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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
게시물ID : readers_1672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지퍼래빗
추천 : 0
조회수 : 31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10/18 01:44:59



미정



  재색 하늘은 무거운 구름을 이고 끝끝내 비를 쏟아붓진 않고 있었다. 시커멓게 불러버린 구름 때문에 하늘은 꼭 머리 위로 뛰면 닿을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죽은 꽃과 침묵이 가득한 거리, 낡고 외상이 많은 건물들 사이의 좁은 틈에서 피부가 하얀 여자가 손에 권총을 쥐고 숨어 있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걸 꼭 알고 찾아온 것 같아."
여자는 말을 전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는데 짧은 머리는 금세 따라붙어 가볍게 여자의 볼에 붙었다. 
"오늘도 허탕이겠군."
여자의 아래에 몸을 낮추고 있는 남자는 굵은 턱을 가진 건장한 사내였는데 한쪽 종아리가 얇은 쇠붙이로 되어 있었다. 남자는 의족을 단단히 고정시키고는 여자의 몸 너머로 거리를 살폈다. 
"더 태울 것도 없는 곳이니 놈들도 맥이 빠지겠지. 알고 온 건 아닌 거 같아. 수색이 더뎌."
"그래도 이상해. 의례 온 것치곤 제법 살피잖아?"
남자는 다시 벽에 등을 붙이고 심호흡을 했다. 여자는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붉은 입술과 선명한 눈동자 덕에 표정만으론 그녀의 활력을 감출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웃었다.
"우리만 걸리지 않으면 금방 돌아갈 거야. 내 말 믿어. 걱정하던 내부고발자는 없어."
여자는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컴스]에서 굉장히 향기로운 미끼를 던졌잖아.  사람들이 흔들리고 있어. 눈빛을 보면 알아."
남자는 다시 여자를 스쳐서 잽싸게 거리를 살피곤 그대로 여자의 바짝 앞에 서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불안한 눈빛을 봤다고 해도 우린 누구보다 저들을 잘 알잖아. 걱정 마. 우린 분노로 뭉쳐있어."
여자가 고개를 돌리고 남자를 밀어냈다.
"아니! 우린 살기 위해 뭉쳐있지. 너야말로 정신 차리는 게 좋을 거야. 지금도 분노를 가지고 있는 건 몇 명 안될 테니까. 난 사람들 눈빛을 봤어. 언제든지 원하기만 하면 프리슨의 구성원으로 받아주겠다는 말. 그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얼굴을 봤다고! 사람들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해. 다시 노예가 되어도 그렇게 살고 싶어해. 지금을 훨씬 비참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남자는 흥분하려는 여자를 다시 붙들고 입으로 쉬쉬 거리며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면서 거리를 슬쩍 살피고는 별 낌새가 없자 다시 여자를 보고 말했다.
"약해지지 마. 네가 약해지면 끝이야. 사람들은 널 좋아해. 넌 건강하니까. 넌 언제나 향기처럼 건강함을 뿜어내니까 사람들은 널 의지하고 있다고. 우린 이 싸움을 이겨야 해. 그러기 위해 죽기를 각오했잖아."
여자는 남자의 말을 듣고 맥 빠진 사람처럼 기운없이 늘어졌다. 벽에 기대 시선을 흐리는 그녀의 눈빛은 선해보였고 슬퍼보였다.
"이 싸움이 너무 길어지고 있어."
"이길 거야. 장담해. 그러려면 일단 저것들이 돌아갈 때까지 지켜야지. 들키지 않으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손에 쥔 권총을 더 꽉 움켜쥐었다.
"이동해야 해. 가까워지고 있으니까. 달릴 수 있겠어? 여차하면 뛰어야 하니까 다시 한 번 점검해."
남자는 의족을 땅에 쿵쿵 내려찍고는 웃었다.
"이상 무. 높은 곳에서 감시하면 좋겠는데 그러긴 위험하지. 생체반응을 스캔하면 딱 걸릴 테니까. 두 블록 뒤로 이동하자."
