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산업혁명의 결과로 여러 국면에서 인류의 생활 속도는 급속도로 빨라졌다. 목재위기를 마주한 유럽은 다행스럽게도 새로운 에너지 체제로의 전환을 통해 문명의 발전을 이뤄냈다. 석탄과 증기기관, 인쇄술 등의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진보로 인류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증기기관차가 대륙을 누비며 사람과 화물을 날랐고, 인쇄술의 극적인 혁신으로 대중들은 싼 값에 출판물을 접하게 되었으며 인구 또한 기록적인 속도로 불어났다. 산업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도시화는 점차 가속화되었고 정부의 정치적 역량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인류는 바야흐로 경이롭고도 놀라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는 중이였다. 글을 배우는 부르주아와 노동 계급이 더 많아졌고, 사회는 더 합리화되고 완전해져만 갔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개인은 더욱 더 갈기 갈기 찢어졌고, 점차 소외되어 갔다. 문명의 진보라는 거대한 물결 속에서 개인이 갖는 의미는 점차 흐릿해져만갔고, 철학을 이야기하던 인문주의 시대의 교육은 근대 공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학교의 공장화가 이뤄지면서 종말을 고했다. 학생들은 학교를 통해 장차 그들이 새로운 공장과 사무실에서 감당해야할 시간적, 물리적 조건에 익숙해질 수 있도록 훈련받았다. 학생들이 배우는 지식은 시장에서 이익을 내는 데 필요한 도구요 자산이었으며 국가의 힘이 되었다. 국가는 학생들에게 이제 막 가도에 오른 국가 경제의 발흥을 위해 <생산적 시민>이 될 것을 강요했다.
이것이 바로 과거 유럽의 모습이었고 현재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모두가 다 똑같은 눈코입을 하고 똑같은 목적지를 향해 간다. 물질만능주의로 팽배한 이 자본주의 사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는 삶과 인간성이라는 측면에서 당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돈과 부라는 형태로 그것을 되돌려준다. 그러나 빈익빈 부익부라는 기형적 자본주의의 변질로인해 그 돈과 부라는 것도 정당한 수준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세상은 점점 안에서부터 곪아만 간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내일을 바라며 살지만 내일은 결코 오지 않는다. 그들은 타는 듯한 갈증에도 마실 물을 찾을 수 없기에 바닷물을 들이킨다. 그들의 갈증은 잠시 해소되는 것 같아보이지만 결국 더 극심한 갈증만 초래할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에게 노후 준비라는 관념을 세뇌시켜 오로지 이 거대한 물질적 세계의 작은 톱니바퀴 부품으로서 일생을 보내도록 강요한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꿈나무들이 자신들의 꿈을 '직업'만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그 직업마저도 자신의 가치관이 아닌 사회의 가치관에 의해 정해진다. 배움의 요람이라 불리었던 대학으로의 진학은 오로지 명문이라는 간판 타이틀과 취업전망에 의해 결정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 본성에 깃든 무한한 가능성은 꿈꿀 수 없는 공상에 가깝다.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신 앞에 홀로선 실존을 통해 인간 본연의 의미에 관해 이야기 했지만 우리는 그저 개인의 이익을 쫓아 시장에 홀로 설 뿐이다. 이기적인 물질적 탐욕에 소중한 인생을 다 바쳐야 할 정도로 빠르게 산업화되어 온 사회 속에서 우리는 그저 낮게 엎드릴 뿐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노골적으로 상품화되어간다. 수많은 대학생들이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조차 모른 채, 강요받은 삶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자신이 원하는 삶이었다고 착각하며 자위하는 이들이 결코 적지 않다.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닌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고, 돈의 노예가 되어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숨긴 채 사회에 잘 팔려보기 위해 나를 포장한다.
세상의 가치관에 도대체 어디까지 순종적일 것인가? 그 어처구니 없는 입시 전쟁에 얼마나 투신할 것인가?
이 넓은 세상에는 수많은 다양한 직종이 있으며, 저마다 각자의 다른 삶의 모습이 있다. 그렇게 폭넓은 세상에 살면서 왜 처음부터 우리는 회사에 취직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살아왔는가. 처음부터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칠 작정으로 마냥. 친구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다는 이유로 직장인이 되는 것. 자본주의 사회의 아주 작은 부속품으로 자신을 단정짓는 것. 그야말로 어리석음과 안이함의 극치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지 않은가! 한시도 안심할 수 없는 이 험난한 세상을 자신의 판단과 결단과 실천으로 살아가기 괴로워하는 것이 인간이라지만. 편하게 사는 것만 지향하는 무기력하고 무능한, 배부른 돼지가 되어버린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불합리에 대한 분노를 포기한 인간은, 저항의 정신을 내던진 인간은 인간임을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삶 자체를 스스로 포기한 짐승이다. 인간은 철학하는 존재다. 철학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그저 사회에 자신을 내던진 채 좋은 옷, 좋은 집, 이쁜 여자, 돈 많은 남자를 쫓는 인간은 인간의 탈을 쓴 개 돼지와도 같다. 그런 것 외의 눈에 안보이는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것.. 그게 철학이고 그것이 인간의 삶이다. 본능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고민하는 것은 짐승의 고민이다. 인간의 고민은 눈에 안보이는 진실의 가치를 두고 고민하는 것이다. 철학을 안하겠다는 말은, 앞에서도 언급했 듯이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부로 자본주의에 종말을 고한다. 삶의 철학을 억압하는 자본주의는 여기서 끝나야 한다. 자본주의는 이미 오래전 우리에게 물질적 풍요를 안겨주었지만 그만큼의 정신적 풍요또한 앗아가버렸다. 이제 우리는 인간 본연의 의미에 관해 고민할 때가 온 것이다. 자본주의의 시대는 끝났다. 개인의 이기적 동기는 막을 내렸고, 인간성의 회복만이 남았을 뿐이다. 사회적 자아의 옷을 벗어버리고 모든 허위와 가식을 던져버리고, 사람과 사람으로서. 존재와 존재로서. 그리고 이를 넘어 온 세상과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해가 뜨고, 또 그 해가 지기까지 자연은 얼마나 다양한 이치와 의미를 이 세상에 보내주는가. 그것을 발견하고 깨닫는 자에게 오늘 하루는 또 그 얼마나 특별한 축복일 것인가!
살수록 인생이란 재미없고, 의미없고, 기대한 만큼 아니었다고 실망한다면 그것은 죽은 것과도 같다. 오늘 살아있지 못하면 어제에도 내일에도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를 후회하지 말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살아있음에 감사하지 못하다면,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의 경이로움에 가슴이 두근거리지 못한다면. 나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지금 이 시간만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버리는 과거의 낡은 자본주의는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때다. 이 세상과 사랑하고 공감하라! 그리하여 내가 세상이 되고 세상이 내가 된다면 그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존재의 적은 소유다! 소유에 집착할수록 소유가 우리를 규정하고,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존재와 멀어진다.
이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배부른 돼지가 될 것인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될 것인가.
물론, 자본주의가 진정으로 막을 내리고 인간성 회복이 이뤄지는 사회가 도래한다면 우리는 배부른 소크라테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