 아닌데

진지하게 깊이 파고들었던건 없는거 같다.

 

"나 이제 서른살이고.

일도 고정적이지가 않고 그렇잖아

이쪽 일이 그래, 없으면 확 없고 있으면 잘되고.

자기랑 진지하게 미래 좀 생각하면 좋겠어."

 

물론 생각은 늘 있었다

같은 20대일때와는 다르게 20대랑 30대로 나이가 갈리면서

누나는 일에 치이고 주변에 치이고 하는거 같았다

 

누나가 회사에서 힘들다고 위로를 원할때도

난 그 위로를 어떻게 해주는지 몰랐고 그저 토닥여줄뿐이였다

누난 그것만으로도 힘이 된다고 했지만

그게 쌓이고 쌓여가면 스트레스가 되고 몸에 부담이 가는건 당연지사였다.

 

누난 아프다고 하는 날이 늘었고

난 그게 늘 안쓰럽다고 하면서도... 도와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멀기도 했고...

 

"생각은 늘 하지. 결혼도 생각하고

이제 취직도 생각해야 하고

자기랑 행복하게 사는것도 생각하고 있고."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를뿐이지 생각은 늘 했다

취직? 취직은 어떻게 해야하지?

대학은 점수에 맞춰서 왔기에 전공은 원하던게 아니였다

그렇다고 꿈이 있어서 하고싶은게 있는것도 아니고

 

그저 대학만 졸업하면 그래도 뭔가를 하지는 않을까 마냥 생각하고 있었고

누나는 하고싶은걸 해봐라, 전공보다 원하는걸 해라, 라며 조언해줬지만

그게 와닿지는 않았다.

 

당장 누나랑 데이트 하는 비용만 해도

알바를 안하면 감당이 안되니까

호프집 알바를 하며 충당하고 있었고

누나는 자기가 더 많이 내겠다며 나를 토닥여줬지만

그게 하루 이틀이 아닌 3년 가까이가 되자

부담 아닌 부담으로 내 마음에 돌덩이가 되어 있었다.

 

누나랑 행복하게 산다는건 뭘까

어떻게 해야 누나를 행복하게 해주는걸까.

 

"결혼... 해야지 누나. 우리 결혼 할거야"

 

누나는 집에 나의 존재를 알리기는 했지만

누나 집안에서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얼굴 한번 못뵈고 찾아 뵐 생각도 못했지만

감히 찾아갈 수도 없었다.

아직도 스물넷의 학생나부랭이라

나를 어필할 수 있는 그런게 없다고 생각했다

 

누나는 부동산 업계에서

오랜 시간을 일해오며

커리어도 있고 능력도 인정받은 인재였다

지금 다니는 회사 말고도 다른 회사에서

스카웃 제의가 있을 정도였다

 

누나가 내게 스카웃 제의에 대한 상담을 했을때도

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었다...

 

진지한 술자리가 되가고 있었다.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 누나를 만날때와는 다른 그런 떨림이었다.

좋은 떨림이 아닌 불안에서 오는 떨림

게다가 이 떨림의 끝은

결코 좋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누나 집에서 막 선도 보라고... 하는데

정우 넌 어떻게 생각해?"

 

선은 무슨.

다 때려치고 나만 만나야지

내 여자면 나만 만나다가

나랑 결혼해야 하는거 아냐???

 

목구멍까지만 이 말이 딱 나오다가 들어갔고

난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졸업도 해야하고 취직도 해야하고

그게 언제일지도 모르겠고

 

누나는 좋고, 사랑하고, 만나고 싶고

평생 누나랑만 함께 하고 싶은데

어디 가지말고 내 옆에만 붙어 있으라고 하고 싶은데

 

그게 입밖으로 꺼내지지 않았다.

 

그때처럼 누나가 한발짝만 더 다가섰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막 빌고 있으면서

내가 다가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참 비겁하고 용기없고 매너없고 어린 새끼였다.

나는 그런 새끼였다

 

#

 

항상 즐겁기만 하고 유쾌하기만 했던 누나와의 만남은

그날을 기점으로 뭔가 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결혼은 생각만해도 기쁘고 황홀하고 해야 하는데

난 결혼 생각만 하면

무겁고 참담하고 아찔했다

미래를 그리기는 커녕 붓조차 꺼내들지 못하고 있었다.

 

바보 멍청이

난 정말 그런 놈이였다

 

누나가 생각했던 나이답지 않게 의젓하고 듬직한 이런건

찾아볼 수 조차 없었다

아니 있기나 했나 모르겠다...

 

전화를 하면 뜨거워질 동안 통화를 하던 우리가

대화할게 없어 침묵하는 시간이 생기기 시작했고

매일 하던 문자도 조금씩 줄어들고

쪽지는 아예 하지도 않게 됐다.

 

그쯤 길드까페는 게임 오픈의 영향을 받아

더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었는데

우린 그때쯤 까페는 들르지도 않았다.

 

누나는 변한게 없는데.

나도 변한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누나가 여전히 좋은데

누나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다 하루는...

누나가 정말 아프다고 쓰러질거 같다고 하소연을 했는데...

호프집이라 새벽 알바를 하고 있던 나는

그런 누나의 전화를 받고도

새벽에 그 먼거리를 갈 수단이 없어서 갈수가 없었다.

 

이 병신, 돈이 얼마가 들던 택시를 탔으면 됐는데

그땐 그럴 돈도 없고 그런 판단을 내릴 용기도 없었다

 

누나는 결국 정이누나가 응급실에 바래다주고 다음날 회사를 쉬었고

난 그 다음날에 급히 올라갔지만

차가운 정이누나의 시선과

차마 희정누나의 복잡한 시선을 이겨내지 못하고

오랜 시간 머무르지 못한채 내려오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난 죄책감과 앞으로에 대한 자신감을 잃은채

그렇게 예쁘고 상냥하고 착한 희정누나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건낸다.

 

누나는... 참 많이 울었고

나도 참 많이 울었다

 

그냥 병신같이 울기만 했다

 

#

 

그 뒤로 누나랑 연락을 끊은건 아니였다

정이누나랑 셋이 보기도 했고

가끔 둘이 안부도 물으며 걱정을 해주기도 했다

 

내가 취직할때 제일 먼저 축하해준 것도 희정누나였고

졸업할때 선물을 사준것도 희정누나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있을때 달려와준 것도 희정누나였다.

 

그리고 나는

 

희정누나가 결혼할때도 제일 먼저 축하해줬고

희정누나의 아기가 태어날때도 축하해주고

돌 잔치에도 찾아가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그랬다.

 

누나는 두살 위의 같은 업계 사람을 만나

여전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며

아기는 누나를 닮아 동그랗고 예쁘고 그랬다.

 

우린 1년에 한번 생일때,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선물을 주고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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