둘은 눈빛으로 신호를 주고 받고는 함께 거리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멀리 검은 형체 여럿이 무리지어 있는 게 보였다. 둘은 골목 안 쪽의 좁은 길을 이용하기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좁은 골목은 눈에 띄지 않고 이동하기 좋지만 요소를 잘 알고 있는 상대라면 더 쉽게 눈에 띌 수 있기도 했다. 여자는 움직이기 전에 먼저 전방을 살피고 내려다보기 좋은 포인트를 살피면서 이동했다. 짧은 구간을 이동할 때는 재빠르게 움직이고 몸을 숨길 수 있는 곳에서 다음 포인트를 체크했다.
골목길 안으로 걷다가 여자가 급히 몸을 벽에 붙였는데 뒤따르던 남자도 잽싸게 그녀를 따라했다. 여자는 바닥을 내려다보고 작은 실소를 토했다.
"아이러니해. 더는 사람도 개도 고양이도 살지 못하는 곳이 되었는데 용케 이놈들은 살아있다고."
여자는 조급증에 걸린 환자처럼 정신없이 킁킁대며 바닥을 기고 있는 지저분한 쥐를 보고 있었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 쥐를 확인한 남자도 역시 실소를 뱉었다.
"그러게. 여기에 더 먹을 것이 있다는 게 믿기 힘드네."
여자는 쥐가 무너진 벽의 잔해 속으로 사라지자 다시 걸음을 내었다. 잠깐 따라가다 남자가 궁금하단 듯이 물었다.
"근데 방금 뭐가 아이러니하다는 거야?"
"응?"
여자는 못 들은 체 했다.
"쥐 말이야. 아이러니하다고 했잖아. 어디가 그랬어?"
굉장히 서글픈 얼굴이 되었다가 금세 표정을 고친 여자는 담담한 체 하려 애썼다. 대답대신 숨을 잔뜩 뱉었지만 남자가 듣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대답을 했다.
"꼭 우리 같잖아."
대답을 들은 남자의 눈에선 처음엔 불꽃처럼 화가 일었지만 곧 누그러지고 그녀를 이해한다는 측은함만 가득 담아냈다.
"틀렸어. 쥐는 프리슨 국민들이지. 그들과 달리 우린 인간이니까."
여자가 미안한 듯한 얼굴로 시선을 떨구자 남자가 차분히 얘길 이었다.
"기억나? 약국 할아버지. 꽤 부자였지. 그러다 정부가 프리슨에게 굴복하면서 모든 재산이 종잇조각이 되자 할아버지는 정부 집권부의 관저를 찾아가 이렇게 외쳤어. 나는 인간이다. 개처럼 쓰레기를 주워먹기 전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죽겠다, 라고. 그리곤 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지. 우린 인간이야. 인간으로 태어났어. 그러니 인간으로 죽을 거야."
여자는 애써 환하게 웃었다.
"미안해."
남자는 그녀의 어꺠를 쓸어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도 남자의 자상한 표정에 위로를 받은 듯 했다.
"빨리 이동하자."
여자는 더 속도를 높여서 움직였고 남자는 제법 잘 쫓았다.

 둘은 아까처럼 넓은 거리가 보이는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남자는 벽에 기대 호흡을 가다듬었고 여자는 침착하게 눈을 바깥으로 내 거리를 살폈다. 
"안 보여."
"돌아갔나?"
여자는 계속 거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아까의 약한 소릴 할 때완 딴판으로 매섭게 빛났다.
몇 분동안 꿈쩍도 않고 거리를 보는데 역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자 여자는 슬쩍 눈을 감았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쉬게 하는데 남자가 말을 건넸다.
"돌아갔을 거야. 공무원들."
남자는 실실 웃었는데 여자는 움직이지 않고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거리에 가늘게 바람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여자의 머리칼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여자는 감았던 눈을 번쩍 뜨고 소스라치게 놀라 남자에게 소리쳤다.
"레이저야!"
그 순간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거리에 울려퍼졌고 그 소리는 둘의 온 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어서 움직여! 숨어야 돼!"
여자는 남자를 재촉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렸다. 남자도 의족을 달고 제법 잘 달렸다. 둘은 아까의 길로 돌아가 쥐가 사라졌던 무저진 벽으로 들어갔다. 안은 부식된 낡은 가구와 정신없이 흩어진 잔해들과 먼지 뿐이었는데 여자는 바닥을 만지더니 깨진 마루의 아래를 살폈다.
"들어가 어서!"
여자의 소릴 듣고 남자는 재빨리 몸을 움직였는데 동시에 바깥을 쏜살같이 지나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필사적으로 움직여 여자를 마루 바닥에 밀어넣어버렸다. 여자는 갑작스런 무력에 고꾸라지면서도 신음소리를 숨겼다.
마루 아래는 지하실이었는데 바닥이 깨지면서 입구가 생긴 것이었다. 여자는 굴러떨어져 바닥에 바짝 누워서 지하실 천장을 바라봤다. 
누군가의 발걸음에 맞춰 천장에 붙은 먼지가 떨어져내려 여자의 얼굴에 닿았다. 
여자는 움찔거렸다. 천정의 발걸음은 분명 남자의 것이라고 생각했고 남자의 뒷걸음질엔 까닭이 있을 것이었다. 
남자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을 때, 허공을 베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에 살이 벌어지고 피가 튀는 끔찍한 소리가 쏟아졌다. 
소리는 계속해서 몇 번이나 되풀이 됐다. 여자는 계속 움찔 거리기만 했다. 
무거운 것이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먼지가 잔뜩 떨어져 여자를 덮었다. 여자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 다시 가는 바람소리가 들렸고 그것이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여자는 여전히 움직임 없이 움찔거리기만 했다. 
한참을 바람소리가 사방에 울렸다. 소리는 가까워지다 멀어지다를 반복하며 오직 그 소리만이 세상에 가득했고 다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 살벌한 상태는 굉장히 오래 이어졌다.
 바깥에서 들리는 그 무서운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자 여자는 격정적으로 몸을 떨었다. 흔들리는 손을 힘겹게 가져가 입술을 틀어막았다. 그리곤 눈을 질끈 감꼬 미친듯이 소리치며 울었다. 내장을 쏟아버릴 기세로 소릴 질렀지만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어떤 절규도 흘러나오는 일은 없었다.
여자는 실컷 울었고 아픈 사람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러면서 계속 몸을 떨고 또 떨었다.

 여자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해서 지하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남자의 죽음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끔찍한 상처를 남길 게 분명했기에 여자는 계속해서 마음을 다잡고 속이고 했지만 몸을 일으키려할 때마다 번번이 새로 눈물이 쏟아졌다. 
여자는 부들부들 떠는 입술로 아픈 신음을 계속 뱉었다. 
남자가 죽은 것으로 이제 이곳은 안전하지 않다. 그녀는 생각했다. 
다시 도망쳐야 한다. 그녀는 생각했다.
사람들을 데리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녀는 생각했다.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우리의 죽음으로는 아무 것도 증명할 수 없다. 우리가 인간이었음을, 그들이 잘못된 것임을. 우린 반드시 이겨야 했음을. 
그녀는 생각했다. 
해가 저물고 완전한 어둠이 그녀를 밖으로 내모는 것처럼, 혹은 그녀를 삼켜버릴 것처럼 무겁게 스며들었다. 
그녀가 이미 두려움에 질식해 숨져가는 와중에서도 새로운 어둠에 겁을 먹고 있을 때 바깥에서 시원하게 쏟아져내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빗소리는 그저 쏟아지기만 했다. 모든 것을 씻어버릴 것처럼. 어쩌면 모든 것을 부숴버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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